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신앙의 회복 – 장재형목사

장재형목사

1. 예루살렘 마가의 다락방, 부활신앙의 현장

예루살렘의 마가의 다락방은 기독교 교회사에서 특별한 의미를 가진 공간이며, 동시에 오늘날 교회 공동체에 깊은 영적 통찰을 주는 장소로 잘 알려져 있다. 이 다락방은 사도행전 1장부터 2장으로 이어지는 매우 중요한 장면의 무대가 되는데, 바로 여기서 초대교회의 태동과 성령 강림 사건이 일어났다고 전해진다. 또한 그 시작점인 사도행전 1장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지상 사역을 마무리하시는 시점, 즉 승천 직전 제자들에게 마지막 당부와 약속을 주신 사건이 기록된 장면이다. 그리고 이 다락방은 단지 물리적 공간의 개념을 넘어, ‘초대교회가 두려움 속에서도 예루살렘 한복판에 모여 역사적 변화를 일으킨 상징적 장소’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장재형 목사는 이 장면을 가리켜 “비록 제자들이 공포와 두려움에 떨고 있었지만,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약 40일 동안 그들을 직접 찾아오셔서 다시 세우시고, 믿음을 불어넣어 주신 뒤 예루살렘으로 모이게 하셨다”라고 설명한다. 제자들은 갈릴리까지 흩어졌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서야 비로소 “부활신앙”으로 무장되어 예루살렘에 돌아올 수 있었다. 이는 신앙공동체 안에서 부활이 어떠한 힘을 발휘하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이며, 그 출발점에 마가의 다락방이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왜 굳이 예루살렘이어야 했을까? 예수님께서 잡히시고, 거기서 처형되셨던 도시가 예루살렘이다. 제자들에게는 몹시도 두렵고 참혹한 기억이 남은 곳이었을 것이다.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후, 그분을 따르던 많은 이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주님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려라”(행1:4-5)는 말씀을 직접 주심으로써, 제자들이 오히려 가장 위험하고 두려운 지역에 다시 모이게 하셨다. 장재형 목사는 이를 “하나님의 역사는 늘 우리의 기대와 상식을 뛰어넘는다. 부활신앙이란, 가장 절망적인 곳에서 가장 소망을 전하는 힘을 발휘할 때 드러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부활신앙의 특징은, ‘죽음이 끝이 아니다’라는 확신에 있다. 제자들이 한때는 ‘주님이 처형당했고, 이제 우리도 붙잡혀 죽을 것’이라는 두려움 속에 주저앉았으나, 예수님께서 실제로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다시 살아나신 모습을 보고 “죽음 그 너머의 새로운 시대”를 경험한 것이다. 그래서 사도행전 1장 3절에서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40일 동안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셨다”고 증언한다. 여기서 “하나님 나라의 일”이란 단지 막연한 종말론이나 철학이 아니라, 지금 현실에서 교회가 어떤 능력으로 세워져야 하고, 어떻게 전진해야 하는지에 대한 구체적 방향을 포함한다. 그 핵심 중 하나가 “너희는 예루살렘에서부터 출발하라”는 말씀이다.

장재형 목사는 “사람이 가장 약해지고 넘어졌던 곳에서 다시 회복하는 역사를 ‘부활신앙의 실제’라고 정의할 수 있다”고 말하며, 이것이야말로 예루살렘 마가의 다락방이 주는 교훈이라 강조한다. 처음에 제자들이 이 다락방에 모였을 때, 그 분위기는 지극히 숨죽인 상태였을 것이다. 십자가 사건 직후, 예수님의 시신이 무덤에 안치되었고, 지도층은 예수님의 잔당까지 모조리 소탕하려는 기세가 등등했다. 그렇기에 그 다락방은, ‘잠깐 모여서 기도하는 안전한 은신처’ 정도로 활용되었을 수 있다. 그러나 주님은 “그곳에서 멈추지 말고 기다리라. 멈추어 서 있으라는 의미가 아니라, 성령을 받을 때까지 머물라는 것”이었다. 마가의 다락방이 이처럼 ‘무력한 도피처’에서 ‘능력의 발원지’로 바뀌게 된 것은 바로 성령 강림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곧 성령이 임하심으로(행2장), 그들은 더 이상 두려움 속에 숨은 제자들이 아니었다. 공포의 공간이던 다락방이 부활의 확신과 성령의 능력이 임하는 현장이 되자, 제자들은 그곳을 떠나 예루살렘 거리로 나아가 담대히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 장재형 목사는 “부활이 교리로만 남아 있다면 의미가 없지만, 부활신앙이 실제 삶을 뒤엎는 능력이 될 때, 사람들이 마침내 예루살렘성 안에서조차도 두려움을 뛰어넘어 행동하는 변화를 보게 된다”라고 역설한다.

이런 ‘행동하는 신앙’은 곧 사도행전 전반에 드러난다.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사마리아와 온 유대, 그리고 땅끝에 이르는 역사적 복음 전파의 여정이 펼쳐지는 것이다. 신앙이 행동으로 이어진 가장 첫 번째 장면은 사도행전 2장 오순절 사건에서 드러나듯, 골방에 숨어 있던 이들이 거리로 나아가 복음을 선포하고, 하루에 수천 명이 회개하고 세례받는 장관이 펼쳐진 것이다. 그 발화점이 바로 마가의 다락방이었다.

