부활신앙의 회복 – 장재형목사

장재형목사

1. 예루살렘 마가의 다락방, 부활신앙의 현장

예루살렘의 마가의 다락방은 기독교 교회사에서 특별한 의미를 가진 공간이며, 동시에 오늘날 교회 공동체에 깊은 영적 통찰을 주는 장소로 잘 알려져 있다. 이 다락방은 사도행전 1장부터 2장으로 이어지는 매우 중요한 장면의 무대가 되는데, 바로 여기서 초대교회의 태동과 성령 강림 사건이 일어났다고 전해진다. 또한 그 시작점인 사도행전 1장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지상 사역을 마무리하시는 시점, 즉 승천 직전 제자들에게 마지막 당부와 약속을 주신 사건이 기록된 장면이다. 그리고 이 다락방은 단지 물리적 공간의 개념을 넘어, ‘초대교회가 두려움 속에서도 예루살렘 한복판에 모여 역사적 변화를 일으킨 상징적 장소’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장재형 목사는 이 장면을 가리켜 “비록 제자들이 공포와 두려움에 떨고 있었지만,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약 40일 동안 그들을 직접 찾아오셔서 다시 세우시고, 믿음을 불어넣어 주신 뒤 예루살렘으로 모이게 하셨다”라고 설명한다. 제자들은 갈릴리까지 흩어졌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서야 비로소 “부활신앙”으로 무장되어 예루살렘에 돌아올 수 있었다. 이는 신앙공동체 안에서 부활이 어떠한 힘을 발휘하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이며, 그 출발점에 마가의 다락방이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왜 굳이 예루살렘이어야 했을까? 예수님께서 잡히시고, 거기서 처형되셨던 도시가 예루살렘이다. 제자들에게는 몹시도 두렵고 참혹한 기억이 남은 곳이었을 것이다.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후, 그분을 따르던 많은 이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주님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려라”(행1:4-5)는 말씀을 직접 주심으로써, 제자들이 오히려 가장 위험하고 두려운 지역에 다시 모이게 하셨다. 장재형 목사는 이를 “하나님의 역사는 늘 우리의 기대와 상식을 뛰어넘는다. 부활신앙이란, 가장 절망적인 곳에서 가장 소망을 전하는 힘을 발휘할 때 드러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부활신앙의 특징은, ‘죽음이 끝이 아니다’라는 확신에 있다. 제자들이 한때는 ‘주님이 처형당했고, 이제 우리도 붙잡혀 죽을 것’이라는 두려움 속에 주저앉았으나, 예수님께서 실제로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다시 살아나신 모습을 보고 “죽음 그 너머의 새로운 시대”를 경험한 것이다. 그래서 사도행전 1장 3절에서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40일 동안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셨다”고 증언한다. 여기서 “하나님 나라의 일”이란 단지 막연한 종말론이나 철학이 아니라, 지금 현실에서 교회가 어떤 능력으로 세워져야 하고, 어떻게 전진해야 하는지에 대한 구체적 방향을 포함한다. 그 핵심 중 하나가 “너희는 예루살렘에서부터 출발하라”는 말씀이다.

장재형 목사는 “사람이 가장 약해지고 넘어졌던 곳에서 다시 회복하는 역사를 ‘부활신앙의 실제’라고 정의할 수 있다”고 말하며, 이것이야말로 예루살렘 마가의 다락방이 주는 교훈이라 강조한다. 처음에 제자들이 이 다락방에 모였을 때, 그 분위기는 지극히 숨죽인 상태였을 것이다. 십자가 사건 직후, 예수님의 시신이 무덤에 안치되었고, 지도층은 예수님의 잔당까지 모조리 소탕하려는 기세가 등등했다. 그렇기에 그 다락방은, ‘잠깐 모여서 기도하는 안전한 은신처’ 정도로 활용되었을 수 있다. 그러나 주님은 “그곳에서 멈추지 말고 기다리라. 멈추어 서 있으라는 의미가 아니라, 성령을 받을 때까지 머물라는 것”이었다. 마가의 다락방이 이처럼 ‘무력한 도피처’에서 ‘능력의 발원지’로 바뀌게 된 것은 바로 성령 강림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곧 성령이 임하심으로(행2장), 그들은 더 이상 두려움 속에 숨은 제자들이 아니었다. 공포의 공간이던 다락방이 부활의 확신과 성령의 능력이 임하는 현장이 되자, 제자들은 그곳을 떠나 예루살렘 거리로 나아가 담대히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 장재형 목사는 “부활이 교리로만 남아 있다면 의미가 없지만, 부활신앙이 실제 삶을 뒤엎는 능력이 될 때, 사람들이 마침내 예루살렘성 안에서조차도 두려움을 뛰어넘어 행동하는 변화를 보게 된다”라고 역설한다.

이런 ‘행동하는 신앙’은 곧 사도행전 전반에 드러난다.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사마리아와 온 유대, 그리고 땅끝에 이르는 역사적 복음 전파의 여정이 펼쳐지는 것이다. 신앙이 행동으로 이어진 가장 첫 번째 장면은 사도행전 2장 오순절 사건에서 드러나듯, 골방에 숨어 있던 이들이 거리로 나아가 복음을 선포하고, 하루에 수천 명이 회개하고 세례받는 장관이 펼쳐진 것이다. 그 발화점이 바로 마가의 다락방이었다.

한편, 이 다락방은 “교회의 모태” 또는 “교회의 자궁”으로 비유되기도 한다. 그 이유는 새 시대가 마치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는 것처럼,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확신과 성령 강림으로 인해 실제로 ‘새로운 공동체’가 그 안에서 잉태되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아직 지상에 계실 때는, 제자들은 말씀을 배우며 동행하는 수학(修學) 단계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성령이 임하신 이후, 제자들은 ‘교회 공동체의 기둥’으로서 스스로 복음을 확장해나가는 주체가 되었다. 다락방은 그 전환점의 심장부였고, 그 동력이 곧 부활신앙이었다.

요한복음 21장에서 베드로의 회복 장면을 떠올려보면, 제자들이 어떻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고, 또 어떻게 다시금 사명을 확인하며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순종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 부인한 이후, 주님께서 그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세 번 묻고, 베드로가 그 사랑을 고백함으로써 비로소 무너진 자기 자신을 끌어안고 ‘반석’(베드로)으로 거듭 태어난다. 장재형 목사는 이 장면에 대해 “교회가 특정 프로그램이나 조직력으로 움직이지 않고, 결국 그 근본 동력은 ‘주님을 향한 사랑’에서 출발한다. 그 사랑은 곧 주님의 부활하심에서 기인하고, 우리를 품어주신 그 은혜를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할 때에야 견고해지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마가의 다락방 역시 이와 같은 ‘고백’과 ‘회개’와 ‘믿음’의 집합체였다. 부인했던 제자들, 뿔뿔이 흩어졌던 제자들이 다시 돌아와 하나의 공동체가 되고, 절망을 넘어서는 용기를 내어 모일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의 부활과 성령의 약속 때문이었다. “마태복음 26장 이하에 기록된 예수님의 고난 현장과, 요한복음 21장 갈릴리로 돌아간 제자들의 모습, 그리고 사도행전 1장의 예루살렘으로의 귀환이 한 줄로 연결될 때, 비로소 부활신앙이 오늘날 교회에 실질적 메시지를 준다”고 장재형 목사는 거듭 강조한다.

이렇듯 예루살렘 마가의 다락방은 결과적으로 ‘두려움에서 대담함으로, 흩어짐에서 모임으로, 수치와 부인에서 회개와 고백으로’ 전환하는 현장이 되었다. 오늘날 교회가 이 점을 깊이 묵상할 필요가 있는데, “교회가 어느 시점부터 사회적 지탄이나 박해의 두려움 속에 숨어만 있는다면, 다시 마가의 다락방에 임한 성령의 불꽃이 필요하다”는 메시지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부활신앙의 현재적 적용이기도 하다. 죽음을 깨뜨리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마치 여전히 우리와 함께하듯 교회를 세우시고, 그 교회가 세상 한복판에서 담대히 복음을 전하도록 지지해주신다는 사실을 붙들 때, 우리는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땅끝까지” 이르는 길을 기쁨으로 갈 수 있다.

이 모든 맥락에서 장재형 목사는 “마가의 다락방을 단지 역사적 장소로만 여기지 말고, 현재의 교회마다 자기만의 다락방을 회복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것이 곧 ‘성령의 임재를 사모하고 기도하는 자리’일 수도 있고, ‘부활신앙을 함께 붙들고 고백하는 자리’일 수도 있다. 다락방에 모여 기도한다는 것은, 내부적으로 숨는 행위가 아니라 “거기서 능력을 받아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한 최종 준비”라는 점이 핵심이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가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행1:5)고 하셨듯, 그런 약속이 ‘다락방’에서 성취되었기에, 초대교회는 결코 사라지지 않고 전 세계로 뻗어나갔다.

2. 맛디아의 선택, 유다의 빈자리를 메우는 교회의 회복

사도행전 1장 후반부에서 제자들은 열두 번째 사도의 자리를 새롭게 채우는 사건을 맞이한다. 부활절을 지나 오순절로 향하는 그 사이, 가장 큰 이슈 중 하나가 “예수님이 열둘 중에 한 사람으로 부르셨던 가룟 유다의 배신과 그 후속 처리를 어떻게 할 것인가”였다. 유다는 예수님을 은 삼십에 팔아넘긴 뒤,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 그뿐 아니라, 그는 불의한 삯으로 밭을 산 뒤 거기서 몸이 떨어져 장기가 터져 죽었다는 기록(행1:18)으로 인해 “핏값의 비극”을 상징하는 인물이 되었다.

장재형 목사는 유다의 비극을 “가장 가까운 자리에 있던 사람이 오히려 가장 큰 범죄를 저지른 사건”이라고 표현한다. 유다는 제자 공동체 안에서 돈궤를 맡던 자였으니, 사실상 재정을 관리하고 봉사하는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교회도 마찬가지로, 재정을 맡고 봉사하는 자리가 때로는 은혜가 충만해야 할 중요한 자리가 되지만, 동시에 사탄의 유혹과 시험이 들어오기 쉬운 통로가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공동체를 운영하기 위해 돈이 필요하고, 이 돈이 때로는 세속적인 이익이나 욕망을 건드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경은 교회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딤전6:10)고 거듭 경계하고, 초대교회가 “모든 재산을 서로 통용하며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었다”(행2:45, 4:34)고 기록함으로써, 물질에 얽매여 부패하지 않도록 초점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유다는 물질적 욕심과 정치적 계산이라는 틈을 통해 사탄에 의해 쓰임받아, 결국 예수님을 팔아넘기는 배신자가 되었다. 그는 배신 직후 뒤늦은 후회를 했지만, 제대로 된 회개에 이르지 못하고 극단적 선택으로 생을 마감함으로써, ‘제자 중 하나를 잃었다’는 뼈아픈 상처를 교회에 남겼다. 열두 제자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상징하는 영적 기둥이었고, 주님이 친히 세우신 “새로운 언약 공동체의 문”과 같았다. 그 한쪽 문이 무너졌으니, 이 문을 다시 세우는 작업이 시급했을 것이다.

이에 사도행전 1장에서는 그 공석을 채우기 위한 회의가 열린다. 여기서 초대교회는 새롭게 사도의 자리를 메울 인물을 뽑는데, 그것이 바로 맛디아다. 그 과정을 눈여겨보면, 교회의 위기 대처 방식이 어떠했는지 배울 수 있다. 사도행전 1장 21~22절에서 베드로는 이렇게 제안한다. “이 일, 곧 우리와 함께 다니면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증인이 될 사람을 찾아야 한다. ‘요한의 세례’로부터 주님이 승천하시는 그 날까지 우리와 늘 함께하던 사람 중 하나를 세우자.” 그 결과, 두 사람이 후보에 올랐고, 초대교회는 그 자리에서 제비를 뽑아 맛디아를 선택했다.

장재형 목사는 여기서 주목할 몇 가지 포인트를 제시한다. 첫째, 초대교회가 “부활의 증인”을 최우선 자격 요건으로 삼았다는 점이다. 교회가 존재하는 목적은 부활하신 주님을 증거하기 위함이므로, 사도의 핵심 사명 역시 부활의 소식을 전하는 일이었다. 맛디아를 비롯해 후보가 되었던 사람들은 이미 예수님의 공생애와 고난, 죽음, 부활까지 전 과정을 옆에서 지켜본 사람들로, 사실상 열두 사도와 함께 늘 다니며 배웠던 이들이었다. 둘째, 선택 과정에서 보이는 공동체적 합의와 기도, 그리고 제비뽑기가 인상적이다. “모든 사람의 의견과 교회의 합의가 중요했고, 마지막 단계에서 하나님의 주권적 결정에 운명을 맡기는 방식”을 택했다. 이는 교회가 단지 인간적 계산이나 정치적 타협으로 리더를 뽑지 않음을 시사한다. 셋째, 이렇게 뽑힌 맛디아가 이후 교회에서 어떠한 능력을 나타냈는지에 대한 기록 자체는 성경에 길게 남아 있지 않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열두 제자가 온전히 회복되어 다시 오순절 성령 강림을 맞이할 준비가 완료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 선택의 과정이 중요할까? 교회가 성령이 임하기 직전 가장 먼저 한 일이 바로 “지도자 팀(사도단)을 회복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유다가 만들어낸 공백과 배신으로 인한 상처를 치유하지 않고서는 교회가 온전히 하나가 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사람의 마음 속에는 여전히 “우리 중 하나가 주님을 배반했다”는 배신감이 남아 있었고, 그 가운데 제자들은 서로를 향한 신뢰 회복이 시급했다. 또한 각자 흩어졌던 제자들이 다시 예루살렘에 모여 함께 기도하면서, “이제는 다시는 그런 배신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라는 단단한 결속을 다져야 했다.

장재형 목사는 “교회 안에 생겨난 상처, 지도자의 배신이란 것이 얼마나 공동체를 무너뜨릴 수 있는지, 유다의 사건이 상징적으로 보여준다”라고 지적한다. 그렇기에 초대교회는 가룟 유다의 사건을 단순히 잊어버리거나 덮어두지 않고, 아예 교회 첫 발을 내딛는 시점에 투명하게 정리하고 넘어갔다. 유다가 남긴 핏값의 돈은 성전에 던져졌고, 그것으로 ‘피밭’을 샀다는 사실(마27:5-8)이 공공연히 드러났다. 교회는 이 부끄러운 역사를 숨기지 않고, 되레 예언(예레미야나 시편)에 입각하여 “이 일이 예언이 성취되는 과정의 일부”라고까지 받아들이며, 공동체 전체가 한 목소리로 기도하고 새 인물을 임명했다.

그리하여 맛디아가 사도의 자리를 이어받게 되었다. 교회는 다시 열두 사도의 틀을 회복하고, 그 안에서 더욱 공고해진 영적 유대감 속에 오순절 성령 강림을 맞이했다. 그리고 그 성령의 힘을 입은 사도들은 예루살렘을 기점으로 온 유대와 사마리아를 넘어 땅끝까지 복음을 확장해 나가게 된다. 만일 유다의 배신과 죽음으로 인해 생긴 내분과 상처를 방치했다면, 교회가 출범하기 전부터 붕괴될 위험이 컸을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그 상처를 드러내어 해결하고, 회복의 과정을 공적으로 선포함으로써, 교회가 더욱 성숙한 모습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또 다른 관점에서 유다의 실수와 죽음은, 초대교회에 ‘결코 그 누구도 이 길에서 방심해서는 안 된다’라는 경각심을 심어주었다고 볼 수 있다. 예수님을 직접 3년간 따라다니고, 기적과 말씀을 접하며, 심지어 돈궤를 맡겨질 정도로 신뢰받던 인물조차 무너질 수 있다는 사실은, 교회 구성원 누구든지 시험에 드는 위험이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 준다. 장재형 목사는 이 대목에 대해 “현대 교회 리더십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한 사람이 아무리 뛰어나 보여도, 끊임없이 말씀과 성령으로 자신을 살피고 깨어 기도해야 한다. 그리하지 않으면, 사단은 언제든지 우리를 미끼로 삼을 수 있다”라고 경고한다. 교회사는 배신과 타락의 역사가 결코 적지 않았다. 그러나 동시에, 그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인물(맛디아 같은)을 세워 교회의 빈 자리를 메우고, 역사를 이어 가셨음을 우리는 본다.