한편, 이 다락방은 “교회의 모태” 또는 “교회의 자궁”으로 비유되기도 한다. 그 이유는 새 시대가 마치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는 것처럼,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확신과 성령 강림으로 인해 실제로 ‘새로운 공동체’가 그 안에서 잉태되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아직 지상에 계실 때는, 제자들은 말씀을 배우며 동행하는 수학(修學) 단계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성령이 임하신 이후, 제자들은 ‘교회 공동체의 기둥’으로서 스스로 복음을 확장해나가는 주체가 되었다. 다락방은 그 전환점의 심장부였고, 그 동력이 곧 부활신앙이었다.

요한복음 21장에서 베드로의 회복 장면을 떠올려보면, 제자들이 어떻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고, 또 어떻게 다시금 사명을 확인하며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순종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 부인한 이후, 주님께서 그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세 번 묻고, 베드로가 그 사랑을 고백함으로써 비로소 무너진 자기 자신을 끌어안고 ‘반석’(베드로)으로 거듭 태어난다. 장재형 목사는 이 장면에 대해 “교회가 특정 프로그램이나 조직력으로 움직이지 않고, 결국 그 근본 동력은 ‘주님을 향한 사랑’에서 출발한다. 그 사랑은 곧 주님의 부활하심에서 기인하고, 우리를 품어주신 그 은혜를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할 때에야 견고해지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마가의 다락방 역시 이와 같은 ‘고백’과 ‘회개’와 ‘믿음’의 집합체였다. 부인했던 제자들, 뿔뿔이 흩어졌던 제자들이 다시 돌아와 하나의 공동체가 되고, 절망을 넘어서는 용기를 내어 모일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의 부활과 성령의 약속 때문이었다. “마태복음 26장 이하에 기록된 예수님의 고난 현장과, 요한복음 21장 갈릴리로 돌아간 제자들의 모습, 그리고 사도행전 1장의 예루살렘으로의 귀환이 한 줄로 연결될 때, 비로소 부활신앙이 오늘날 교회에 실질적 메시지를 준다”고 장재형 목사는 거듭 강조한다.

이렇듯 예루살렘 마가의 다락방은 결과적으로 ‘두려움에서 대담함으로, 흩어짐에서 모임으로, 수치와 부인에서 회개와 고백으로’ 전환하는 현장이 되었다. 오늘날 교회가 이 점을 깊이 묵상할 필요가 있는데, “교회가 어느 시점부터 사회적 지탄이나 박해의 두려움 속에 숨어만 있는다면, 다시 마가의 다락방에 임한 성령의 불꽃이 필요하다”는 메시지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부활신앙의 현재적 적용이기도 하다. 죽음을 깨뜨리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마치 여전히 우리와 함께하듯 교회를 세우시고, 그 교회가 세상 한복판에서 담대히 복음을 전하도록 지지해주신다는 사실을 붙들 때, 우리는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땅끝까지” 이르는 길을 기쁨으로 갈 수 있다.

이 모든 맥락에서 장재형 목사는 “마가의 다락방을 단지 역사적 장소로만 여기지 말고, 현재의 교회마다 자기만의 다락방을 회복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것이 곧 ‘성령의 임재를 사모하고 기도하는 자리’일 수도 있고, ‘부활신앙을 함께 붙들고 고백하는 자리’일 수도 있다. 다락방에 모여 기도한다는 것은, 내부적으로 숨는 행위가 아니라 “거기서 능력을 받아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한 최종 준비”라는 점이 핵심이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가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행1:5)고 하셨듯, 그런 약속이 ‘다락방’에서 성취되었기에, 초대교회는 결코 사라지지 않고 전 세계로 뻗어나갔다.

2. 맛디아의 선택, 유다의 빈자리를 메우는 교회의 회복

사도행전 1장 후반부에서 제자들은 열두 번째 사도의 자리를 새롭게 채우는 사건을 맞이한다. 부활절을 지나 오순절로 향하는 그 사이, 가장 큰 이슈 중 하나가 “예수님이 열둘 중에 한 사람으로 부르셨던 가룟 유다의 배신과 그 후속 처리를 어떻게 할 것인가”였다. 유다는 예수님을 은 삼십에 팔아넘긴 뒤,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 그뿐 아니라, 그는 불의한 삯으로 밭을 산 뒤 거기서 몸이 떨어져 장기가 터져 죽었다는 기록(행1:18)으로 인해 “핏값의 비극”을 상징하는 인물이 되었다.