그렇다면 오늘날 교회가 맛디아의 선택 사건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점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첫째, 교회가 공동체적 합의와 기도 가운데 가장 중요한 지도자 자리를 채워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단순히 능력·명성·정치력을 보고 지도자를 세워서는 안 되며, “부활신앙을 확실히 붙들고 있는가?” “주님과 함께해 온 시간이 있는가?” “주님의 고난·죽음·부활을 옆에서 목격하고, 자기 삶으로 간증할 수 있는가?”라는 핵심 신앙 고백이 훨씬 중요하다. 둘째, 지도자의 배신 또는 교회 안의 큰 상처가 생길 때마다, 그것을 단지 ‘개인의 비극’으로 덮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가 아파하며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를 기도와 말씀 속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유다가 무너진 뒤, 초대교회가 그를 강렬히 비난하는 데 시간을 보내지 않고, 주님의 말씀과 예언을 찾아 연구하며, 거기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새로운 길’을 열어간 자세는 배울 점이 많다. 셋째, 이 모든 회복 과정은 궁극적으로 ‘성령 강림’에 집중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교회가 왜 굳이 이 사건을 성령 임재 이전에 다뤘겠는가? 바로 오순절 성령을 받을 수 있는 온전한 상태로 자신들을 준비해야 했기 때문이다. 불의와 혼란이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성령의 큰 역사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장재형 목사는 “교회가 성령의 역사, 부흥, 성장 등을 말하기 전에, 먼저 내부의 죄와 불의를 다루는 과정을 진지하게 거쳐야 하며, 지도자들의 무너짐이 있다면 그것을 은폐하지 말고 진정으로 치유하는 길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유다에게서 벗어나 맛디아를 세운 것이 “하나의 상징”이라면, 곧 ‘교회는 그 어떤 큰 상처를 당해도,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반드시 회복의 길을 찾는다’는 메시지를 준다. 물론, 유다는 원천적으로 ‘버려진 자’가 아니라, 스스로 길을 선택해 그 길로 나아갔다가 영원한 비극을 맞이한 것이다. 교회가 누구를 불문하고 회복과 구원의 길로 초청하지만, 개인이 끝까지 거부하면 비극은 일어난다. 교회는 그런 비극을 무조건 덮는 대신, 회개와 갱신의 동력을 찾아 새로운 길을 내야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부활신앙”이 핵심 저력으로 작용한다.

부활신앙은 “죽음을 끝장내고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것이다. 유다는 예수님을 죽게 만든 장본인이었고, 그 뒤에 찾아온 죄책감에 무너져 갔지만, 예수님은 부활하심으로 “생명의 길”을 열어놓으셨다. 가룟 유다의 배신이 교회에 남긴 충격과 공포는, 예수님의 부활로 인한 소망에 의해 극복될 수 있었다. 맛디아가 그 빈자리를 메꾸었을 때, 열두 제자는 다시 하나가 되어 성령을 기다렸고, 곧 교회에 불처럼 임한 성령으로 인해 예루살렘에 담대히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했다. 사도행전 1장에서 4장까지 읽어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수비대를 비롯한 종교 권력 앞에서도 두려움을 느끼지 않고 “예수 이름 외에 구원 받을 다른 이름이 없다”(행4:12)고 선포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때의 베드로는 “닭 울기 전에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던 베드로”가 더 이상 아니다. 그는 마가의 다락방에서 회복된 자, 성령 받은 자, 그리고 맛디아와 함께한 “온전한 사도단”의 대표가 되어 버젓이 복음을 외친다. 여기에는 “무너져버린 지도자 한 사람의 자리마저도 하나님께서 회복시키셨다”는 강력한 메시지가 담겨 있다.

장재형 목사는 “유다를 잃고 맛디아를 얻은 교회가 ‘피투성이가 된 상처’를 치유받은 것처럼, 교회도 끊임없이 옛 상처와 고통을 치유받으며 새 술 부대를 채워야 한다”고 말한다. 초대교회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현대 교회도 각종 분쟁·부패·배신 같은 사건을 겪을 때가 많으며, 그때마다 어떻게 ‘새로운 맛디아’를 세워서 공동체를 정돈하고 성령의 역사를 받을 것인지를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는 “성령을 통해 새로운 시대를 여는 공동체”이며, 동시에 “배신과 회개, 죽음과 부활, 좌절과 회복”이라는 수많은 교차점을 통과해가며 성장한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죽음을 재촉했고, 맛디아는 그 빈자리를 메우며 복음의 문을 확장했다. 베드로는 부인하고 도망갔으나, 다시 예수님께서 찾아오셔서 요한복음 21장에서 그의 사랑을 회복시키셨고, 사도행전에서 가장 먼저 설교를 펼치는 지도자로 세우셨다. 이렇게 사도들의 재정비가 끝나고, 초대교회는 마가의 다락방이라는 공간에서 성령이 임하는 장관을 경험한다. 그 성령이 임한 순간부터 교회는 더 이상 숨어 있지 않고 거리로 나가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했고, 이내 예루살렘이 발칵 뒤집혔다.

오늘날도 교회가 같은 경험을 할 수 있을까? 장재형 목사는 “당연히 가능하다. 다만, 그 조건은 오늘날 교회가 부활신앙의 실제적 파워를 믿고, 내부의 문제(배신·부패·불신)를 회개와 기도로 해결하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온전히 구하는 데 달렸다”고 주장한다. 마가의 다락방과 맛디아의 선택은, 교회가 어떻게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을 실제 삶에서 체험하고, 어떠한 방식으로 공동체 안의 갈등과 상처를 극복하여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부활신앙으로 대표되는 기독교의 핵심은 “이 땅의 죽음, 절망, 실패가 결코 마지막이 아니다”라는 믿음이다. 가룟 유다라는 절망적 사례가 있어도, 교회는 맛디아를 통해 복음 전파의 긴 역사를 이어 간다. 우리가 때로는 베드로처럼 주님을 부인하고 죄책감 속에 살지라도, 요한복음 21장처럼 주님이 친히 우리를 다시 찾아오시고 회복시킨다. 그 은혜가 우리를 예루살렘 마가의 다락방으로 이끌어, 무기력한 상태가 아니라 담대한 성령의 능력을 입어 세상 한복판으로 나가도록 만든다.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 초대교회는 결국 사도행전 28장 마지막 절에서 “금하는 사람이 없었다”라는 당당한 선포로 마무리한다. 복음 전파를 막을 수 없었다는 뜻이다. 바울은 로마의 옥중에서도 복음을 전했고, 베드로는 역사의 기록에 따르면 거꾸로 십자가에 달리는 순교로 사명을 마무리했으나, 그의 뒤를 잇는 수많은 제자들이 또다시 교회의 빈 자리를 채워나갔다. 이처럼 교회는 주기적으로 흔들리고 넘어질지라도, 부활신앙과 성령의 능력 안에서 새롭게 일어선다.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이 무너져도, 하나님께서는 사도직을 회복하고, 땅끝까지 이어지게 하는 방법을 갖고 계신다.

맛디아의 선택은 바로 이 ‘회복’과 ‘전진’의 두 가지 정신을 모두 아우른다. 교회가 내부의 상처를 치유하고, 부활신앙에 기초하여 더 큰 비전을 향해 나아가는 출발점이 되는 것이다. 이 메시지는 오늘날도 여전히 유효하고, 교회 지도자들마다 사역 현장에서 다양한 갈등과 문제를 마주할 때마다, “초대교회는 어떻게 이 난관을 돌파했나?”를 돌아보면, 결국 그 답은 “부활신앙의 견고한 고백과 성령의 임재를 기다리는 기도, 그리고 투명한 공동체적 절차”에 있음을 깨닫게 된다.

장재형 목사는 이를 정리하며 말한다. “부활은 능력이다. 그 능력은 우리 마음 안에 역사할 때, 사람을 살리고, 교회를 살리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운다. 아무리 큰 배신자가 있어도, 그 배신을 넘어 교회는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는 회복과 새 출발의 길을 찾게 된다. 유다의 실패가 교회 역사의 종말을 뜻하지 않았듯이, 오늘날 우리가 맞닥뜨리는 어떠한 큰 상처도 하나님 나라의 약속을 소멸시키지 못한다.”

바로 이 지점이 “예루살렘 마가의 다락방과 맛디아의 선택”이 하나로 연결되는 결정적 이유다. 마가의 다락방은 숨죽이고 숨어 있던 제자들이 성령 강림을 경험한 뒤 세상으로 나가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한 발화점이라면, 맛디아의 선택은 사도 중 한 사람의 배신과 죽음을 넘어서 교회가 다시 ‘온전한 공동체’로 거듭나는 장면이다. 두 이야기는 “교회 안의 배신·부인·두려움이, 주님의 부활과 성령의 임재로 말미암아 어떻게 회복과 능력의 역사로 바뀌는가”를 종합적으로 보여준다. 여기에는 슬픔과 회환이 섞여 있지만, 더욱 강력한 하나님의 은혜가 깃들어 있다. 그 결과, 초대교회는 예루살렘을 넘어 땅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는 길로 분연히 일어설 수 있었다.

오늘날 교회도 마찬가지다. 어떤 지역 교회나 공동체가 마치 마가의 다락방처럼 ‘현대적 의미의 다락방’을 회복해 부활신앙으로 충만해진다면, 그리고 가룟 유다가 남기고 간 상처를 맛디아의 선출처럼 투명하고 말씀에 충실한 방식으로 치유한다면, 성령의 새 역사를 기대할 수 있다. 오순절 사건이 2000년 전 어느 한 장소에서만 일어난 ‘역사적 일회성’이 아니라, 모든 시대와 지역의 교회가 체험할 수 있는 하나님의 운동인 것이다.

이러한 가르침은 장재형목사가 줄곧 강조해온 “부활신앙의 실천성”과 맞닿아 있다. 성경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지적(知的)으로만 받아들이고 말면, 그것은 단순한 교리에 그친다. 그러나 초대교회는 이 부활을 실제 삶의 원동력으로 삼아, 배신이나 고난, 죽음이나 절망도 더 이상 끝이 아님을 시연해 보였다. 베드로와 사도들이 예루살렘 한복판에서 자신들을 죽이려 했던 세력들에게도 담대히 복음을 전하는 모습은, 부활이 얼마나 실재적이고 폭발적인 힘을 발휘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므로 “교회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예루살렘 마가의 다락방에서 시작되어, 가룟 유다의 배신을 맛디아의 선출로 회복하고, 성령 강림을 통해 전 세계로 나아간 공동체”라고 답할 수 있다. 그 정체성은 역사의 시공간을 넘어 오늘도 유효하며, 교회가 부활신앙을 지키는 이상 결코 문이 닫히지 않는다. 때로 교회 내부에 치명적인 균열이 일어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인물을 세워 그 자리를 회복시키시고, 또다시 성령을 부어주신다. 이것이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로마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전 세계에 이르기까지” 이어지는 복음의 연속성이자, 현대 교회가 이어받아야 할 믿음의 유산이다.

장재형 목사의 결론적인 권면도 여기에 맞닿는다. “우리는 현재적 다락방을 회복해야 하며, 배신과 실패가 일어날 때마다 그것을 덮는 대신 진실하게 회개하고 투명하게 해결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 출발의 기회를 붙잡아야 한다. 그 중심에는 ‘부활의 주님’이 계시고, 그분이 교회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선교적 사명이 놓여 있다.” 교회가 이 길에 순종할 때, 사도행전의 역사는 중단되지 않고 계속 펼쳐질 것이다.

faithfulnews.kr

Santidad que florece en las grietas de una muralla derrumbada– Pastor David (Olivet University)

La antigua ciudad portuaria de Corinto era un enorme crisol donde las olas bravas del Mediterráneo y el deseo chocaban sin descanso. En aquella urbe, entre templos deslumbrantes, fluían la riqueza y el placer; y la iglesia levantada allí era, quizá, como un arca frágil a la deriva sobre el mar. En las líneas de la Primera Carta a los Corintios que el apóstol Pablo escribió con pluma en mano —especialmente en los capítulos 5 y 6— se escucha un aliento áspero que ninguna lógica serena alcanza a contener del todo. No se trata de una simple reprensión, sino del grito urgente de un padre que ve a su hijo amado tragar veneno.

Hoy, tomando como guía la aguda perspicacia teológica del pastor David Jang, queremos observar cómo ese grito que resonó en las calles de Corinto hace dos mil años atraviesa también nuestra época. No entramos porque falte gracia, sino porque allí —en el escenario de una contradicción donde gracia y pecado coexistían de forma extraña— se revela una tensión que sigue siendo la nuestra.

El bosque de los dones brillantes y, dentro, el retrato oculto de “Dorian Gray”

En la novela El retrato de Dorian Gray, de Oscar Wilde, aparece Dorian, un protagonista que conserva para siempre la juventud y la belleza. Por fuera parece perfecto y cautivador; pero su codicia y su corrupción quedan registradas tal cual en el retrato escondido en el desván, que se va pudriendo hasta volverse monstruoso. Así se asemeja, según diagnostica el pastor David Jang, la iglesia de Corinto. Exteriormente exhibía la forma de una “iglesia exitosa”: rebosante de lenguas y profecía, llena de conocimiento y fervor. Sin embargo, detrás del telón de aquellos dones deslumbrantes, anidaba una inmoralidad incestuosa que incluso los de fuera considerarían vergonzosa de mencionar.

Más impactante aún era su actitud. Lo que enfureció a Pablo no fue solo el pecado en sí, sino el orgullo de una iglesia que, aun abrazando ese pecado, no se quebrantaba ni se entristecía. En este punto, el pastor David Jang lanza un mensaje de predicación dolorosamente incisivo: ellos presumían de su libertad espiritual y, en nombre de la tolerancia, encubrían el pecado. Una iglesia que ha perdido la santidad y solo se gloría en los dones no es distinta de Dorian Gray, que sonríe con un rostro hermoso mientras esconde un retrato que se descompone. Aunque el aire impuro de la ciudad atravesó el umbral de la iglesia e invadió hasta el santuario, su sensibilidad espiritual estaba anestesiada y no percibían el hedor. Es, también, una advertencia helada para la iglesia contemporánea que, aun en medio de la abundancia, va perdiendo la fiereza de la santidad.

La mesa de lágrimas que rechaza el pan con levadura

La Biblia compara el pecado con la levadura. Así como una cantidad mínima fermenta toda la masa y le cambia la naturaleza, el pecado tolerado corrompe la esencia de la comunidad. El pastor David Jang, recordando la Pascua y la Fiesta de los Panes sin Levadura del Antiguo Testamento, nos hace volver a la identidad del cristiano: somos “pan sin levadura”. La orden de Pablo de desechar la levadura vieja no exige una pulcritud moral obsesiva. Se parece más a una cirugía de urgencia para salvar la vida.

La disciplina (purificación) de la iglesia no es como un veredicto de un tribunal civil. Tal como interpreta el pastor David Jang, detrás de la declaración estremecedora de “entregarlo a Satanás” corre un amor paradójico: aunque se destruya la carne, que el espíritu sea salvado en el día del Señor Jesús. Esto no es castigo, sino rescate. En el incidente de Baal Peor y en aquel desierto donde, mordidos por serpientes ardientes y muriendo, era necesario mirar la serpiente de bronce, descubrimos el principio del evangelio: el único antídoto capaz de arrancar el aguijón envenenado del falso amor es enfrentarnos al amor verdadero: la cruz.

Por la misma razón Pablo reprendió con tanta severidad el hecho de llevar los conflictos internos de la iglesia a los tribunales del mundo. Olvidar la dignidad de quienes han de juzgar y gobernar al mundo, para someterse a su juicio, es arrojar la gloria de la iglesia al suelo. El pastor David Jang define esto como una “pérdida de identidad”. ¿Qué sentido tendría ganar un pleito ante el mundo al precio de renunciar a la santidad?

La libertad pagada con sangre y su peso

No sois vuestros, porque habéis sido comprados por precio.” Esta declaración es el clímax de 1 Corintios 6 y el corazón de la ética cristiana. En la Corinto de entonces estaba de moda un eslogan hedonista: “El vientre para la comida, y la comida para el vientre.” El cuerpo se veía como un simple instrumento para satisfacer instintos. Pero el pastor David Jang, apoyándose en la argumentación de Pablo, hace añicos ese dualismo: nuestro cuerpo es miembro de Cristo y templo en el que habita el Espíritu Santo.

La sociedad moderna clama: “Mi cuerpo es mío”, y pretende que todo placer es un derecho. En esta era de “Corinto digital”, donde con un toque del smartphone se accede a la obscenidad y, escondidos tras el anonimato, se expulsan deseos sin freno, es fácil perder el camino. Justo entonces, la meditación bíblica del pastor David Jang nos lanza una pregunta pesada: ¿con quién se están uniendo hoy tus manos y tus pies, tus ojos y tus oídos? Así como quien se une a una prostituta se hace un solo cuerpo, quien se une al Señor es un solo espíritu con Él.

La libertad no es libertinaje. Como dice la Escritura: “Todo me es lícito, pero no todo conviene.” La libertad verdadera nace de la capacidad de ponerse límites. Puesto que nuestro cuerpo fue comprado a un precio inmenso —la sangre derramada en la cruz— ya no podemos vivir como esclavos del deseo.

El mensaje de 1 Corintios que transmite el pastor David Jang desemboca, finalmente, en la restauración: volver a levantar la muralla derruida; quitar la levadura y partir el pan de la sinceridad y la verdad. Una comunidad que se distingue del mundo sin odiarlo; una iglesia que odia el pecado pero no abandona al pecador hasta el final, practicando el amor de la cruz. Ese es el camino que debemos recorrer nosotros, templo del Espíritu Santo. Hoy, ¿qué fragancia se eleva del templo que es tu vida?

www.davidjang.org

崩れた城壁の裂け目から芽吹く聖さ- ダビデ 張牧師 (Olivet University)

古古代の港湾都市コリント——そこは、地中海の荒波と欲望が休むことなく押し寄せる巨大な溶鉱炉でした。華やかな神殿の狭間を、富と快楽が流れ続けたその都市に建てられた教会は、ある意味、海の上に浮かぶ危うい方舟のようでもありました。使徒パウロがペンを取り綴った『コリント人への第一の手紙』の言葉、とりわけ5章と6章からは、静かな論理だけでは収まりきらない荒い息遣いが聞こえてきます。それは単なる訓戒ではなく、愛する子が毒を飲み込むのを目の当たりにした父の、切迫した叫びなのです。

今日私たちは、ダビデ 張牧師の鋭い神学的洞察を道しるべとして、二千年前のコリントの街角から響いたこの叫びが、いかに現代の私たちを貫くのかを見つめ直したいと思います。恵みがなかったからではなく、恵みと罪が奇妙に同居していた——その矛盾の現場へと、あえて足を踏み入れるのです。


華麗な賜物の森にされた「ドリアングレイ」の肖像

オスカー・ワイルドの小説『ドリアン・グレイの肖像』には、永遠の若さと美しさを保つ主人公ドリアンが登場します。彼は見た目には完璧で魅惑的ですが、その貪欲と堕落は屋根裏に隠された肖像画へと克明に刻まれ、醜く腐り落ちていきます。ダビデ 張牧師が診断するコリント教会の姿は、まさにこれと酷似しています。外から見れば、異言と預言があふれ、知識と情熱に満ちたいわゆる「成功した教会」の外形を備えていました。ところが、その華やかな賜物の幕の裏では、世の人々ですら口にするのを恥じるような近親相姦の淫行が、あからさまに巣くっていたのです。

さらに衝撃的なのは、彼らの態度でした。パウロを怒らせたのは罪そのもの以上に、その罪を抱えながらも嘆き悲しまない教会の「高慢」でした。ダビデ 張牧師はこの点において、骨身に刺さるメッセージを投げかけます。彼らは自らの霊的自由を誇示し、寛容という名のもとに罪を黙認したのです。聖さを失い、賜物だけを誇る教会は、腐りゆく肖像画を隠したまま美しい顔で微笑むドリアン・グレイと何ら変わりません。都市の淫らな空気が教会の敷居を越え、聖所にまで侵入していたにもかかわらず、彼らの霊的感覚は麻痺し、悪臭すら嗅ぎ取れなかった。これは、豊かさの中にありながら聖さの野性を失っていく現代教会への、冷ややかな警告でもあります。


パン種の混じったパンを退けるの食卓

聖書は罪を「パン種(酵母)」にたとえます。ごくわずかな量でも生地全体を膨らませ性質を変えてしまうように、黙認された罪は共同体の本質を変質させます。ダビデ 張牧師は旧約の過越と除酵祭を引き、キリスト者のアイデンティティが「パン種のないパン」であることを想起させます。古いパン種を取り除けというパウロの命令は、単なる道徳的潔癖の要求ではありません。それは命を守るための緊急手術にも似ています。

教会の懲戒(清め)は、世の法廷の判決とは異なります。ダビデ 張牧師の解釈が示すように、「サタンに引き渡す」という恐ろしい宣言の背後には、肉は滅びるとしても魂は主イエスの日に救われるように、という逆説的な愛が流れています。これは処罰ではなく救出です。バアル・ペオルの事件、そして荒野で毒蛇にかまれ死にかけた者が青銅の蛇を仰ぎ見なければならなかった、あの切迫の場面において、私たちは福音の原理を見いだします。偽りの愛の毒針を抜く唯一の解毒剤は、十字架という真の愛に向き合うことだけなのです。

パウロが、教会内の争いを世の法廷へ持ち込むことをあれほど叱責した理由もここにあります。世界を裁き治めるべき尊い身分を忘れ、世の判断の下に自らを従属させる行為は、教会の栄光を地に落とすことです。ダビデ 張牧師はこれを「アイデンティティの喪失」と規定します。聖さを手放してまで得た世的な勝訴に、いったいどんな意味があるのでしょうか。


血の代で支われた自由――その重みについて

「あなたがたの体は、あなたがた自身のものではない。あなたがたは代価をもって買い取られたのだ。」この宣言は、コリント人への第一の手紙6章の頂点であり、キリスト教倫理の心臓部です。当時のコリントには「腹は食物のため、食物は腹のため」といった快楽主義的スローガンが流行していました。体をただ本能解消の道具として見る発想です。ところがダビデ 張牧師は、パウロの論証に従ってこの二元論を打ち砕きます。私たちの体はキリストの肢体であり、聖霊の宿る神殿なのです。

現代社会は「私の体は私のものだ」と叫び、あらゆる快楽を権利だと主張します。スマートフォンのワンタップで淫らなものへ接続し、匿名性の陰に隠れて欲望を吐き出す——このデジタル・コリントの時代に、私たちは道を見失いやすい。まさにそのとき、ダビデ 張牧師の聖書黙想は私たちに重い問いを突きつけます。あなたの手と足、あなたの目と耳は、今日だれと結び合わされているのか。娼婦と結びつく者が一つの体となるように、主と結び合わされる者は一つの霊となります。

自由は放縦ではありません。「すべてのことが許されている。しかし、すべてが益になるわけではない」という言葉のとおり、真の自由は自らを制限できる力から生まれます。十字架で流された御血の代価——その途方もない代価を払って買い取られた私たちの体である以上、もはや欲望の奴隷として生きることはできません。

ダビデ 張牧師が伝えるコリント人への第一の手紙のメッセージは、結局「回復」へと収束します。崩れた城壁を再び築き、パン種を取り除いて、純粋と真実のパンを裂く共同体。世から分かたれつつも世を憎まず、罪は憎むが罪人を最後まで見捨てない十字架の愛を実践する教会。——それこそが、聖霊の神殿である私たちが歩むべき道です。今日、あなたの人生という神殿には、どんな香りが立ち上っているでしょうか。

日本オリベットアッセンブリー教団 

www.davidjang.org

Une sainteté qui fleurit dans les fissures d’un rempart effondré – Pasteur David Jang (Olivet University) 

Corinthe, antique cité portuaire, était un immense creuset où les vagues rugueuses de la Méditerranée et les désirs humains se déversaient sans répit. Au milieu de temples fastueux, la richesse et le plaisir circulaient à ciel ouvert. L’Église implantée dans cette ville ressemblait peut-être à une arche fragile, dérivant sur une mer dangereuse.

Lorsque l’apôtre Paul prend la plume dans la Première lettre aux Corinthiens—surtout aux chapitres 5 et 6—on entend un souffle rude que la seule logique ne suffit pas à contenir. Ce n’est pas une simple remontrance : c’est le cri pressant d’un père qui voit son enfant bien-aimé avaler du poison.

Aujourd’hui, en prenant pour guide la lucidité théologique du pasteur David Jang, nous voulons considérer comment ce cri, venu des rues de Corinthe il y a deux mille ans, traverse encore notre époque. Nous entrons dans ce lieu de contradiction : non pas là où la grâce manquerait, mais là où la grâce et le péché cohabitaient d’une manière étrange.


La forêt des dons éclatants et, caché en son cœur, le « portrait de Dorian Gray »

Dans Le Portrait de Dorian Gray d’Oscar Wilde, Dorian conserve une jeunesse et une beauté éternelles. Dehors, il paraît parfait et fascinant ; mais sa cupidité et sa corruption se gravent dans un portrait dissimulé au grenier, qui se décompose en une laideur effrayante.

Le pasteur David Jang voit quelque chose de semblable dans l’Église de Corinthe. En apparence, elle semblait « réussie » : abondance de langues, de prophéties, de zèle, de connaissance. Pourtant, derrière le rideau de dons spectaculaires, un péché que même les païens auraient eu honte de nommer s’était enraciné : une immoralité incestueuse.

Plus choquante encore fut leur attitude. Ce qui mit Paul en colère, ce ne fut pas seulement le péché, mais l’orgueil d’une Église qui pouvait le tolérer sans en être brisée. C’est ici que, selon David Jang, retentit un message douloureux : ils exhibaient leur « liberté spirituelle » et, sous le nom de tolérance, ils excusaient le mal. Une Église qui a perdu la sainteté tout en se glorifiant des dons ressemble à Dorian Gray : sourire radieux, portrait pourri derrière la porte.

L’air d’impureté de la ville avait franchi le seuil, envahissant jusqu’au sanctuaire—et pourtant, leurs sens spirituels s’étaient émoussés : ils ne sentaient plus l’odeur. C’est un avertissement glacial pour l’Église moderne, parfois prospère, mais en danger de perdre l’instinct sauvage de la sainteté.


Une table en larmes qui refuse le pain mêlé de levain

La Bible compare le péché au levain. Une quantité infime suffit à faire lever toute la pâte et à en changer la nature. De même, un péché toléré altère progressivement l’essence de la communauté.

Le pasteur David Jang rappelle, à partir de la Pâque et de la fête des pains sans levain, que l’identité du croyant est celle d’un pain sans levain. L’ordre de Paul—ôter le vieux levain—n’exige pas un perfectionnisme moral. Il s’agit d’une chirurgie d’urgence pour sauver la vie.

La discipline de l’Église (la purification) n’est pas un simple verdict à la manière des tribunaux du monde. Selon la lecture de David Jang, derrière l’expression terrifiante « livrer un tel homme à Satan » se trouve un amour paradoxal : même si la chair est brisée, que l’esprit soit sauvé au jour du Seigneur Jésus. Ce n’est pas d’abord un châtiment, mais un sauvetage.

Dans l’Ancien Testament—à Baal-Peor, et dans le désert où les mourants devaient regarder le serpent d’airain après avoir été mordus par les serpents ardents—nous retrouvons une logique de l’Évangile : l’unique antidote à la piqûre empoisonnée d’un faux amour est de faire face au véritable amour, celui de la croix.

C’est aussi la raison pour laquelle Paul reprend si sévèrement ceux qui portent les conflits internes de l’Église devant les tribunaux du monde. Oublier cette dignité—celle d’un peuple appelé à juger et à gouverner—et se soumettre au jugement du monde, c’est jeter la gloire de l’Église à terre. David Jang appelle cela une perte d’identité. À quoi sert une victoire juridique obtenue au prix de la sainteté ?


Une liberté payée au prix du sang : le poids de ce prix

« Vous ne vous appartenez point à vous-mêmes, car vous avez été rachetés à un grand prix. » Cette déclaration est le sommet de 1 Corinthiens 6 et le cœur de l’éthique chrétienne.

À Corinthe circulait un slogan hédoniste : « Les aliments sont pour le ventre et le ventre pour les aliments. » Le corps n’était vu que comme un outil pour satisfaire l’instinct. Mais, suivant l’argumentation de Paul, David Jang renverse ce dualisme : notre corps est un membre du Christ et un temple du Saint-Esprit.

La société moderne crie : « Mon corps m’appartient », et revendique tous les plaisirs comme des droits. Un simple geste sur un smartphone ouvre la porte à l’impureté ; derrière l’anonymat, le désir se déverse sans frein. Dans cette Corinthe numérique, nous nous égarons facilement.

C’est ici que la méditation biblique du pasteur David Jang nous pose une question lourde : à qui s’unissent aujourd’hui tes mains et tes pieds, tes yeux et tes oreilles ? De même que celui qui s’unit à une prostituée devient un seul corps avec elle, celui qui s’unit au Seigneur devient un seul esprit avec lui.

La liberté n’est pas la débauche. Comme le dit l’Écriture : « Tout est permis, mais tout n’est pas utile. » La vraie liberté se reconnaît à la capacité de se limiter soi-même. Parce que notre corps a été acheté au prix immense du sang versé sur la croix, nous ne pouvons plus vivre comme esclaves du désir.

Le message que David Jang met en lumière dans 1 Corinthiens converge finalement vers la restauration : rebâtir les murailles abattues, ôter le levain, rompre le pain de la sincérité et de la vérité. Une Église séparée du monde sans haïr le monde ; qui hait le péché sans renoncer au pécheur ; qui pratique l’amour de la croix—cet amour qui tient ensemble sainteté et miséricorde.

Aujourd’hui, quel parfum s’élève du sanctuaire qu’est ta vie ?

www.davidjang.org

Holiness Blooming Through the Cracks of a Broken Wall – Pastor David Jang (Olivet University)

Corinth, an ancient port city, was a massive crucible where the rough Mediterranean surf and human desire surged without pause. Amid glittering temples, wealth and pleasure coursed through the streets. The church planted in that city may have been like a fragile ark adrift on stormy seas.

When the apostle Paul takes up his pen in 1 Corinthians—especially chapters 5 and 6—you can hear a breath too urgent to be contained by calm logic. This is not mere moral instruction. It is the desperate cry of a father watching a beloved child swallow poison.

Today, guided by the incisive theological insight of Pastor David Jang, we will step into that paradoxical scene from two thousand years ago—where grace was not absent, yet grace and sin strangely coexisted—and ask how Paul’s cry still pierces the modern church.


A Forest of Spectacular Gifts—and “The Picture of Dorian Gray” Hidden Inside

In Oscar Wilde’s novel The Picture of Dorian Gray, the protagonist preserves eternal youth and beauty. Outwardly, he appears flawless and captivating, but his greed and corruption are faithfully recorded in a portrait locked away in an attic—rotting into something grotesque.