장재형 목사는 유다의 비극을 “가장 가까운 자리에 있던 사람이 오히려 가장 큰 범죄를 저지른 사건”이라고 표현한다. 유다는 제자 공동체 안에서 돈궤를 맡던 자였으니, 사실상 재정을 관리하고 봉사하는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교회도 마찬가지로, 재정을 맡고 봉사하는 자리가 때로는 은혜가 충만해야 할 중요한 자리가 되지만, 동시에 사탄의 유혹과 시험이 들어오기 쉬운 통로가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공동체를 운영하기 위해 돈이 필요하고, 이 돈이 때로는 세속적인 이익이나 욕망을 건드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경은 교회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딤전6:10)고 거듭 경계하고, 초대교회가 “모든 재산을 서로 통용하며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었다”(행2:45, 4:34)고 기록함으로써, 물질에 얽매여 부패하지 않도록 초점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유다는 물질적 욕심과 정치적 계산이라는 틈을 통해 사탄에 의해 쓰임받아, 결국 예수님을 팔아넘기는 배신자가 되었다. 그는 배신 직후 뒤늦은 후회를 했지만, 제대로 된 회개에 이르지 못하고 극단적 선택으로 생을 마감함으로써, ‘제자 중 하나를 잃었다’는 뼈아픈 상처를 교회에 남겼다. 열두 제자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상징하는 영적 기둥이었고, 주님이 친히 세우신 “새로운 언약 공동체의 문”과 같았다. 그 한쪽 문이 무너졌으니, 이 문을 다시 세우는 작업이 시급했을 것이다.

이에 사도행전 1장에서는 그 공석을 채우기 위한 회의가 열린다. 여기서 초대교회는 새롭게 사도의 자리를 메울 인물을 뽑는데, 그것이 바로 맛디아다. 그 과정을 눈여겨보면, 교회의 위기 대처 방식이 어떠했는지 배울 수 있다. 사도행전 1장 21~22절에서 베드로는 이렇게 제안한다. “이 일, 곧 우리와 함께 다니면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증인이 될 사람을 찾아야 한다. ‘요한의 세례’로부터 주님이 승천하시는 그 날까지 우리와 늘 함께하던 사람 중 하나를 세우자.” 그 결과, 두 사람이 후보에 올랐고, 초대교회는 그 자리에서 제비를 뽑아 맛디아를 선택했다.

장재형 목사는 여기서 주목할 몇 가지 포인트를 제시한다. 첫째, 초대교회가 “부활의 증인”을 최우선 자격 요건으로 삼았다는 점이다. 교회가 존재하는 목적은 부활하신 주님을 증거하기 위함이므로, 사도의 핵심 사명 역시 부활의 소식을 전하는 일이었다. 맛디아를 비롯해 후보가 되었던 사람들은 이미 예수님의 공생애와 고난, 죽음, 부활까지 전 과정을 옆에서 지켜본 사람들로, 사실상 열두 사도와 함께 늘 다니며 배웠던 이들이었다. 둘째, 선택 과정에서 보이는 공동체적 합의와 기도, 그리고 제비뽑기가 인상적이다. “모든 사람의 의견과 교회의 합의가 중요했고, 마지막 단계에서 하나님의 주권적 결정에 운명을 맡기는 방식”을 택했다. 이는 교회가 단지 인간적 계산이나 정치적 타협으로 리더를 뽑지 않음을 시사한다. 셋째, 이렇게 뽑힌 맛디아가 이후 교회에서 어떠한 능력을 나타냈는지에 대한 기록 자체는 성경에 길게 남아 있지 않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열두 제자가 온전히 회복되어 다시 오순절 성령 강림을 맞이할 준비가 완료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 선택의 과정이 중요할까? 교회가 성령이 임하기 직전 가장 먼저 한 일이 바로 “지도자 팀(사도단)을 회복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유다가 만들어낸 공백과 배신으로 인한 상처를 치유하지 않고서는 교회가 온전히 하나가 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사람의 마음 속에는 여전히 “우리 중 하나가 주님을 배반했다”는 배신감이 남아 있었고, 그 가운데 제자들은 서로를 향한 신뢰 회복이 시급했다. 또한 각자 흩어졌던 제자들이 다시 예루살렘에 모여 함께 기도하면서, “이제는 다시는 그런 배신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라는 단단한 결속을 다져야 했다.

장재형 목사는 “교회 안에 생겨난 상처, 지도자의 배신이란 것이 얼마나 공동체를 무너뜨릴 수 있는지, 유다의 사건이 상징적으로 보여준다”라고 지적한다. 그렇기에 초대교회는 가룟 유다의 사건을 단순히 잊어버리거나 덮어두지 않고, 아예 교회 첫 발을 내딛는 시점에 투명하게 정리하고 넘어갔다. 유다가 남긴 핏값의 돈은 성전에 던져졌고, 그것으로 ‘피밭’을 샀다는 사실(마27:5-8)이 공공연히 드러났다. 교회는 이 부끄러운 역사를 숨기지 않고, 되레 예언(예레미야나 시편)에 입각하여 “이 일이 예언이 성취되는 과정의 일부”라고까지 받아들이며, 공동체 전체가 한 목소리로 기도하고 새 인물을 임명했다.