Pastor David Jang diagnoses the Corinthian church in much the same way. On the surface, it looked like a “successful church”: overflowing with tongues and prophecy, rich in knowledge and passion. Yet behind the curtain of dazzling gifts, there was a coil of sexual immorality—an incestuous relationship so shameful that even the surrounding society would have found it scandalous.

Even more shocking was the church’s posture. What enraged Paul was not only the sin itself, but the pride of a community that could harbor such sin without mourning. Here Pastor David Jang delivers a message that cuts to the bone: the Corinthians flaunted their “spiritual freedom,” excusing and tolerating sin in the name of broad-mindedness. A church that boasts in gifts while losing holiness is no different from Dorian Gray smiling with a beautiful face while hiding a decaying portrait.

Though the city’s immoral air had crossed the church’s threshold and invaded the sanctuary itself, the congregation’s spiritual senses had grown numb—they could no longer smell the stench. It is, at the same time, a chilling warning to modern churches that enjoy abundance yet slowly lose the wild, uncompromising instinct for holiness.


A Tearful Table That Refuses Bread Mixed with Leaven

Scripture compares sin to leaven. Just a small amount works through an entire batch of dough, swelling it and altering its nature. In the same way, sin that is tolerated eventually corrupts the essence of the whole community.

Pastor David Jang draws from the Passover and the Feast of Unleavened Bread in the Old Testament to remind believers that our identity is meant to be “unleavened.” Paul’s command to purge the old leaven is not moral fastidiousness or obsessive purity culture. It is more like emergency surgery to save a life.

Church discipline (purification) is not the same as a verdict handed down by a secular court. As Pastor David Jang interprets it, even behind the frightening phrase “to deliver such a one to Satan” lies a paradoxical love: that though the flesh may be destroyed, the spirit might be saved in the day of the Lord Jesus. This is not punishment for its own sake—it is rescue.

In the desperation of Israel’s failures—at Baal Peor, and in the wilderness where the dying had to look upon the bronze serpent—we glimpse a gospel pattern. The only antidote that can pull out the poisoned barb of counterfeit love is to face the real love of the cross.

This is also why Paul so sharply rebukes believers for hauling internal disputes before secular courts. Forgetting the church’s honored identity—those who will judge the world—and placing themselves under the world’s judgment is to drag the church’s glory into the dust. Pastor David Jang calls this an “identity crisis.” What meaning is there in winning a legal case if it costs the church its holiness?


Freedom Paid for in Blood—and the Weight of That Price

“You are not your own, for you were bought with a price.” This declaration is the summit of 1 Corinthians 6 and the heart of Christian ethics.

In Corinth, a pleasure-driven slogan circulated: “Food is meant for the stomach and the stomach for food.” The body was treated as nothing more than a tool for satisfying appetite. But Pastor David Jang—following Paul’s argument—shatters this hollow dualism. Our bodies are members of Christ and temples of the Holy Spirit.

Modern society shouts, “My body is mine,” insisting every pleasure is a right. With a single tap on a smartphone we can access pornography; behind anonymity we can discharge desire without restraint. In this digital Corinth, it is easy to lose our way.

Right here, Pastor David Jang’s meditation presses a heavy question into our hands: To whom are your hands and feet united today? To what are your eyes and ears joined? Just as the one who unites with a prostitute becomes “one body,” the one who unites with the Lord becomes “one spirit.”

Freedom is not the same as indulgence. As Scripture says, “All things are lawful, but not all things are helpful.” True freedom is the ability to limit oneself—to refuse slavery to impulse. Because our bodies were purchased at the staggering cost of Christ’s blood, we can no longer live as servants of desire.

Ultimately, the message Pastor David Jang draws from 1 Corinthians is a message of restoration: rebuilding broken walls, purging leaven, and breaking the bread of sincerity and truth. A community that is distinct from the world without hating the world; that hates sin while refusing to abandon sinners; that practices the cruciform love that holds together holiness and mercy.

Today, what fragrance rises from the sanctuary of your life?

www.davidjang.org

从倒塌城墙的缝隙中绽出的圣洁 – 张大卫牧師 (Olivet University)

古老的海港城哥林多——那里仿佛是一座巨大的熔炉,地中海粗犷的海浪与人的欲望昼夜不息地涌入。富足与享乐在华丽神庙之间流淌,而在这座城市里建立起来的教会,或许就像漂浮在海面上的一艘摇摇欲坠的方舟。使徒保罗提笔写下《哥林多前书》的字句,尤其在第5章与第6章里,我们仿佛听见一种无法用平静逻辑完全装载的粗重喘息——那不是简单的训诫,而是父亲目睹爱子吞下毒药时发出的急切呼喊。
今天,我们愿以张大卫牧师锐利的神学洞见为向导,看看两千年前从哥林多街头传来的这声呼喊,如何刺透当代的我们。我们进入的不是“缺少恩典”的现场,而是一个恩典与罪以诡异方式并存的矛盾之地。

华丽恩赐的森林里,藏着“道林·格雷”的画像
在奥斯卡·王尔德的小说《道林·格雷的画像》中,主人公道林保持着永恒的年轻与美貌;他表面完美迷人,但他的贪婪与堕落却被藏在阁楼里的画像一笔不漏地记录下来,最终丑陋腐烂。张大卫牧师所诊断的哥林多教会之景,正与此极为相似:外表上,他们充满方言与预言,拥有知识与热情,具备所谓“成功教会”的种种样貌;然而在这华丽恩赐的帷幕背后,却盘踞着连世人都羞于启齿的乱伦淫行。
更令人震惊的是他们的态度:真正惹动保罗怒火的,与其说是罪本身,不如说是教会“怀抱罪却不哀恸”的骄傲。张大卫牧师在此抛出刺骨的信息——他们炫耀自己的属灵自由,以“宽容”之名默认罪恶。失去圣洁却只夸恩赐的教会,无异于藏起腐烂画像、仍以美貌微笑的道林·格雷。即便城市淫乱的空气越过教会门槛、侵入圣所,他们属灵的感官却已麻木,闻不见那股恶臭。这也成为对当代教会的冷峻警告:我们或许身处丰盛,却正在失去圣洁的野性与锋芒。

拒绝掺了酵的饼:泪水中的筵席
圣经把罪比作“酵”。正如极少的酵也能使全团面发起来、改变其性质,被纵容的罪会败坏群体的本质。张大卫牧师借着旧约的逾越节与除酵节提醒我们:基督徒的身份应当是“无酵饼”。保罗吩咐“把旧酵除净”,并非在要求道德洁癖;那更像是一场为了保全生命而必须进行的紧急手术。
教会的惩戒(洁净)不同于世俗法庭的裁决。正如张大卫牧师所解读的,“交给撒但”的可怕宣告背后,流动着一种反向的爱:宁叫肉体受败坏,也要使人的灵在主耶稣的日子得救。这不是惩罚,而是拯救。无论是巴力·毗珥事件中的惨痛,还是旷野里被火蛇咬伤、濒死之人必须仰望铜蛇的绝境,我们都能看见福音的原理:拔除“伪爱”的毒刺,唯一的解药就是直面十字架那“真爱”。
保罗之所以如此严厉地责备把教会纷争带到世俗法庭,也在于此:若忘记自己本应审判世界、治理世界的尊贵身份,反倒把自己置于世俗判断之下,便是把教会的荣耀摔在尘土里。张大卫牧师将其称为“身份的失落”。如果为了赢得世界的胜诉而放弃圣洁,那胜诉究竟还有什么意义呢?

用血价买来的自由:那份沉甸甸的重量
“你们的身体不是自己的,因为你们是用重价买来的。”这宣告是《哥林多前书》第6章的高峰,也是基督教伦理的心脏。那时的哥林多流行一句享乐主义口号:“肚腹是为食物,食物是为肚腹。”他们把身体仅当作满足本能的工具。但张大卫牧师借保罗的论证粉碎这种二元论:我们的身体是基督的肢体,是圣灵居住的殿。
现代社会高喊“我的身体属于我”,把一切享乐都当作权利。在这个只需轻触手机便可接入淫乱、躲在匿名背后倾倒欲望的时代——这座“数字版的哥林多”里,我们很容易迷失。正是在此刻,张大卫牧师的圣经默想向我们抛出沉重的问题:你的手与脚、你的眼与耳,今天正与谁联合?与娼妓联合的人成为一体;与主联合的人成为一灵。
自由不是放纵。正如“凡事都可行,但不都有益处”所揭示的,真正的自由来自一种能自我节制的能力。既然我们的身体是主以十字架的宝血付上巨大代价所买赎的,我们就不再能作欲望的奴仆。
张大卫牧师所传讲的《哥林多前书》信息,最终指向“恢复”:重建倒塌的城墙,除去旧酵,在纯一与真实中擘开无酵饼的群体;与世界分别却不憎恶世界,恨恶罪却不轻言放弃罪人,实践十字架之爱的教会——这正是作为圣灵之殿的我们当走的道路。今天,在你名为生命的圣殿里,正散发怎样的香气?

www.davidjang.org

무너진 성벽 틈으로 피어난 거룩 – 장재형 목사 (Olivet University)

고대의 항구 도시 고린도, 그곳은 지중해의 거친 파도와 욕망이 쉼 없이 밀려드는 거대한 용광로였습니다. 화려한 신전들 사이로 부와 쾌락이 흐르던 그 도시에 세워진 교회는, 어쩌면 바다 위에 떠 있는 위태로운 방주와도 같았습니다. 사도 바울이 펜을 들어 써 내려간 고린도전서의 문장들, 특히 5장과 6장에는 차분한 논리로는 다 담아낼 수 없는 거친 숨소리가 들립니다. 그것은 단순한 훈계가 아닌, 사랑하는 자녀가 독을 삼키는 것을 목격한 아비의 다급한 외침입니다.

오늘 우리는 장재형 목사(Olivet University)의 예리한 신학적 통찰을 길잡이 삼아, 2천 년 전 고린도의 거리에서 들려온 이 외침이 어떻게 현대의 우리를 관통하는지 살펴보고자 합니다. 은혜가 없어서가 아니라, 은혜와 죄가 기이하게 공존했던 그 모순의 현장으로 들어갑니다.

화려한 은사의 숲, 그 안에 감춰진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

오스카 와일드의 소설 《도리안 그레이의 초상》에는 영원한 젊음과 아름다움을 유지하는 주인공 도리안이 등장합니다. 그는 겉보기에 완벽하고 매혹적이지만, 그의 탐욕과 타락은 다락방에 숨겨진 초상화에 고스란히 기록되어 흉측하게 썩어들어 갑니다. 장재형 목사가 진단하는 고린도 교회의 모습이 바로 이와 흡사합니다. 겉으로는 방언과 예언이 넘치고 지식과 열정이 가득한, 소위 ‘성공한 교회’의 외형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화려한 은사의 장막 뒤편에는, 세상 사람들조차 입에 담기 부끄러워할 근친상간의 음행이 똬리를 틀고 있었습니다.

더욱 충격적인 것은 그들의 태도였습니다. 바울을 분노케 한 것은 죄 그 자체보다, 그 죄를 품고도 애통해하지 않는 교회의 ‘교만’이었습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 지점에서 뼈아픈 설교의 메시지를 던집니다. 그들은 자신들의 영적 자유를 과시하며 관용이라는 이름으로 죄를 묵인했습니다. 거룩을 잃은 채 은사만을 자랑하는 교회는, 썩어가는 초상화를 숨긴 채 아름다운 얼굴로 미소 짓는 도리안 그레이와 다를 바 없습니다. 도시의 음란한 공기가 교회 문턱을 넘어 성소까지 침범했음에도, 그들은 영적 감각이 마비되어 악취를 맡지 못했습니다. 이는 오늘날 풍요 속에 있으면서도 거룩의 야성을 잃어가는 현대 교회를 향한 서늘한 경고이기도 합니다.

누룩 섞인 빵을 거부하는 눈물의 식탁

성경은 죄를 ‘누룩’에 비유합니다. 아주 작은 양이라도 반죽 전체를 부풀리고 성질을 바꿔버리는 누룩처럼, 묵인된 죄는 공동체의 본질을 변질시킵니다. 장재형 목사는 구약의 유월절과 무교절 절기를 들어, 그리스도인의 정체성이 ‘누룩 없는 떡’임을 상기시킵니다. 묵은 누룩을 내버리라는 바울의 명령은, 단순히 도덕적인 결벽증을 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생명을 지키기 위한 응급 수술과도 같습니다.

교회의 치리(정화)는 세상 법정의 판결과는 다릅니다. 장재형 목사의 해석처럼, “사단에게 내어준다”는 무시무시한 선언 이면에는, 육신은 멸하더라도 영혼만은 주 예수의 날에 구원받게 하려는 역설적인 사랑이 흐르고 있습니다. 이것은 처벌이 아니라 구출입니다. 바알브올의 사건에서, 그리고 불뱀에 물려 죽어가던 광야에서 놋뱀을 쳐다봐야 했던 그 절박함 속에서 우리는 복음의 원리를 발견합니다. 가짜 사랑의 독침을 뽑아내는 유일한 해독제는, 십자가라는 진짜 사랑을 마주하는 것뿐입니다.

바울이 교회 내의 분쟁을 세상 법정으로 가져가는 것을 그토록 책망한 이유도 여기에 있습니다. 세상을 판단하고 다스려야 할 존귀한 신분을 망각한 채, 세상의 판단 아래 스스로를 종속시키는 행위는 교회의 영광을 땅에 떨어뜨리는 것입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를 ‘정체성의 상실’로 규정합니다. 거룩을 포기하면서까지 얻어낸 세상의 승소가 과연 무슨 의미가 있겠습니까?

핏값으로 지불된 자유, 그 무거움에 대하여

“너희 몸은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이 선언은 고린도전서 6장의 절정이자, 기독교 윤리의 심장입니다. 당시 고린도에는 “배는 식물을 위하고 식물은 배를 위한다”는 쾌락주의적 슬로건이 유행했습니다. 몸을 단지 본능 해소의 도구로 본 것입니다. 그러나 장재형 목사는 바울의 논증을 빌려 이 이원론을 박살 냅니다. 우리의 몸은 그리스도의 지체요, 성령이 거하시는 성전입니다.

현대 사회는 “내 몸은 나의 것”이라고 외치며, 모든 쾌락을 권리라고 주장합니다. 스마트폰 터치 한 번으로 음란과 접속하고, 익명성 뒤에 숨어 욕망을 배설하는 이 시대의 디지털 고린도 속에서, 우리는 길을 잃기 쉽습니다. 바로 이때, 장재형 목사성경 묵상은 우리에게 묵직한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의 손과 발, 당신의 눈과 귀는 오늘 누구와 연합하고 있습니까? 창기와 합하는 자가 한 몸이 되듯, 주와 합하는 자는 한 영이 됩니다.

자유는 방종이 아닙니다. “모든 것이 가하나 다 유익한 것이 아니요”라는 말씀처럼, 진정한 자유는 스스로를 제한할 줄 아는 능력에서 나옵니다. 십자가에서 흘리신 보혈의 값, 그 엄청난 대가를 치르고 산 우리의 몸이기에, 우리는 더 이상 욕망의 노예로 살 수 없습니다.

장재형 목사가 전하는 고린도전서의 메시지는 결국 ‘회복’으로 귀결됩니다. 무너진 성벽을 다시 쌓고, 누룩을 제하여 순전함과 진실함의 떡을 떼는 공동체. 세상과 구별되지만 세상을 혐오하지 않고, 죄는 미워하되 죄인은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십자가의 사랑을 실천하는 교회. 그것이 바로 성령의 전인 우리가 걸어가야 할 길입니다. 오늘, 당신의 삶이라는 성전에는 어떤 향기가 피어오르고 있습니까?

http://www.davidjang.org

장재형목사, 복음의 환대와 하나 됨

1. 식탁의 경계를 허무는 파격적인 환대

예수께서 이 비유를 들려주신 배경에는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의 날 선 ‘원망’이 있었습니다. 그들에게 거룩함이란 죄인과의 격리를 의미했지만, 예수께서는 오히려 죄인들과 함께 빵을 나누며 하나님 나라의 논리를 펼치셨습니다.

  • 잃은 것을 향한 집념: 양, 드라크마, 그리고 아들로 이어지는 세 가지 비유는 잃어버린 존재를 기어코 찾아내고야 마는 하나님의 열정을 보여줍니다.
  • 기쁨의 공유: 복음은 잃은 것을 되찾았을 때의 환희이며, 그 기쁨에 동참하지 못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종교적 결핍임을 시사합니다.

2. ‘소유’의 욕망이 낳은 관계의 단절

장재형 목사는 둘째 아들이 유산을 요구한 행위를 경제적 관념이 아닌 **’존재론적 분리’**로 해석합니다. 아버지가 살아계심에도 몫을 챙기려 한 것은, 아버지를 인격적 대상이 아닌 자산의 공급자로 전락시킨 사건입니다.

  • 죄의 본질: 죄는 특정 악행의 목록 이전에, ‘내 것’을 챙기기 위해 관계를 끊어버리는 데서 시작됩니다.
  • 자유의 오해: 사랑의 품을 벗어나는 것을 자유라 착각할 때 인간은 결핍의 밑바닥으로 추락합니다. 탕자가 겪은 쥐엄열매의 굶주림은 하나님 없는 자아 중심적 삶이 결국 노예 상태로 귀결됨을 상징합니다.

3. 심문 없는 수용: ‘교정’보다 앞선 ‘회복’

탕자의 회개는 단순한 후회를 넘어 “아버지 없이는 살 수 없다”는 존재의 자각입니다. 돌아온 아들을 대하는 아버지의 태도에는 그 어떤 조건이나 유예 기간도 없었습니다.

  • 과잉의 은혜: 제일 좋은 옷과 가락지, 신발은 아들의 지위를 즉각적으로 복권시킨다는 선언입니다.
  • 먼저 달려가는 사랑: 하나님은 우리가 완벽히 정리정돈된 상태에서 기다리시는 분이 아니라, 멀리서부터 우리를 알아보고 먼저 달려와 안아주시는 분입니다.

4. 집 안의 탕자: 형이 앓고 있는 결핍

비유의 날카로움은 성실해 보였던 ‘첫째 아들’에게서 절정에 달합니다. 그는 몸은 집에 있었으나 마음은 아버지와 분리된 상태였습니다.

  • 계산된 관계: 형에게 아버지는 사랑의 대상이 아닌 ‘노동의 대가’를 지불하는 고용주였습니다. 그는 동생의 귀환을 시기하며 자신의 의로움을 내세워 잔치를 거부합니다.
  • 공동체의 위기: 장재형 목사는 현대 교회가 경계해야 할 지점이 바로 이 ‘형의 마음’이라고 지적합니다. 자원이 늘어날수록 “내 몫”을 따지는 순간, 교회는 기쁨을 잃은 고립된 종교인들의 집합소가 됩니다.

예술로 보는 복음: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자’

렘브란트의 명화는 이 서사를 빛과 어둠으로 극명하게 대비시킵니다.

  • 포옹의 중력: 아버지의 손은 상처 입은 아들을 조용히 감싸 안으며, 인간을 회복시키는 하나님의 사랑을 시각화합니다.
  • 어둠 속의 형: 잔치 밖에서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형의 모습은 우리 안에 숨겨진 ‘공로주의’를 투영합니다.

결론: 하나 됨을 향한 초대의 잔치

복음은 두 부류의 길 잃은 자를 모두 부릅니다. 노골적으로 방황하는 ‘밖의 탕자’와, 규범 뒤에 숨어 냉소하는 ‘안의 탕자’ 모두에게 아버지는 **”내 것이 다 네 것이다”**라고 말씀하십니다.

장재형 목사가 강조하는 공동체의 핵심은 **’청지기 의식’**입니다. 모든 것이 내 몫이 아닌 ‘아버지의 것’임을 인정할 때, 교회는 비로소 배제와 공격성을 버리고 환대와 회복의 잔치 자리가 될 수 있습니다.

aithfulnews.kr

davidjang.org

장재형목사,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로마서 1장 16–17절은 단순한 성경 구절을 넘어, 교회사의 굵직한 전환점마다 반복해서 인간을 무릎 꿇게 해 온 말씀이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 짧은 문장 안에는 사도 바울의 전 생애와 종교개혁의 심장 박동, 그리고 오늘을 살아가는 신앙인의 내적 갈등이 농축되어 있다. 장재형(Olivet University 설립)목사는 이 구절을 자신의 사역 중심에 두고, 로마 제국의 심장부에서 복음을 붙들고 서 있던 바울의 모습을 오늘의 도시 한복판으로 옮겨온다. 대리석 궁전과 콜로세움의 함성이 가득하던 시대, 사회적 약자이자 조롱의 대상이었던 초대 교회 성도들의 위축된 마음은, 오늘 거대한 세속 문화와 여론의 압력 속에서 신앙을 숨기듯 살아가는 현대 그리스도인의 심리와 놀랍도록 겹쳐진다.

장재형목사가 강조하는 바는 분명하다. 복음을 부끄러워하는 마음은 신학 교과서 속 개념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날마다 마주하는 실존적 문제라는 것이다. 고린도 교회와 마찬가지로 로마 교회의 다수는 사회적으로 변두리에 있었고, 학문적·문화적 권위를 갖지 못한 사람들이었다. 바울이 자신을 포함한 사도들을 “만물의 찌꺼기”라 부른 표현은 과장이 아니다. 제국의 시선에서 십자가에 처형된 이를 주로 고백하는 공동체는 초라하고 위험한 집단이었다. 이 맥락 속에서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라는 선언은, 거대한 체제 앞에서 몸을 낮춘 신앙인들을 깨우는 영적 경종처럼 울린다. 그것은 과거의 로마 교회만이 아니라, 오늘 세속적 성공의 기준 속에서 신앙을 사적인 영역으로 밀어 넣은 우리를 향한 외침이다.

이 대목에서 카라바조의 회화가 자연스럽게 떠오른다. 「성 마태의 소명」에서 빛은 어둠에 잠긴 세리의 방 안으로 갑작스럽게 침투한다. 마태는 준비된 영웅이 아니라, 세속적 질서에 안주하던 인물이다. 그러나 빛은 그의 의지와 계산을 기다리지 않고 먼저 얼굴을 비춘다. 장재형목사가 말하는 복음의 능력도 이와 같다. 신분, 문화, 학력, 권세의 장벽을 가볍게 넘어 가장 낮은 자리로 스며드는 힘.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라는 바울의 고백은, 요란하지 않지만 현실을 근본에서 바꾸는 결정적 에너지다.

“먼저는 유대인에게요 그리고 헬라인에게로다”라는 구절을 해석하며, 장재형목사는 우선성과 배타성을 혼동하지 않는다. 유대인이 먼저라는 말은 시간적 질서를 가리킬 뿐, 구원의 가치나 깊이가 차등화된다는 뜻이 아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선민의 울타리를 넘어 모든 민족에게 흐른다. 그는 이 문장을 복음의 운동성으로 읽는다. 복음은 특정 민족이나 계층에 고정되지 않고, 늘 주변부와 약자의 방향으로 이동한다. “세상의 미련한 것, 약한 것, 멸시받는 것”을 택하시는 하나님의 방식은 로마 제국에서도, 성취와 효율을 숭배하는 현대 사회에서도 변하지 않는다.

이 복음의 역설을 떠올리게 하는 작품이 그뤼네발트의 「이젠하임 제단화」다. 병든 육체처럼 일그러진 십자가의 예수는, 고통받는 이들의 현실과 정면으로 닮아 있다. 그 그림 앞에서 중세의 환자들은 자신의 절망과 닮은 그리스도의 몸을 바라보며 위로를 얻었다. 장재형목사가 말하는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은 바로 이런 능력이다. 체제의 중심이 아니라 가장 버려진 자리에서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는 힘이다.

로마서 1장 17절에서 바울은 복음의 핵심을 이렇게 요약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장재형목사는 이 ‘하나님의 의’를 인간의 도덕적 성취와 철저히 구분한다. 율법적 의는 조건과 평가의 언어로 작동한다. 그러나 율법은 죄를 드러낼 수는 있어도, 죄의 사슬을 끊을 능력은 없다. 은혜 없는 율법은 오히려 영혼을 짓누르는 그림자가 된다.

반면 복음 안에서 드러난 하나님의 의는 인간이 쌓아 올린 공로가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단번에 완성된 구원의 사건이다. 장재형목사는 한자 ‘의(義)’의 구조를 통해 이 진리를 설명한다. ‘나(我)’ 위에 ‘양(羊)’이 덮여 있는 형상은, 죄인을 덮는 희생의 어린양을 연상시킨다. 그리스도의 피가 나를 덮을 때, 하나님은 더 이상 나의 실패가 아니라 어린양의 의를 보신다. 이때 의는 추상 개념이 아니라, 하나님과 인간의 관계가 회복되었다는 선언이다.

렘브란트의 「돌아온 탕자」는 이 은혜를 시각적으로 증언한다. 초라한 아들의 어깨 위에 얹힌 아버지의 손에는 판단보다 연민이, 계산보다 사랑이 담겨 있다. 법정의 냉기가 아니라 품의 온기가 그 자리를 채운다. 장재형목사가 말하는 “율법 외에 나타난 하나님의 의”는 바로 이 장면과 닮아 있다. 죄인의 운명을 바꾸는 것은 저울이 아니라 품이다.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한다”는 표현에 대해 장재형목사는 믿음을 정적인 소유물이 아니라, 계속 확장되는 여정으로 설명한다. 시작도 믿음이고, 끝까지 가는 길도 믿음이다. 그러나 그 믿음의 출발점은 언제나 하나님의 신실하심이다. 십자가에서 먼저 손을 내미신 그리스도의 사랑이 없었다면, 인간은 결코 믿음을 만들어낼 수 없다. 에베소서 2장 8절이 말하듯, 은혜는 하나님의 편에서 이미 완성된 사실이고, 믿음은 그 사실을 받아들이는 응답이다.

프라 안젤리코의 「수태고지」에 그려진 마리아의 모습은 이 믿음을 잘 보여 준다. 믿음은 영웅적 도약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앞에서 자신을 비워 “말씀대로 이루어지기를” 받아들이는 태도다. 장재형목사가 말하는 믿음 역시 자기 과시가 아니라 전적인 신뢰다. 그렇게 시작된 믿음은 또 다른 믿음을 낳으며 복음은 세대를 넘어 전해진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은 하박국의 절망적 시대 속에서 처음 울려 퍼졌다. 정치적·군사적 안전망이 무너진 상황에서도 하나님은 믿음으로 사는 자의 생명을 약속하셨다. 장재형목사는 이 선언을 로마서 안에 다시 배치하며, 제국의 흥망과 무관하게 복음 안에 있는 자는 이미 생명의 궤도 위에 서 있다고 말한다.

미켈란젤로의 「아담의 창조」에서 하나님의 손은 힘차게 뻗어 있고, 아담의 손은 미약하게 응답한다. 결정적 움직임은 하나님에게서 시작되지만, 믿음은 그 손길을 향해 떨리는 손가락 하나를 내미는 행위다. 장재형목사가 말하는 믿음은 위대한 업적이 아니라, 포기하지 않는 응답이다.

결국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는 고백은 감정의 문제가 아니라 존재의 태도다. 복음이 하나님의 의라면, 그 의를 믿음으로 받은 자는 이미 살아 있는 사람이다. 제국이 무너지고 문명이 흔들려도,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는 약속은 흔들리지 않는다. 장재형목사는 이 확신 위에 자신의 설교와 사역을 세운다. 세상에서 밀려난 자, 스스로를 실패자로 여기는 이들에게 그는 담대히 말한다. 복음은 바로 당신을 위한 하나님의 능력이라고.

오늘도 많은 이들이 율법적 사고 속에서 자신을 정죄한다. 그러나 십자가의 의가 실제로 나를 덮고 있다는 확신이 회복될 때, 복음은 더 이상 이론이 아니라 삶이 된다. 이 진리가 다시 심장에 새겨질 때, 우리는 복음을 숨기는 사람이 아니라 복음을 자랑하는 사람으로 서게 된다. 그때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은 교리가 아니라, 오늘을 움직이는 현실이 된다.

페이스풀리스

davidjang.org

부활로 오늘을 다시 세우다 — 장재형 목사의 고린도전서 15장 

인류의 역사에서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종착지로 여겨져 왔습니다. 철학은 사유로, 과학은 분석으로, 예술은 위무로 응답해 왔지만, 누가 죽음 자체를 꺾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 앞에서는 모두가 고개를 떨구었습니다. 바로 여기서 기독교 복음은 전혀 다른 선언을 들려줍니다. 사망을 삼키는 생명의 사건, 곧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은 이 부활을 단순한 교리나 상징이 아닌, 세계의 질서를 바꾼 실제 사건으로 제시합니다. 장재형(장다윗)목사는 이 ‘부활의 장’을 따라가며, 부활이 신자의 내면을 새롭게 하고 교회를 굳게 세우며, 세상 속 그리스도인의 삶을 변화시키는 능력임을 유기적으로 풀어냅니다. 헬라 문화의 회의와 오늘의 물질주의가 만들어 낸 의심을 정면으로 다루되, 그것을 이기는 길을 논증과 목회적 위로로 제시합니다.

그의 강해가 맨 먼저 세우는 지점은 부활의 ‘사실성’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의 부활을 신화가 아닌 목격의 연쇄로 증언합니다. 게바와 열두 제자, 한 번에 오백 명이 넘는 형제, 생전에 예수를 믿지 않던 야고보, 그리고 교회를 핍박하던 사울 자신이 부활하신 주를 만남으로 삶이 근본에서 뒤집혔습니다. 배신자와 냉소자와 박해자가 오히려 가장 강력한 증인이 되는 이 역설은 단순한 심리적 각성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장재형목사는 바로 이 변화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역사와 인격에 실제로 개입했음을 읽어냅니다. 복음은 누군가의 종교적 열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실재가 세계에 남긴 흔적이며, 그 흔적을 따라 교회가 오늘도 살아 숨 쉰다는 것입니다.

이 확증 위에서 바울은 단호하면서도 상식적인 논리를 전개합니다.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을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복음은 허망하고 믿음은 착각이 됩니다. 죄 사함의 약속은 공허해지고, 먼저 잠든 이들에 대한 소망은 흩어지며,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이 선언이 모든 전제를 뒤집습니다. 첫 아담 안에서 사망이 왕로릇했지만,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이 통치하기 시작했습니다. 장재형목사는 이 진리가 개인 구원을 넘어 우주적 통치의 좌표를 바꾼 사건임을 강조합니다. 재림의 날 마지막 심판에서 사망은 최종적으로 패배하고, 하나님의 공의가 만물 위에 구현될 것이라는 소망은 미래의 약속을 넘어 현재의 윤리를 지탱하는 힘이 됩니다.

그렇다면 장차 완성될 승리가 어떻게 오늘의 삶과 연결되는가. 여기서 그는 ‘영적 부활’의 현재성을 풀어냅니다. 아담의 범죄로 하나님의 생명과의 관계가 끊어진 인간은 살아 있으나 영적으로 죽은 상태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성령 안에서 하나님과 화목할 때 우리는 은혜로 새 생명을 받습니다. 회개는 과거를 후회하는 감정이 아니라,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실존적 전환입니다. 탕자가 아버지께로 돌아왔을 때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선언이 주어진 것처럼, 복음 안에서의 회복은 관계의 소생이며 존재의 부활입니다. 장재형목사는 영적 부활이야말로 육체의 부활을 소망할 수 있는 토대라고 설명합니다. 성령께서 지금 내 안에서 죄에 대해 죽고 의에 대해 사는 순종을 가능하게 하실 때, 장차 올 ‘몸의 부활’에 대한 소망은 막연한 기대가 아니라 현재를 견인하는 확신이 됩니다.