그리하여 맛디아가 사도의 자리를 이어받게 되었다. 교회는 다시 열두 사도의 틀을 회복하고, 그 안에서 더욱 공고해진 영적 유대감 속에 오순절 성령 강림을 맞이했다. 그리고 그 성령의 힘을 입은 사도들은 예루살렘을 기점으로 온 유대와 사마리아를 넘어 땅끝까지 복음을 확장해 나가게 된다. 만일 유다의 배신과 죽음으로 인해 생긴 내분과 상처를 방치했다면, 교회가 출범하기 전부터 붕괴될 위험이 컸을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그 상처를 드러내어 해결하고, 회복의 과정을 공적으로 선포함으로써, 교회가 더욱 성숙한 모습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또 다른 관점에서 유다의 실수와 죽음은, 초대교회에 ‘결코 그 누구도 이 길에서 방심해서는 안 된다’라는 경각심을 심어주었다고 볼 수 있다. 예수님을 직접 3년간 따라다니고, 기적과 말씀을 접하며, 심지어 돈궤를 맡겨질 정도로 신뢰받던 인물조차 무너질 수 있다는 사실은, 교회 구성원 누구든지 시험에 드는 위험이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 준다. 장재형 목사는 이 대목에 대해 “현대 교회 리더십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한 사람이 아무리 뛰어나 보여도, 끊임없이 말씀과 성령으로 자신을 살피고 깨어 기도해야 한다. 그리하지 않으면, 사단은 언제든지 우리를 미끼로 삼을 수 있다”라고 경고한다. 교회사는 배신과 타락의 역사가 결코 적지 않았다. 그러나 동시에, 그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인물(맛디아 같은)을 세워 교회의 빈 자리를 메우고, 역사를 이어 가셨음을 우리는 본다.

그렇다면 오늘날 교회가 맛디아의 선택 사건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점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첫째, 교회가 공동체적 합의와 기도 가운데 가장 중요한 지도자 자리를 채워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단순히 능력·명성·정치력을 보고 지도자를 세워서는 안 되며, “부활신앙을 확실히 붙들고 있는가?” “주님과 함께해 온 시간이 있는가?” “주님의 고난·죽음·부활을 옆에서 목격하고, 자기 삶으로 간증할 수 있는가?”라는 핵심 신앙 고백이 훨씬 중요하다. 둘째, 지도자의 배신 또는 교회 안의 큰 상처가 생길 때마다, 그것을 단지 ‘개인의 비극’으로 덮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가 아파하며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를 기도와 말씀 속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유다가 무너진 뒤, 초대교회가 그를 강렬히 비난하는 데 시간을 보내지 않고, 주님의 말씀과 예언을 찾아 연구하며, 거기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새로운 길’을 열어간 자세는 배울 점이 많다. 셋째, 이 모든 회복 과정은 궁극적으로 ‘성령 강림’에 집중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교회가 왜 굳이 이 사건을 성령 임재 이전에 다뤘겠는가? 바로 오순절 성령을 받을 수 있는 온전한 상태로 자신들을 준비해야 했기 때문이다. 불의와 혼란이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성령의 큰 역사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장재형 목사는 “교회가 성령의 역사, 부흥, 성장 등을 말하기 전에, 먼저 내부의 죄와 불의를 다루는 과정을 진지하게 거쳐야 하며, 지도자들의 무너짐이 있다면 그것을 은폐하지 말고 진정으로 치유하는 길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유다에게서 벗어나 맛디아를 세운 것이 “하나의 상징”이라면, 곧 ‘교회는 그 어떤 큰 상처를 당해도,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반드시 회복의 길을 찾는다’는 메시지를 준다. 물론, 유다는 원천적으로 ‘버려진 자’가 아니라, 스스로 길을 선택해 그 길로 나아갔다가 영원한 비극을 맞이한 것이다. 교회가 누구를 불문하고 회복과 구원의 길로 초청하지만, 개인이 끝까지 거부하면 비극은 일어난다. 교회는 그런 비극을 무조건 덮는 대신, 회개와 갱신의 동력을 찾아 새로운 길을 내야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부활신앙”이 핵심 저력으로 작용한다.

부활신앙은 “죽음을 끝장내고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것이다. 유다는 예수님을 죽게 만든 장본인이었고, 그 뒤에 찾아온 죄책감에 무너져 갔지만, 예수님은 부활하심으로 “생명의 길”을 열어놓으셨다. 가룟 유다의 배신이 교회에 남긴 충격과 공포는, 예수님의 부활로 인한 소망에 의해 극복될 수 있었다. 맛디아가 그 빈자리를 메꾸었을 때, 열두 제자는 다시 하나가 되어 성령을 기다렸고, 곧 교회에 불처럼 임한 성령으로 인해 예루살렘에 담대히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했다. 사도행전 1장에서 4장까지 읽어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수비대를 비롯한 종교 권력 앞에서도 두려움을 느끼지 않고 “예수 이름 외에 구원 받을 다른 이름이 없다”(행4:12)고 선포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때의 베드로는 “닭 울기 전에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던 베드로”가 더 이상 아니다. 그는 마가의 다락방에서 회복된 자, 성령 받은 자, 그리고 맛디아와 함께한 “온전한 사도단”의 대표가 되어 버젓이 복음을 외친다. 여기에는 “무너져버린 지도자 한 사람의 자리마저도 하나님께서 회복시키셨다”는 강력한 메시지가 담겨 있다.