바울은 이어서 헬라 철학의 여파 속에서 제기된 질문에 답합니다.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며 어떠한 몸으로 오는가?” 그는 자연의 질서를 예로 들어 씨앗의 비유를 듭니다. 씨앗이 땅에 떨어져 썩지 않으면 새로운 생명을 맺지 못합니다. 죽음은 소멸이 아니라 변화를 향한 관문입니다.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사나니.” 지금의 ‘육의 몸’이 있다면 장차 ‘신령한 몸’도 있습니다. 장재형목사는 이 선언이 물질을 경멸하거나 영성을 탈육화하는 구원론이 아니라고 분명히 합니다. 오히려 창조의 선함을 회복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이 존재의 전 영역을 새롭게 한다는 복음의 총체성입니다. 부활하신 주께서 시공간의 제약을 넘어 나타나셨지만 제자들과 함께 음식을 드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셨듯, 영광의 몸은 비물질적 환영이 아니라 성령의 주권 아래 완전히 정렬된 실재입니다. 그러므로 부활 교리는 삶을 떠난 관념이 아니라 삶을 파고드는 윤리를 요구합니다. 우리의 몸이 성령의 전이라면, 먹고 마시는 습관과 노동과 쉼, 성과 관계, 고통과 질병을 대하는 태도까지 모두 부활 신앙의 지평 안에서 다시 해석되어야 합니다.

‘첫 열매’의 개념은 시간 감각을 바꾸어 둡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끝에서 먼저 일어난 사건입니다. 추수의 보증이 현재로 들어왔습니다. 신자는 ‘이미와 아직’ 사이를 삽니다. 이미 죄 사함을 받고 새 생명에 참여했지만, 아직 눈물과 죽음이 남아 있습니다. 바로 이 긴장 속에서 재림의 소망은 전망이 아니라 방향이 됩니다. 교회는 미래의 나라를 현재로 앞당겨 보여 주는 증거 공동체로 부름 받았습니다. 예배와 선교, 섬김과 정의, 화해와 창조 보전은 부활 신앙의 자연스러운 열매이며, 마지막 심판을 준비하는 지혜로운 삶의 표지입니다. 세상의 성공 신화를 절대화하지 않되 허무로 물러서지도 않는, 책임 있는 소망의 태도—장재형목사가 강조하는 부활 신앙의 품격입니다.

오늘 한국 교회와 사회에도 이 메시지는 긴요합니다. 부활을 은유로 축소하는 경향은 지적으로 세련되어 보일지 몰라도, 실제로는 복음의 심장을 비워 버립니다. 반대로 기괴한 상상과 호기심으로 부활을 왜곡하는 태도 또한 경계해야 합니다. 그는 진리가 양 극단 사이의 타협이 아니라, 하나님이 스스로 드러내신 계시에 대한 순전한 순복임을 일깨웁니다. 고린도전서 15장의 목표는 논쟁의 승리가 아니라 성도들의 견고함입니다.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다”는 약속으로 사람을 세우는 목자의 마음이 바울의 문장에 흐르고, 장재형목사는 그 온기를 오늘의 설교로 충실히 전합니다.

부활의 빛은 고난을 해석하는 법을 바꿉니다. 억울함과 상실, 질병과 압박, 관계의 상처는 신자의 일상에서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십자가가 영광으로 반전되었듯, 주와 함께 겪는 슬픔은 새 창조의 씨앗이 됩니다. 눈물로 뿌리는 기도, 성실한 선행, 정의를 위한 위험한 결단, 화해를 향한 용서, 일터의 정직과 가정의 헌신이 모두 씨앗입니다. 땅속의 시간은 어둡고 길지만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마지막 날 부활의 영광으로 연결될 것을 확신하게 하는 이 시선이 오늘을 견디고 내일을 준비하게 합니다. 그래서 그의 강해는 감정의 위로를 넘어 견디는 힘을 줍니다. 소망이 현실 도피가 아니라 책임의 동력이 될 때, 부활 신앙은 가장 현실적인 신앙이 됩니다.

부활 교리는 교회의 공공성도 요청합니다. 마지막 심판의 비전은 개인의 회심을 넘어 사회적 책임으로 확장됩니다. 사망의 권세가 꺾일 때 폭력과 거짓, 탐욕의 구조도 해체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 신앙은 정의와 평화, 약자 보호, 창조 보전의 실천을 회피하지 않습니다. 이는 정치적 도구화가 아니라 복음의 본질에서 흘러나오는 필요입니다. 장재형목사는 도시와 마을, 직장과 학교, 문화와 디지털 생태계 속에서 부활의 윤리를 번역해 내도록 초대합니다.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라”는 권면은 예배당 안의 봉사만이 아니라, 일상을 거룩하게 경작하는 모든 선택에 적용됩니다. 그때 교회는 문제를 회피하는 안전지대가 아니라, 상처를 품고 치유를 흘려보내는 선교적 공동체가 됩니다.

한편 어떤 이들은 ‘영적 부활’을 현세적 자아 회복의 은유로 축소하고, ‘몸의 부활’을 비과학적 신화로 폄하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영성은 현실을 떠나는 도피가 아니라, 말씀으로 현실을 다시 사랑하게 하는 귀환입니다. 신령한 몸은 물질을 무화하는 몸이 아니라 성령의 주권 아래 새로 정렬된 몸입니다. 재림은 역사 밖의 중단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충만히 드러나는 절정입니다. 마지막 나팔은 두려움의 경보가 아니라 구속의 완성 신호입니다. 이러한 오해들을 바로잡을 때, 부활 신앙의 기쁨은 감정의 파도에 그치지 않고 소망의 근력이 됩니다. 흔들리는 시대에 버팀목이 되는 근력, 절망의 습관을 끊고 사랑의 습관으로 옮겨 가게 하는 근력입니다.

역사적 신빙성에 대한 물음도 성실히 다뤄야 합니다. 초대 교회의 급속한 확장, 사도들의 변화, 복음 전승의 다양성과 핵심 일치, 주일 중심 예배의 형성은 부활 선포가 단지 상징적 상상력이 아니라 실제 사건에 대한 공동체적 대응이었음을 시사합니다. 유대적 세계관 안에서 십자가형을 당한 메시아에 대한 재해석이 가능했던 유일한 길, 그것이 부활이었습니다. 물론 역사적 고찰이 구원의 조건은 아닙니다. 그러나 회의로 얼어붙은 마음에 합리적 신뢰의 토대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유익합니다. 믿음은 생각을 버리는 도약이 아니라, 말씀과 현실이 만나는 자리에서 새롭게 열리는 인식의 길입니다.

이처럼 고린도전서 15장의 메시지는 과거의 위대한 사건을 기념하는 데 머물지 않습니다. 현재의 교회를 세우고 미래의 소망을 정렬하는 지도가 됩니다. 개인에게는 죄와 정죄, 수치와 두려움의 고리를 끊는 자유를, 가정에는 용서와 화해의 새로운 질서를, 교회에는 성찬과 세례, 말씀과 훈련을 통해 부활 생명을 공유하는 은혜를, 사회에는 낮은 자를 높이고 상한 갈대를 꺾지 않는 공의를 요청합니다. 장재형목사는 적용을 풍성히 제시하며, 부활 신앙이 삶의 언어로 번역될 때 복음의 설득력과 매혹이 가장 강하게 드러난다고 강조합니다.

결국 신자는 ‘부활 이후’라는 관점에서 자신을 다시 정의합니다. 실패와 성공, 건강과 질병, 인정과 오해, 풍요와 결핍이 더 이상 최종 기준이 아닙니다.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다”는 확신이 있을 때, 우리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신실함을 선택하고, 성급한 보상 심리에서 자유로워집니다. 그는 특히 청년 세대가 불확실성과 경쟁, 고립과 소진을 돌파하는 실제적 용기를 부활 신앙에서 얻게 하려 합니다. 공동체가 서로의 넘어짐을 품고 다시 일으키는 작은 부활을 연습할 때, 교회는 새벽의 공동체로 서게 됩니다.

신학적으로도 부활은 교리들의 결절점입니다. 창조와 성육신은 하나님이 왜곡된 세계로 내려오신 사건이라면, 십자가와 부활은 그 왜곡을 뒤집는 승리이며, 성령 강림은 그 승리를 교회와 신자에게 적용하는 사건입니다. 의롭다 하심과 양자 됨, 성화와 영화가 모두 부활에서 뻗어나갑니다. 성찬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선포하면서도 부활 생명에의 참여를 기념하고, 세례는 옛사람의 죽음과 새 사람의 삶을 표지합니다. 마지막 심판과 재림의 교리 역시 부활 없이는 설 자리가 없습니다. 교리가 삶과 분리될 때 딱딱해지지만, 부활의 은혜 안에서 교리는 생명이 되어 흐릅니다.

부활은 결국 사랑으로 귀결됩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기에 사랑은 헛되지 않습니다. 실패해 보이는 순간에도 사랑은 약속으로 다시 일어납니다. 용서는 무력함이 아니라 부활을 믿는 자의 담대한 선택이며, 화해는 불가능해 보이는 간극 위에 놓인 부활의 다리입니다. 고난 속에서도 선을 행하는 끈기는 부활의 근육입니다. 그래서 그의 설교 말씀은 논문처럼 치밀하고 편지처럼 따뜻합니다. 그 온도에서 성도는 다시 살아나는 법을 배웁니다.

마침내 우리의 언약적 정체성이 분명해집니다. 첫 사람 아담에게서 흙의 형상을 입은 우리는,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형상을 덧입게 될 사람들입니다. 그날, 죽었던 몸은 썩지 않을 몸으로, 상한 마음은 온전한 사랑으로, 흩어진 공동체는 새 예루살렘의 평화로 변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영광이 지금 여기의 선택들 속에 미리 스며듭니다. 신자는 언약의 미래를 현재로 앞당겨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견실함은 완고함이 아니고, 순종은 강박이 아닙니다. 견실함은 약속을 향한 집중이며, 순종은 사랑에 대한 응답입니다. 장재형목사는 이 견고한 응답을 일상의 언어로 번역해 주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라”는 권면을 삶의 리듬으로 자리 잡게 합니다.

그래서 질문도 바뀝니다. “부활이 사실인가?”에서 “부활이 사실이라면 나는 오늘 어떻게 살 것인가?”로. 이 전환이 회개의 본질이고 신앙의 성숙입니다. 부활이 사실이라면, 시간과 재능과 관계와 재물이 새 질서로 편성되어야 합니다. 몸은 영광을 향해 훈련되어야 하고, 교회는 소망을 나누는 식탁이어야 하며, 도시는 하나님의 평화를 미리 맛보는 정원이 되어야 합니다. 마지막 나팔이 울릴 때 우리는 모두 홀연히 변화될 것입니다. 그날을 가장 잘 기다리는 길은 오늘을 부활의 방식으로 사는 것입니다. 장재형목사의 고린도전서 15장 강해는 그 길을 구체적으로 비추는 지혜이며, 신자에게 부활 신앙의 용기와 기쁨을 선물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담대히 외칩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와 부활로 완전한 승리를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이 확신이 일상을 새롭게 정렬할 때, 교회는 세상의 빛으로, 성도는 부활의 증인으로, 역사는 하나님 나라의 찬송으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오늘도 그 소망의 노래를 배우며, 우리는 다시 일어서는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www.davidjang.org

Pasteur David Jang – L’appel du disciple

1. L’appel à jeter les filets en eaux profondes et la mission du disciple
La scène où Jésus se tient au bord du lac de Galilée, c’est-à-dire le lac de Génésareth (Luc 5.1‑11), est un épisode que nous connaissons déjà à travers divers Évangiles. Cependant, Luc 5 offre une description plus détaillée et vivante que Matthieu 4. En particulier, le commandement « Avance en eau profonde et jetez vos filets pour pêcher » (Luc 5.4), et la déclaration « Ne crains point ; dès maintenant tu seras pêcheur d’hommes » (Luc 5.10) illustrent de manière directe la mission précise donnée à ceux qui sont appelés à être disciples. C’est un tournant décisif, révélant de manière dramatique comment des gens ordinaires, tels que Pierre et André, Jacques et Jean, qui étaient pêcheurs en Galilée, vont devenir des « pêcheurs d’hommes ».

Le pasteur David Jang, parlant de ce passage, interprète la parole de Jésus « Avance en eau profonde et jetez vos filets » comme une instruction d’action concrète qui accomplit la « mission céleste » (天命) et la « Grande Commission ». Le passage de la pêche aux poissons à la pêche aux hommes symbolise un saut d’une dimension extraordinaire, inimaginable par l’effort ou la connaissance humaine. Ainsi, dans cette scène, Pierre est saisi de frayeur et s’écrie : « Seigneur, retire-toi de moi, parce que je suis un homme pécheur » (Luc 5.8). Mais Jésus répond : « Ne crains point ; dès maintenant tu seras pêcheur d’hommes » (Luc 5.10). Voilà comment la crainte et l’enthousiasme du disciple appelé, et la prophétie d’un chemin totalement différent de l’ancien, se manifestent en même temps dans Luc 5.1‑11.

Nous devons ici méditer à nouveau sur la parole « Avance en eau profonde et jetez vos filets ». Il ne s’agit pas simplement de prendre ou non des poissons. Pour certains, au cœur de leur vie, c’est un appel décisif à examiner sérieusement la vocation reçue. L’épisode sur le rivage du lac de Génésareth nous pose encore et toujours la même question fondamentale : Dans quel but vivons-nous ? Pour quelle raison sommes-nous appelés ? Jésus demande à ses disciples, qui étaient pêcheurs, d’aller dans les eaux profondes. À ceux qui, fatigués par leurs échecs, lavaient déjà leurs filets au bord de l’eau peu profonde, Il ordonne, en dépit de toute logique, de retourner sur le lac et de jeter de nouveau les filets. Même si Pierre déclare : « Maître, nous avons travaillé toute la nuit sans rien prendre », la parole du Seigneur inverse la situation d’une manière inattendue.

Le pasteur David Jang souligne que c’est précisément là la vérité paradoxale qui se produit dans la foi. Dans la réalité, il se peut que l’on dise : « Nous avons déjà essayé, ça ne marche pas. Nous sommes restés les mains vides. » C’est souvent le cas sur le terrain de l’évangélisation et de la mission. Malgré tous nos efforts, on a l’impression de ne voir aucun fruit, aucun résultat. Cependant, lorsque nous obéissons à la parole du Seigneur, c’est-à-dire « Avance en eau profonde », il arrive que nous fassions l’expérience d’une pêche miraculeuse, au point que les filets se déchirent. C’est cet événement à la fois historique et symbolique qui a déclenché la marche des disciples sur la voie de « pêcheurs d’hommes ».

La réponse de Pierre : « Maître, nous avons travaillé toute la nuit sans rien prendre ; mais, sur ta parole, je jetterai le filet » (Luc 5.5) renferme un principe important. Même si toute expérience et toute connaissance humaine, sans parler de la fatigue du corps et de l’esprit, concluaient à l’inutilité totale de tout effort, la foi dans la parole de Dieu l’a amené à obéir encore une fois. Et en suivant cette parole et en jetant les filets, ils ont pris une grande quantité de poissons, au point que les filets se déchiraient. Ils ont dû même demander de l’aide à l’autre barque et, à la fin, les barques s’enfonçaient sous le poids de la pêche. Cela symbolise l’abondance qui découle du fait de se mouvoir selon la parole du Seigneur. L’œuvre d’évangélisation suit un schéma semblable. Le salut d’une personne, la conduite d’une âme vers Dieu ne relèvent pas de la force ou de la sagesse de l’homme, mais s’accomplissent entièrement par l’obéissance à la Parole et l’action du Saint-Esprit.

En voyant tout cela, Pierre dit : « Seigneur, retire-toi de moi, parce que je suis un homme pécheur. » Il ne s’agit pas simplement d’un sentiment de culpabilité. C’est plutôt la prise de conscience qu’en présence de Celui qui manifeste une telle puissance, nous ne pouvons rien faire, et que toute notre vie est bien misérable et insignifiante. Face au Seigneur tout-puissant, il prend la mesure de ses limites. Mais Jésus le rassure : « Ne crains point ; dès maintenant tu seras pêcheur d’hommes », lui ouvrant ainsi un nouveau chemin. D’un point de vue purement humain, être invité à franchir les frontières de son petit monde peut être source de crainte et d’inconnu. Pourtant, là où se trouvent la promesse et l’ordre du Seigneur, l’accomplissement est toujours assuré.

Nous devons donc recevoir cette parole de Jésus comme un appel qui nous concerne aujourd’hui. On applique souvent cette scène à l’évangélisation, en soulignant que la question quotidienne de « Qu’allons-nous manger ? » se trouve connectée à la question spirituelle du « Salut des âmes ». Dans l’histoire de l’Église, « Devenez pêcheurs d’hommes » a toujours été l’un des versets phares de l’évangélisation et de la mission. Sur la base de cette parole, l’Église a connu la croissance et de nombreux croyants ont appris l’obéissance et le renoncement. Le pasteur David Jang qualifie ce commandement d’« Aller en eaux profondes » comme l’appel immuable de Dieu pour toutes les générations et pour le monde entier.

Un autre point d’attention dans ce texte, c’est la rapidité avec laquelle on abandonne son identité de « pêcheur » pour revêtir la nouvelle identité de « pêcheur d’hommes ». Habituellement, on pense qu’un grand tournant dans la vie requiert beaucoup de temps, mais lorsque Jésus ordonne à Pierre « d’avancer en eau profonde », celui-ci répond instantanément : « Sur ta parole, je jetterai le filet. » Il fait aussitôt l’expérience de la puissance de Dieu, ce qui devient le déclencheur de son chemin de disciple. Finalement, ils laissèrent tout et suivirent Jésus (Luc 5.11). Cela ne signifie pas qu’ils ne pêchaient plus jamais ensuite, mais que leur priorité et leur objectif ultime étaient désormais centrés sur le Royaume de Dieu et le salut des âmes. En d’autres termes, l’acte de jeter les filets prend désormais un sens complètement différent.

Ainsi, l’ordre de Jésus réoriente toute la vie d’un individu. Non plus jeter le filet pour des poissons, mais jeter le filet pour des gens. Non plus se contenter de pain quotidien, mais nourrir les âmes et leur donner la vie. Quitter l’état de « nous avons peiné toute la nuit sans rien prendre » pour entrer dans cette victoire étonnante qui vient de la « parole du Seigneur ». Tout ce processus nous transmet un message d’une portée considérable. Le pasteur David Jang explique : « Bien que la manière de pêcher des poissons puisse sembler similaire à celle de ‘pêcher des âmes’, il s’agit en réalité de domaines radicalement différents. Pourtant, Jésus se sert de cette image familière pour nous enseigner l’Évangile d’une manière que tout le monde peut comprendre. » C’est là l’une des caractéristiques narratives de l’Évangile et la méthode d’enseignement de Jésus.

Dans le monde pastoral et théologique, on a souvent prêché sur cette parole : « Avance en eau profonde et jetez vos filets. » Car le champ de l’évangélisation ressemble parfois à ces « eaux profondes ». C’est un lieu où, humainement parlant, on ne voit aucune solution, où l’on a le sentiment d’avoir tout essayé, en vain. Pourtant, lorsque la puissance du Seigneur se manifeste, elle se déploie précisément dans ces situations difficiles. Quand beaucoup perdent de vue la nature essentielle de l’Évangile, quittent le terrain de l’évangélisation ou se contentent d’observer de loin, les paroles de Jésus invitent encore l’Église à se réveiller. Les expériences apparemment infructueuses peuvent nous épuiser, mais celui qui, « sur la parole du Seigneur », jette à nouveau le filet, fera l’expérience d’une abondance qu’il n’attendait plus.

En s’appuyant sur cette interprétation, le pasteur David Jang propose une vision concrète pour l’œuvre de l’Église, la mission et l’éducation, tout en allant « dans les eaux profondes ». Par exemple, la fondation de la Great Commission University (GCU) s’inscrit dans la volonté de ne pas se limiter à transmettre des connaissances dans le cadre de l’éducation, mais aussi d’étancher la soif spirituelle des étudiants et de les envoyer en mission vers le monde. Si jusque-là l’éducation chrétienne était prisonnière de formes et de traditions, on souhaite à présent investir, comme dans une mer profonde, le commandement « Faites de toutes les nations des disciples » (Matthieu 28.19) et le rendre effectif.

Le pasteur David Jang encourage également les Églises, les diverses organisations missionnaires et les personnes engagées dans le monde des affaires à jeter les filets et expérimenter l’action de Dieu. Il ne s’agit pas de rester dans notre zone de confort, mais d’oser s’aventurer dans des eaux profondes et larges. Certes, il existe des peurs et des échecs possibles, mais il nous exhorte à croire que si le Seigneur est présent avec sa parole, la victoire est déjà assurée.

Dans Luc 5.1-11, le miracle de la pêche ne constitue pas le point principal en soi. C’est plutôt le fait que des pêcheurs font l’expérience du « monde de Dieu » en obéissant à un appel qui dépasse leur univers quotidien. Ce renversement, où un filet vide devient un filet débordant, ce courage d’aller en profondeur, cette confiance totale en la parole du Seigneur, nous conduisent à un changement radical : vivre désormais en « pêcheurs d’hommes ». La décision des disciples de tout laisser et de suivre Jésus (Luc 5.11) s’applique à nous aussi, déclare le pasteur David Jang. Il rappelle que l’appel d’un disciple n’est pas une posture passive consistant à « prier et attendre » dans l’enceinte de l’Église, mais doit mener à une attitude proactive, qui nous porte sur le terrain de l’évangélisation et de la mission.

La question cruciale, révélée par cet épisode, est la suivante : « Quel est le but pour lequel le Seigneur nous a appelés ? » L’apôtre Paul le mentionne dans 1 Corinthiens 1.26 : « Considérez, frères, votre appel… » Ainsi, ceux qui sont appelés se mettent au service de la gloire de Dieu. Et cette forme concrète de service apparaît lorsque nous mettons en pratique « Avance en eau profonde et jetez vos filets ». Notre vocation ne se limite pas aux cultes et aux services dans l’Église ; elle englobe toute notre existence et se focalise sur le salut des âmes.

D’autre part, nous ne devons pas ignorer la peur que ressentent les disciples. Avant d’entendre la parole « Ne crains point ; dès maintenant tu seras pêcheur d’hommes », Pierre était envahi par la « peur de l’inconnu », face à un monde qu’il ne soupçonnait pas. Lui qui avait développé une habitude de survie en tant que pêcheur, se retrouvera désormais dans un univers totalement différent. Pourtant, cette crainte devrait se transformer en enthousiasme et en espérance. Lorsque Dieu nous appelle à élargir notre horizon, nous devons quitter nos zones de sécurité pour entrer dans la grâce. Sur notre route spirituelle, ce départ de l’ancien monde vers le nouveau se reproduit sans cesse.

La consigne « Avance en eau profonde et jetez vos filets » peut, au premier abord, réveiller en nous les souvenirs de nos échecs passés. Comme Pierre le confesse : « Nous avons travaillé toute la nuit sans rien prendre. » Mais la Parole de Dieu transcende nos limites et nos faiblesses. Dès lors que nous décidons d’« obéir à la parole du Seigneur en jetant à nouveau les filets », nous pouvons être témoins de l’action surnaturelle de Dieu dans notre vie. C’est alors que Pierre s’écrie : « Je suis un homme pécheur. » Auparavant, il pouvait être fier de ses connaissances, de sa technique de pêcheur, de son savoir-faire. Mais la parole du Seigneur bouleverse tous nos calculs et toutes nos prévisions. C’est alors que l’être humain réalise ses limites et se prosterne devant Dieu, avouant son état de pécheur. Cependant, cette confession ne le conduit pas à la condamnation ou au désespoir ; elle devient plutôt le seuil qui l’ouvre à une nouvelle dimension.

De ce point de vue, le pasteur David Jang affirme que, si nous nous abaissons davantage devant le Seigneur et lui obéissons, nous pourrons alors entrer dans l’eau plus profonde et la vision plus vaste que Dieu nous offre. Cette leçon ne se limite pas à la vie personnelle de foi, mais s’applique à toute la communauté ecclésiale et à l’avancement du Royaume de Dieu. Dans le champ missionnaire, en particulier à l’étranger, face aux barrières de culture, de langue ou de coutumes, il arrive souvent que nos propres connaissances ou stratégies ne suffisent pas. Mais quand le Seigneur nous dit : « Allez maintenant en eau profonde. Tentez quelque chose de nouveau », celui qui obéit finit par voir le filet rempli.

Le pasteur David Jang étend ce raisonnement à la sphère des arts, de la musique, du monde des affaires, de la recherche académique, du service social, etc. Un artiste peut se demander comment transmettre le message de Dieu à travers son œuvre ; un musicien comment, au-delà des cantiques et de la musique profane, toucher en profondeur les cœurs des auditeurs pour les conduire à Dieu ; un entrepreneur comment utiliser ses activités économiques pour attirer les gens vers le Seigneur. Et dans tout cela, c’est la parole du Seigneur qui doit demeurer centrale. Car nos efforts et nos méthodes humaines ont leurs limites.

Le chapitre 5 de l’Évangile selon Luc montre qu’en obéissant à une parole de Jésus, inattendue de surcroît, on peut rompre avec le cadre de l’échec antérieur et découvrir un appel d’une tout autre dimension : « Désormais, tu seras pêcheur d’hommes. » Et cet appel n’était pas réservé aux seuls disciples d’autrefois. Tous les chrétiens d’aujourd’hui sont destinataires de la même consigne : « Va en eau profonde et jette ton filet. »

« Pêcher des hommes » veut dire sauver des vies. L’Église existe pour sauver des âmes, et les chrétiens doivent mettre au service de ce but leur talent et leur temps. Si nous oublions l’injonction « Avance en eau profonde et jetez vos filets », nous perdrons notre « saveur de sel » (Matthieu 5.13). Or, le sel qui perd sa saveur n’est plus bon qu’à être jeté dehors et piétiné par les hommes. Le sens de la mission de l’Église et des chrétiens, c’est l’évangélisation et la mission, c’est-à-dire le salut des hommes. L’Église peut être grande, riche, pleine de programmes ; si elle néglige l’essentiel, qui est de sauver des âmes, c’est comme si elle perdait sa saveur. Comme au temps des disciples, il est légitime d’éprouver une certaine appréhension devant l’ampleur de la tâche. Mais Jésus nous dit encore : « Ne craignez point. »

Quand nous gravons cet appel et cette promesse dans nos cœurs, nous sommes alors prêts à franchir un cap vers une nouvelle dimension et à quitter « le filet vide » pour connaître l’abondance spirituelle. L’évangélisation et la mission ne se réalisent pas par des stratégies ou des ruses humaines. Même si nous peinons toute la nuit, il se peut que nous restions bredouilles. Mais quand le Seigneur prononce un mot, c’est la porte du Royaume de Dieu qui s’ouvre. Tel fut le vécu des disciples, jadis pêcheurs de Galilée, et cela peut se reproduire à notre époque tant la puissance de l’Évangile demeure inchangée.

2. Le temps de la moisson et la vision du salut des âmes
Dans Matthieu 9.35-38, on voit Jésus parcourir toutes les villes et les villages, enseignant dans les synagogues, prêchant l’Évangile du royaume et guérissant toute maladie et toute infirmité. Puis vient cette phrase : « Voyant la foule, il fut ému de compassion pour elle, parce qu’elle était languissante et abattue, comme des brebis qui n’ont point de berger » (Matthieu 9.36). Jésus discerne l’état spirituel de la foule et constate qu’elle erre comme des brebis sans berger. Ensuite, il emploie la célèbre parabole de la moisson : « La moisson est grande, mais il y a peu d’ouvriers. Priez donc le maître de la moisson d’envoyer des ouvriers dans sa moisson » (Matthieu 9.37-38).

Le pasteur David Jang relie ce texte à la métaphore du « pêcheur d’hommes » de Luc 5 pour montrer que le même mandat – annoncer l’Évangile et sauver des âmes – est souligné dans deux images différentes (le pêcheur et la moisson). Sur le lac, l’acte de « pêcher des poissons » symbolise l’évangélisation, tandis que dans le champ, la parabole de la moisson montre l’idée de « récolter des âmes ». La mer est un espace profond, dangereux, imprévisible, alors que le champ, baigné de lumière, s’étend à perte de vue. Les deux images sont différentes, mais elles désignent au fond un même objectif : le salut des âmes et le ministère de la vie.

« La moisson est grande, mais il y a peu d’ouvriers », dit Jésus. Et cette parole demeure vraie à travers toute l’histoire de l’Église. Aujourd’hui encore, le monde est vaste et il y a d’innombrables âmes sans berger errant en dehors de l’Église. Pourtant, le problème du manque d’ouvriers reste entier. L’Église se concentre parfois sur la construction d’édifices plus grands ou l’extension de divers programmes, sans pour autant former des « ouvriers » capables de récolter des âmes. L’évangélisation et la mission sont souvent confiées à d’autres ou reléguées dans la catégorie « ce que quelqu’un finira bien par faire ». Mais Jésus déclare : « Priez le maître de la moisson d’envoyer des ouvriers », exhortant l’Église à poser un acte concret.

Ces ouvriers sont les « pêcheurs d’hommes » de Luc 5. Jésus, appelant de simples pêcheurs de Galilée, en a fait des apôtres qui ont bouleversé l’histoire du monde. Ils n’étaient ni de la classe intellectuelle ni détenteurs d’une quelconque autorité politique ou religieuse. Cependant, en obéissant à l’appel de Jésus, ils sont devenus des protagonistes centraux de la diffusion de l’Évangile dans le monde. L’enseignement sur le royaume des cieux et le pardon des péchés, transmis par Jésus, s’est largement propagé grâce à ces disciples. Cette même dynamique vaut pour l’Église actuelle. De nos jours encore, Dieu peut nous appeler, dans la banalité de notre vie, et nous dire : « Désormais, tu seras pêcheur d’hommes. » L’avertissement « La moisson est grande, mais il y a peu d’ouvriers » résonne dans nos cœurs, et le Seigneur exhorte l’Église à former et à envoyer ces ouvriers.

Pour raviver ce sens de la mission, le pasteur David Jang souligne la nécessité d’un renouveau dans la mentalité des pasteurs, des théologiens et des fidèles. Nous devons quitter la perspective individualiste qui se contenterait de « ma propre foi » ou de « mon propre salut ». Nous devons remettre la « Grande Commission » (Matthieu 28.19-20) au centre de notre vie, en rappelant que l’Évangile doit être annoncé jusqu’aux extrémités de la terre. Jésus a ordonné : « Allez, faites de toutes les nations des disciples, les baptisant au nom du Père, du Fils et du Saint-Esprit, et leur enseignant à observer tout ce que je vous ai prescrit », concluant par cette promesse : « Et moi, je suis avec vous tous les jours, jusqu’à la fin du monde. » Cette mission n’est donc pas un chemin solitaire, car le Seigneur y marche avec nous.