장재형 목사는 “유다를 잃고 맛디아를 얻은 교회가 ‘피투성이가 된 상처’를 치유받은 것처럼, 교회도 끊임없이 옛 상처와 고통을 치유받으며 새 술 부대를 채워야 한다”고 말한다. 초대교회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현대 교회도 각종 분쟁·부패·배신 같은 사건을 겪을 때가 많으며, 그때마다 어떻게 ‘새로운 맛디아’를 세워서 공동체를 정돈하고 성령의 역사를 받을 것인지를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는 “성령을 통해 새로운 시대를 여는 공동체”이며, 동시에 “배신과 회개, 죽음과 부활, 좌절과 회복”이라는 수많은 교차점을 통과해가며 성장한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죽음을 재촉했고, 맛디아는 그 빈자리를 메우며 복음의 문을 확장했다. 베드로는 부인하고 도망갔으나, 다시 예수님께서 찾아오셔서 요한복음 21장에서 그의 사랑을 회복시키셨고, 사도행전에서 가장 먼저 설교를 펼치는 지도자로 세우셨다. 이렇게 사도들의 재정비가 끝나고, 초대교회는 마가의 다락방이라는 공간에서 성령이 임하는 장관을 경험한다. 그 성령이 임한 순간부터 교회는 더 이상 숨어 있지 않고 거리로 나가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했고, 이내 예루살렘이 발칵 뒤집혔다.

오늘날도 교회가 같은 경험을 할 수 있을까? 장재형 목사는 “당연히 가능하다. 다만, 그 조건은 오늘날 교회가 부활신앙의 실제적 파워를 믿고, 내부의 문제(배신·부패·불신)를 회개와 기도로 해결하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온전히 구하는 데 달렸다”고 주장한다. 마가의 다락방과 맛디아의 선택은, 교회가 어떻게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을 실제 삶에서 체험하고, 어떠한 방식으로 공동체 안의 갈등과 상처를 극복하여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부활신앙으로 대표되는 기독교의 핵심은 “이 땅의 죽음, 절망, 실패가 결코 마지막이 아니다”라는 믿음이다. 가룟 유다라는 절망적 사례가 있어도, 교회는 맛디아를 통해 복음 전파의 긴 역사를 이어 간다. 우리가 때로는 베드로처럼 주님을 부인하고 죄책감 속에 살지라도, 요한복음 21장처럼 주님이 친히 우리를 다시 찾아오시고 회복시킨다. 그 은혜가 우리를 예루살렘 마가의 다락방으로 이끌어, 무기력한 상태가 아니라 담대한 성령의 능력을 입어 세상 한복판으로 나가도록 만든다.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 초대교회는 결국 사도행전 28장 마지막 절에서 “금하는 사람이 없었다”라는 당당한 선포로 마무리한다. 복음 전파를 막을 수 없었다는 뜻이다. 바울은 로마의 옥중에서도 복음을 전했고, 베드로는 역사의 기록에 따르면 거꾸로 십자가에 달리는 순교로 사명을 마무리했으나, 그의 뒤를 잇는 수많은 제자들이 또다시 교회의 빈 자리를 채워나갔다. 이처럼 교회는 주기적으로 흔들리고 넘어질지라도, 부활신앙과 성령의 능력 안에서 새롭게 일어선다.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이 무너져도, 하나님께서는 사도직을 회복하고, 땅끝까지 이어지게 하는 방법을 갖고 계신다.

맛디아의 선택은 바로 이 ‘회복’과 ‘전진’의 두 가지 정신을 모두 아우른다. 교회가 내부의 상처를 치유하고, 부활신앙에 기초하여 더 큰 비전을 향해 나아가는 출발점이 되는 것이다. 이 메시지는 오늘날도 여전히 유효하고, 교회 지도자들마다 사역 현장에서 다양한 갈등과 문제를 마주할 때마다, “초대교회는 어떻게 이 난관을 돌파했나?”를 돌아보면, 결국 그 답은 “부활신앙의 견고한 고백과 성령의 임재를 기다리는 기도, 그리고 투명한 공동체적 절차”에 있음을 깨닫게 된다.

장재형 목사는 이를 정리하며 말한다. “부활은 능력이다. 그 능력은 우리 마음 안에 역사할 때, 사람을 살리고, 교회를 살리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운다. 아무리 큰 배신자가 있어도, 그 배신을 넘어 교회는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는 회복과 새 출발의 길을 찾게 된다. 유다의 실패가 교회 역사의 종말을 뜻하지 않았듯이, 오늘날 우리가 맞닥뜨리는 어떠한 큰 상처도 하나님 나라의 약속을 소멸시키지 못한다.”

바로 이 지점이 “예루살렘 마가의 다락방과 맛디아의 선택”이 하나로 연결되는 결정적 이유다. 마가의 다락방은 숨죽이고 숨어 있던 제자들이 성령 강림을 경험한 뒤 세상으로 나가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한 발화점이라면, 맛디아의 선택은 사도 중 한 사람의 배신과 죽음을 넘어서 교회가 다시 ‘온전한 공동체’로 거듭나는 장면이다. 두 이야기는 “교회 안의 배신·부인·두려움이, 주님의 부활과 성령의 임재로 말미암아 어떻게 회복과 능력의 역사로 바뀌는가”를 종합적으로 보여준다. 여기에는 슬픔과 회환이 섞여 있지만, 더욱 강력한 하나님의 은혜가 깃들어 있다. 그 결과, 초대교회는 예루살렘을 넘어 땅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는 길로 분연히 일어설 수 있었다.

오늘날 교회도 마찬가지다. 어떤 지역 교회나 공동체가 마치 마가의 다락방처럼 ‘현대적 의미의 다락방’을 회복해 부활신앙으로 충만해진다면, 그리고 가룟 유다가 남기고 간 상처를 맛디아의 선출처럼 투명하고 말씀에 충실한 방식으로 치유한다면, 성령의 새 역사를 기대할 수 있다. 오순절 사건이 2000년 전 어느 한 장소에서만 일어난 ‘역사적 일회성’이 아니라, 모든 시대와 지역의 교회가 체험할 수 있는 하나님의 운동인 것이다.

이러한 가르침은 장재형목사가 줄곧 강조해온 “부활신앙의 실천성”과 맞닿아 있다. 성경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지적(知的)으로만 받아들이고 말면, 그것은 단순한 교리에 그친다. 그러나 초대교회는 이 부활을 실제 삶의 원동력으로 삼아, 배신이나 고난, 죽음이나 절망도 더 이상 끝이 아님을 시연해 보였다. 베드로와 사도들이 예루살렘 한복판에서 자신들을 죽이려 했던 세력들에게도 담대히 복음을 전하는 모습은, 부활이 얼마나 실재적이고 폭발적인 힘을 발휘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므로 “교회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예루살렘 마가의 다락방에서 시작되어, 가룟 유다의 배신을 맛디아의 선출로 회복하고, 성령 강림을 통해 전 세계로 나아간 공동체”라고 답할 수 있다. 그 정체성은 역사의 시공간을 넘어 오늘도 유효하며, 교회가 부활신앙을 지키는 이상 결코 문이 닫히지 않는다. 때로 교회 내부에 치명적인 균열이 일어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인물을 세워 그 자리를 회복시키시고, 또다시 성령을 부어주신다. 이것이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로마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전 세계에 이르기까지” 이어지는 복음의 연속성이자, 현대 교회가 이어받아야 할 믿음의 유산이다.

장재형 목사의 결론적인 권면도 여기에 맞닿는다. “우리는 현재적 다락방을 회복해야 하며, 배신과 실패가 일어날 때마다 그것을 덮는 대신 진실하게 회개하고 투명하게 해결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 출발의 기회를 붙잡아야 한다. 그 중심에는 ‘부활의 주님’이 계시고, 그분이 교회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선교적 사명이 놓여 있다.” 교회가 이 길에 순종할 때, 사도행전의 역사는 중단되지 않고 계속 펼쳐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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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ospel and the Church’s Calling as Seen in Pastor David Jang’s Sermons on Colossians — Olivet University

When we look up at Michelangelo’s The Creation of Adam, humanity appears infinitely small, yet at the same time inexplicably noble. On the ceiling of the Sistine Chapel, the fingertip of God reaches toward Adam, while Adam’s hand, not yet fully touching His, waits for the moment of life. In that brief gap lies not the story of humanity reaching God by its own power, but the mystery of grace in which God first draws near to humanity.

The gospel proclaimed in Colossians 1 begins precisely there. Paul introduces himself as “Paul, an apostle of Christ Jesus by the will of God.” This is not merely the opening sentence of a letter. It is a theological declaration that reveals where the church and believers come from, upon whose will they stand, and for what purpose they have been called. This is also the central point held by the sermons on Colossians preached by Pastor David Jang, founder of Olivet University in the United States. The church is not built upon human enthusiasm or organizational ability, but upon the will of God and the calling of Jesus Christ.

When the Calling Is Lost, the Church Loses Its Direction

Paul addresses the church in Colossae as “faithful brothers and sisters in Christ.” The Colossian church was not a church Paul had personally founded, yet it was a community that shared the same life in the gospel. This fact shows that the essence of the church does not lie in the influence of a particular person or the size of a region. The church truly becomes the church when it stands upon the truth of the gospel.

The reason today’s church often wavers can also be found here. Before asking what more it should do, the church must first ask why it exists. Even when programs are many and activities are lively, if its identity becomes blurred, the church turns into an organization no different from the world. On the other hand, even if it appears small and weak, a community that knows who it is in Christ does not easily collapse.

At this point, Pastor David Jang strongly emphasizes the identity of believers and the church. If the question, “Who am I, and for what purpose have I been called?” is not clear, faith can easily be swept away by emotions or atmosphere. But when there is the conviction that one has been called by the will of God, faith becomes the center of life, and obedience becomes not a burden but a direction.

Faith, Love, and Hope Give Breath to the Church

Paul says that whenever he prays for the church in Colossae, he gives thanks. The reason for his thanksgiving is their faith, their love for all the saints, and the hope stored up for them in heaven. Faith, love, and hope are not merely beautiful religious expressions. They are evidence that the gospel is truly alive and moving within a community.

Faith is the strength that holds fast to Christ. Love is the way that faith flows toward others. Hope is the conviction that present suffering and confusion do not have the final word. When these three are alive, the church gains depth beyond outward appearance and life beyond size. Conversely, when these three grow weak, no matter how much the church possesses, its soul begins to dry up.

The gospel does not end with hearing. Paul speaks of a life that bears fruit after hearing and understanding the word of truth, the gospel. The same is true of Bible meditation. Knowing the Word alone is not enough. The Word must pass through the heart and descend into life, and grace must move beyond thought to become the practice of love.

When Christ Becomes Small, the Gospel Becomes Blurred

At the deepest center of Colossians is the absolute lordship of Jesus Christ. Paul proclaims Christ as the image of the invisible God and the One who is before all things. This is a clear answer to every tendency that seeks to reduce Jesus to merely a great teacher or moral example. At the center of the gospel are always the cross and resurrection of Christ, and His divinity.