C’est maintenant le temps de la moisson. Nous prétextons parfois un manque de préparation, ou l’attente d’un moment plus opportun. Mais Jésus déclare que « la moisson est grande » et que tout est déjà mûr pour être récolté, pour peu que des ouvriers s’y emploient. Le défaut réside dans le manque d’ouvriers, et c’est un appel pressant lancé à l’Église et aux croyants : « Allez ! » Dans l’histoire de la propagation de l’Évangile, il y a toujours eu des hommes et des femmes qui se sont levés, au prix de leur vie, pour aller vers des régions ou des peuples non atteints.

C’est à ce propos que la prière « de demander au maître de la moisson d’envoyer des ouvriers » (Matthieu 9.38) devrait résonner fortement dans l’Église. Mais au-delà de la prière, il importe que ceux qui prient deviennent eux-mêmes la réponse à cette prière. Le pasteur David Jang invite chacun à prier, tout en étant prêt à se tenir devant Dieu : « Me voici, envoie-moi » (cf. Ésaïe 6.8). Dans toute la Bible, Dieu révèle sa volonté à ceux qui prient et les appelle à passer à l’action. Moïse, David, Ésaïe, Jérémie, bien que conscients de leurs limites, ont fini par dire oui à la mission que Dieu leur confiait.

Il en a été de même pour les pêcheurs décrits dans Luc 5. Après une nuit de labeur infructueux et le miracle de la pêche, ils ont compris ce qu’ils devaient faire. Sans tarder, ils ont laissé leurs filets et ont suivi Jésus. Les suivre impliquait de bouleverser leurs priorités et leurs valeurs. Résultat : ils sont devenus ouvriers dans la moisson du Seigneur, pêcheurs d’hommes, et ont posé les fondements de l’Église.

Pour le pasteur David Jang, ce chemin est celui que doit suivre l’Église d’aujourd’hui. Nous devons prendre conscience de nos « filets vides » et obéir de nouveau à la parole du Seigneur en les jetant une seconde fois. Le « filet vide » n’est pas uniquement l’échec dans l’évangélisation ou la stagnation de la croissance de l’Église. Il peut désigner aussi l’état d’une âme éloignée de Dieu, vivant une foi routinière et formelle, sans soif de la Parole, ou encore une Église renfermée sur elle-même, manquant de sel et de lumière dans la société. Autant de visages d’une carence spirituelle. Or, dans ce vide, le Seigneur nous exhorte une nouvelle fois : « Avance en eau profonde. Obéis à la Parole ! »

Le travail de la moisson nécessite constamment de relever de nouveaux défis. Les méthodes d’hier ne correspondent pas nécessairement au contexte culturel d’aujourd’hui. Bien sûr, le contenu de l’Évangile, la mort et la résurrection de Jésus-Christ pour le salut de nos péchés, demeure le noyau immuable. Mais la manière d’approcher les gens et la figure des « eaux profondes » changent selon les époques.

D’ailleurs, Matthieu 9 nous montre comment Jésus lui-même procédait : Il allait dans toutes les villes et tous les villages. Il enseignait dans les synagogues, proclamait l’Évangile du Royaume, guérissait malades et infirmes. Cela nous donne un exemple de l’approche à adopter aujourd’hui encore : ne pas s’enfermer dans un temple en attendant que les gens viennent, mais aller à leur rencontre, s’impliquer dans leurs souffrances, écouter leurs problèmes et leur apporter la guérison spirituelle et physique dont ils ont besoin.

Le pasteur David Jang insiste sur le fait que l’Église ne doit pas se contenter d’un fonctionnement « centré sur le bâtiment » ou « centré sur les programmes ». Avoir un lieu de culte ou divers programmes est utile pour enseigner et former. Mais la moisson se fait dans le champ. Tout comme le blé mûrit au grand air, les âmes, semblables à des brebis sans berger, errent en tous lieux. Pour les atteindre, l’Église doit investir énergiquement la ville, la société, et même franchir les frontières culturelles et nationales. Elle doit garder à l’esprit l’exhortation : « Ne crains point ; dès maintenant tu seras pêcheur d’hommes », et semer la bonne nouvelle, récolter les âmes.

« La moisson est grande, mais il y a peu d’ouvriers » revient inévitablement à dire « c’est à toi d’aller ». Combien de temps allons-nous attendre que quelqu’un d’autre s’en charge ? Chacun, à sa place, doit prendre conscience de son appel à servir comme ouvrier. Cette vocation n’est pas réservée aux seuls pasteurs ou missionnaires. Elle incombe à tout croyant, à toute l’Église. Les uns dans le cadre professionnel, les autres dans le domaine artistique, d’autres encore dans l’éducation, chacun peut user de ses talents et de ses opportunités pour devenir pêcheur d’hommes.

Le pasteur David Jang qualifie cela de « paradigme missionnaire élargi à tous les domaines ». Alors qu’autrefois on considérait les missionnaires seulement comme des personnes partant à l’étranger, il s’agit aujourd’hui de voir chaque sphère de la société comme un champ missionnaire potentiel : médias, culture, arts, enseignement, nouvelles technologies, entreprise, etc. Là où il y a besoin de l’Évangile, c’est le champ. Et puisque Jésus dit de prier pour que « le maître de la moisson envoie des ouvriers », la communauté chrétienne doit favoriser la croissance de ces ouvriers et les envoyer.

La parabole de la moisson (Matthieu 9) et celle du pêcheur d’hommes (Luc 5) véhiculent le même message : avoir le cœur de Dieu, c’est-à-dire éprouver de la compassion pour ceux qui se perdent. Jésus, ému de compassion, constate que la foule est « languissante et abattue, comme des brebis sans berger ». Sans berger, les brebis sont sans défense face aux prédateurs, incapables de retrouver leur chemin lorsqu’elles s’égarent. De nos jours aussi, beaucoup s’égarent dans la solitude, la souffrance, le vide existentiel. L’Église ne doit pas les ignorer si elle veut demeurer fidèle à l’Évangile.

Ensuite, il faut effectivement des ouvriers pour recueillir ces âmes. L’amour et la compassion doivent se concrétiser. La prédication de la Parole, l’évangélisation, l’implantation de communautés, la formation de disciples : voilà le cycle vertueux qui doit perdurer. Ainsi, nous obéissons au commandement « Avance en eau profonde et jetez vos filets » : toute l’Église doit partager la grâce d’une pêche surabondante et s’engager pour le salut du plus grand nombre.

Le pasteur David Jang insiste sur l’idée que, pour cette œuvre de moisson, l’Église ne peut se limiter à la prédication et au culte. Elle doit développer des actions éducatives, formatrices, caritatives, ou spécialisées dans divers domaines, afin de dialoguer avec le monde. Jésus n’est pas resté cloîtré dans une synagogue ; Il est allé au-devant de ceux qui avaient besoin de guérison. Il nous montre ainsi la voie : écouter les nécessités concrètes des gens, comprendre leurs souffrances, partager leur réalité, puis annoncer la croix et la résurrection, qui donnent la vie et la paix.

L’expression « languissants et abattus, comme des brebis sans berger » ne concerne pas seulement le passé. Notre époque est marquée par des crises psychologiques, des dépendances, des conflits relationnels, la quête effrénée de l’argent, etc. Dans ce contexte, l’Église doit proclamer Jésus, le bon Berger, afin que ces âmes trouvent liberté et repos. C’est l’interprétation la plus juste de « la moisson est grande, mais il y a peu d’ouvriers ». Chacun de nous, face à l’appel à devenir un ouvrier, peut réagir en se dérobant (« Je ne suis pas qualifié, qu’un autre y aille… ») ou en répondant positivement (« Seigneur, me voici, envoie-moi »).

Ce dont l’Église a besoin aujourd’hui, c’est à la fois l’ardeur du « pêcheur d’hommes » et la sagesse de l’« ouvrier de la moisson ». Quand on réalise à quel point la valeur d’une âme est inestimable, on ne peut traiter cette mission à la légère. En réalité, notre « Grand Mandat » (the Great Commission) se fonde précisément là-dessus. Selon le pasteur David Jang, « le but ultime de l’évangélisation est d’établir sur terre le Royaume de Dieu qui existe déjà dans les cieux ». Pour l’avènement de ce Royaume, nous devons faire des disciples dans toutes les nations, baptiser au nom du Père, du Fils et du Saint-Esprit, enseigner à garder tout ce que Jésus nous a prescrit, en priant pour que le Saint-Esprit nous accorde sa puissance.

En fin de compte, Luc 5 et Matthieu 9 aboutissent à la même conclusion : « Pêche les hommes, moissonne les âmes. » Les deux paraboles utilisent des images différentes mais expriment la même mission, le même cœur de Jésus et la même vocation de l’Église. L’apôtre Paul, dans 1 Corinthiens 1.26, rappelle : « Considérez, frères, votre appel… » ; cet appel, nous le comprenons, est avant tout orienté vers le salut des âmes. Quand nous y répondons par un « Amen », l’Église conserve sa saveur de sel et demeure la lumière du monde.

La scène où un filet vide devient un filet plein, où des brebis sans berger retrouvent l’enclos divin, illustre un appel toujours vivant. Au cœur de notre existence, le courage de jeter à nouveau le filet en nous appuyant sur la Parole, la détermination à moissonner des brebis errantes, voilà ce que le Seigneur nous demande à cette heure. Le pasteur David Jang souligne que l’essentiel est « l’obéissance qui dépasse la peur ». Même si la situation paraît difficile et nos capacités limitées, c’est en répondant à l’ordre du Seigneur que s’enclenche le miracle. Quand ceux qui ont goûté à ce miracle propagent l’Évangile jusqu’aux extrémités de la terre, il y a d’innombrables âmes mûres pour la moisson.

C’est la leçon que nous tirons en lisant conjointement « Avance en eau profonde et jetez vos filets » et « La moisson est grande, mais il y a peu d’ouvriers ». Dans un cas, l’image est celle de la mer, dans l’autre, celle du champ, mais les deux signes s’intègrent dans le projet de salut de Dieu. La mission du pêcheur d’hommes et celle de l’ouvrier de la moisson concernent chacun de nous. Si nous avons le courage de dire, comme Pierre : « Sur ta parole, je jetterai les filets », nous verrons nos filets, jadis vides, se remplir à craquer. C’est alors que l’Église redeviendra un refuge pour le monde, une lumière dans l’obscurité. Et devant « les brebis sans berger », si nous allons vers elles pour leur annoncer l’amour de Jésus-Christ, la compassion du Seigneur nous sera communiquée, et la vraie moisson commencera.

Au long de ce processus, nous faisons l’expérience de la fidélité de Jésus qui a promis : « Et voici, je suis avec vous tous les jours, jusqu’à la fin du monde » (Matthieu 28.20). Luc 5 et Matthieu 9 nous rappellent que la mission de l’Église et des croyants ne saurait être partielle ou passive. Nous sommes appelés à annoncer l’Évangile à toutes les nations, dans tous les domaines, auprès de tous. Le pasteur David Jang et de nombreux serviteurs de Dieu s’efforcent de mettre concrètement en pratique ce message, en ne le considérant pas comme une simple « bonne parabole » ou un « enseignement édifiant ». Nous aussi, nous sommes conviés à entendre cet appel, là où nous sommes.

Certes, nous pouvons avoir peur. Comme Pierre, nous pouvons penser : « Nous avons déjà tout essayé, nous n’avons rien pêché. » Ou nous pouvons être tentés de croire que « le moment n’est pas favorable », ou encore qu’« il n’y a plus de place pour l’Église dans ce monde ». Pourtant, Jésus nous ordonne encore de jeter le filet en eau profonde, nous assurant qu’il y a une grande moisson à faire et que nous devons être ces ouvriers. Face à ce commandement, imitons Pierre qui reconnaît : « Je suis un homme pécheur », tout en se relevant avec l’aide de la grâce divine.

Le pasteur David Jang appelle l’Église à ne pas rester figée sur les souvenirs d’anciens réveils (revivals) ou sur la croissance quantitative du passé, mais à prêcher l’Évangile avec confiance dans les nouvelles générations. Dans ce temps de bouleversements culturels et technologiques, beaucoup connaissent l’échec et l’amertume du « filet vide ». C’est à ce moment précis que l’Église doit entrer dans les profondeurs de l’âme humaine pour y apporter la « source d’eau vive », Jésus, et annoncer la liberté aux âmes privées de berger. C’est un travail difficile et effrayant parfois, mais Jésus nous donne l’assurance de son autorité et de son accompagnement.

Relire ces passages aujourd’hui nous oblige à reconsidérer l’urgence du salut des âmes et la mission qui nous est confiée. Luc 5, « pêcheurs d’hommes », Matthieu 9, « la moisson est grande », et Matthieu 28, « la Grande Commission », ne sont pas des textes distincts mais un ensemble cohérent. L’Église doit saisir cette vocation grandiose, former des ouvriers, se rendre présente dans le monde. Lorsque la parole « Tu seras pêcheur d’hommes » s’applique à chaque croyant et à chaque assemblée, les filets vides se remplissent soudainement. Quand vient le temps de la moisson, les brebis sans berger retournent à Jésus, et le Royaume de Dieu s’implante concrètement parmi nous. Cet accomplissement n’est pas le fruit d’un exploit humain, mais se produit « sur la parole du Seigneur » et par l’obéissance.

C’est pourquoi nous devons revenir à la question fondamentale : « Pourquoi l’Église existe-t-elle ? » Jeter le filet pour les poissons, récolter le blé dans le champ, sont deux manières de parler du même objectif : sauver des âmes. Si l’Église s’égare et néglige ce but essentiel, elle s’engage sur la voie de la sécularisation. Alors, le culte devient un simple rituel, le service une forme d’autosatisfaction et la communion un club fermé. Mais si nous prêtons l’oreille à l’appel : « Avance en eau profonde et jetez vos filets », et si nous répondons « présent » quand Jésus nous dit : « La moisson est grande, mais il y a peu d’ouvriers », nous pourrons avancer sans relâche. Comme Pierre un matin en Galilée, nous entendrons la voix du Maître, et nous serons émerveillés de voir nos barques se remplir de poissons.

Tout au long de cette route, nous nous souvenons que Jésus a promis : « Je suis avec vous tous les jours, jusqu’à la fin du monde » (Matthieu 28.20). Malgré notre faiblesse ou nos peurs, du moment que nous avançons avec le Seigneur, nous pouvons vraiment devenir pêcheurs d’hommes, porter la voix du bon Berger aux brebis perdues, et accomplir la Grande Commission jusqu’aux extrémités de la terre. Le pasteur David Jang, comme tant d’autres saisis par cette parole, continue d’« avancer en eaux profondes » partout dans le monde. Puisse chacun de nous vaincre sa crainte et rejoindre cet ordre de mission du Seigneur.

C’est là le message que nous livre aujourd’hui Luc 5.1‑11 et Matthieu 9.35‑38. D’un côté, l’image du pêcheur, de l’autre, celle de la moisson. Nous comprenons ainsi pourquoi l’Église et les croyants doivent s’engager sans relâche dans l’œuvre du salut des âmes. Si nous ne perdons pas de vue cet objectif, l’Église demeurera le sel de la terre et la lumière du monde. Lorsque « le serviteur fidèle et prudent » (Matthieu 24.45) donne à chacun au temps convenable la nourriture dont il a besoin, ceux qui étaient « comme des brebis sans berger » trouveront le chemin du vrai Berger qu’est Jésus. Alors résonnera la joie de la moisson. « Avance en eau profonde et jetez vos filets » : que ces mots frappent à la porte de nos cœurs, et que la voix du Seigneur : « La moisson est grande, mais il y a peu d’ouvriers » réveille l’Église. Puissent ces paroles être pour nous, individuellement et collectivement, un point de départ vers une nouvelle ère.

www.davidjang.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