The moment the church loses its way is usually the moment Christ is pushed out of the center. Sometimes worldly success takes His place. At other times, human calculation and desire replace Him. Sometimes legalism obscures grace, while at other times cheap freedom weakens repentance and holiness. Colossians exalts Christ so that the church will not lose the purity of the gospel.

The theological insight emphasized by Pastor David Jang is closely connected to this flow. The church must not only confess Christ as its head, but also obey His lordship in its actual ministry, decision-making, and way of life. When worship and education, mission and service, finances and community life all come under the reign of Christ, the church finally reveals an order different from that of the world.

The Hope Stored Up in Heaven Changes Life on Earth

Even while Paul was in prison, he prayed for the church in Colossae and confessed that the gospel was bearing fruit and growing throughout the whole world. This shows that the gospel is not a local religious sentiment, but the life of God expanding toward the world. The church is not a closed refuge that remains within itself, but a community that carries the gospel and goes out into the world.

The vision of the church reflected in Pastor David Jang’s sermons is found here as well. The church is both the guardian of the gospel and the messenger of the gospel. Inwardly, it must be built up through the Word and prayer. Outwardly, it must flow into the world through love and mission. In the Holy Spirit, believers must pray for one another, share love in real and practical ways, and bear the fruit of the gospel in the world.

In the end, the question Colossians leaves for us today is not simple. Are we truly honoring Christ as the head of the church? Is our faith being revealed through love? Is our hope stored up in heaven while also renewing our lives today?

The gospel is not an old doctrine, but a living life. That life becomes understanding in those who hear it, obedience in those who understand it, and fruit in the community that obeys. This is also the path the church must hold onto again today: returning not to more splendid words, but to a deeper gospel; not to a larger outward form, but to the clearer lordship of Christ. In that quiet place of restoration, our faith once again waits for the life of grace, like Adam’s hand awakening toward the fingertip of G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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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e pasteur David Jang (Olivet University) : l’Évangile et la vocation de l’Église à la lumière de ses prédications sur l’Épître aux Colossiens

Lorsque l’on lève les yeux vers La Création d’Adam de Michel-Ange, l’être humain paraît infiniment petit, tout en semblant en même temps inexplicablement précieux. Sur le plafond de la chapelle Sixtine, le doigt de Dieu se tend vers Adam, tandis que la main d’Adam, sans encore le toucher pleinement, attend l’instant de la vie. Dans ce court intervalle se trouve non pas l’histoire d’un homme qui parvient de lui-même jusqu’à Dieu, mais le mystère de la grâce par laquelle Dieu s’approche le premier de l’être humain.

L’Évangile transmis dans le chapitre 1 de l’Épître aux Colossiens commence précisément à cet endroit. Paul se présente comme « Paul, apôtre du Christ Jésus par la volonté de Dieu ». Cette phrase n’est pas une simple formule d’ouverture épistolaire. Elle est une déclaration théologique qui révèle d’où viennent l’Église et les croyants, sur la volonté de qui ils se tiennent, et dans quel but ils ont été appelés. Le cœur que retiennent les prédications du pasteur David Jang, fondateur d’Olivet University aux États-Unis, sur l’Épître aux Colossiens se trouve également là. L’Église n’est pas bâtie sur l’enthousiasme humain ni sur la capacité organisationnelle, mais sur la volonté de Dieu et sur l’appel de Jésus-Christ.

Lorsque l’Église perd son appel, elle perd sa direction

Paul appelle l’Église de Colosses « les frères fidèles en Christ ». L’Église de Colosses n’était pas une Église fondée directement par Paul, mais elle était une communauté qui partageait la même vie dans l’Évangile. Ce fait montre que l’essence de l’Église ne réside ni dans l’influence d’une personne particulière ni dans la taille d’une région. L’Église devient véritablement Église lorsqu’elle se tient dans la vérité de l’Évangile.

C’est aussi là que l’on peut trouver la raison pour laquelle l’Église d’aujourd’hui vacille si souvent. Avant de demander ce qu’elle doit faire de plus, elle doit d’abord demander pourquoi elle existe. Même si les programmes sont nombreux et les activités dynamiques, lorsque l’identité devient floue, l’Église se transforme en une organisation qui ne se distingue plus du monde. À l’inverse, même lorsqu’elle paraît petite et fragile, une communauté qui sait qui elle est en Christ ne s’effondre pas facilement.

Le pasteur David Jang souligne particulièrement, sur ce point, l’importance de l’identité des croyants et de l’Église. Si la question « Qui suis-je et pour quoi ai-je été appelé ? » n’est pas claire, la foi se laisse facilement emporter par les émotions ou par l’ambiance du moment. Mais lorsqu’il existe la certitude d’avoir été appelé par la volonté de Dieu, la foi devient le centre de la vie, et l’obéissance n’est plus une contrainte, mais une direction.

La foi, l’amour et l’espérance font respirer l’Église

Paul affirme qu’il rend grâce chaque fois qu’il prie pour l’Église de Colosses. La raison de cette gratitude était leur foi, leur amour envers tous les saints, et l’espérance qui leur était réservée dans les cieux. La foi, l’amour et l’espérance ne sont pas de belles expressions religieuses ; elles sont la preuve que l’Évangile est réellement vivant et à l’œuvre au sein d’une communauté.

La foi est la force qui s’attache au Christ. L’amour est la manière dont cette foi se répand vers les autres. L’espérance est la certitude que les souffrances et les confusions présentes ne constituent pas le dernier mot. Lorsque ces trois réalités sont vivantes, l’Église acquiert de la profondeur au-delà de son apparence extérieure, et reçoit la vie au-delà de sa taille. À l’inverse, lorsque ces trois réalités s’affaiblissent, même si l’Église possède beaucoup de choses, son âme se dessèche peu à peu.

L’Évangile ne s’arrête pas au simple fait d’être entendu. Paul parle d’une vie qui porte du fruit après avoir entendu et compris la parole de vérité de l’Évangile. Il en va de même pour la méditation biblique. Connaître la Parole ne suffit pas. La Parole doit traverser le cœur et descendre jusque dans la vie ; la grâce doit dépasser la pensée pour se manifester dans la pratique de l’amour.

Lorsque le Christ devient petit, l’Évangile devient flou

Au centre le plus profond de l’Épître aux Colossiens se trouve la souveraineté absolue de Jésus-Christ. Paul proclame que le Christ est l’image du Dieu invisible et le premier-né de toute la création. C’est une réponse claire à tous les courants qui cherchent à réduire Jésus à un simple grand maître ou à un modèle moral. Au centre de l’Évangile se trouvent toujours la croix et la résurrection du Christ, ainsi que sa divinité.

Le moment où l’Église perd son chemin est généralement celui où le Christ est repoussé hors du centre. Parfois, le succès selon le monde prend cette place ; parfois, les calculs et les désirs humains s’y substituent. À d’autres moments, le légalisme voile la grâce, tandis qu’une liberté bon marché obscurcit la repentance et la sainteté. Si l’Épître aux Colossiens élève le Christ, c’est afin que l’Église ne perde pas la pureté de l’Évangile.

L’intuition théologique soulignée par le pasteur David Jang rejoint également ce mouvement. L’Église ne doit pas seulement confesser le Christ comme sa tête ; elle doit aussi se soumettre concrètement à sa souveraineté dans son ministère, ses décisions et son mode de vie. Lorsque le culte, l’éducation, la mission, le service, les finances et la gestion communautaire se trouvent tous sous le règne du Christ, l’Église manifeste enfin un ordre différent de celui du monde.

L’espérance déposée dans les cieux transforme la vie sur la terre

Paul, bien qu’emprisonné, priait pour l’Église de Colosses et confessait que l’Évangile portait du fruit et grandissait dans le monde entier. Cela montre que l’Évangile n’est pas un simple sentiment religieux propre à une région, mais la vie de Dieu qui s’étend vers le monde. L’Église n’est pas un refuge fermé, replié sur lui-même ; elle est une communauté qui porte l’Évangile et s’avance dans le monde.

La vision de l’Église que présentent les prédications du pasteur David Jang se trouve également ici. L’Église est à la fois gardienne de l’Évangile et messagère de l’Évangile. Intérieurement, elle doit être édifiée par la Parole et la prière ; extérieurement, elle doit se répandre par l’amour et la mission. Dans le Saint-Esprit, elle doit prier les uns pour les autres, partager concrètement l’amour entre les saints, et porter les fruits de l’Évangile au sein du monde.

En fin de compte, la question que l’Épître aux Colossiens nous laisse aujourd’hui n’est pas simple. Reconnaissons-nous réellement le Christ comme la tête de l’Église ? Notre foi se manifeste-t-elle par l’amour ? Notre espérance, tout en étant déposée dans les cieux, renouvelle-t-elle notre vie d’aujourd’hui ?

L’Évangile n’est pas une doctrine ancienne, mais une vie vivante. Cette vie devient compréhension chez celui qui l’entend ; elle devient obéissance chez celui qui comprend ; et elle devient fruit dans la communauté qui obéit. Le chemin que l’Église doit de nouveau saisir aujourd’hui se trouve là : revenir non pas à des paroles plus brillantes, mais à un Évangile plus profond ; non pas à une apparence plus grande, mais à une souveraineté plus claire du Christ. Dans ce lieu de restauration silencieuse, notre foi attendra de nouveau la vie de la grâce, comme la main d’Adam s’éveillant vers le doigt de Die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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張ダビデ牧師(日本オリベットアッセンブリー教団)のコロサイ書説教から見る福音と教会の使命

張ダビデ牧師.

ミケランジェロの「天地創造」を見上げるとき、人間は限りなく小さく見えながらも、同時に言葉では言い表せないほど尊く見える。システィーナ礼拝堂の天井に描かれた神の指先はアダムへと伸ばされ、アダムの手はまだ完全には触れないまま、いのちの瞬間を待っている。その短い隔たりの中には、人間が自ら神に到達する物語ではなく、神が先に人間へと近づいてくださる恵みの神秘が込められている。

コロサイ書1章が伝える福音も、まさにその場所から始まる。パウロは自らを「神の御心によってキリスト・イエスの使徒とされたパウロ」と紹介する。この言葉は、単なる手紙の冒頭文ではない。それは、教会と聖徒がどこから来たのか、誰の御心の上に立っているのか、そして何のために召されたのかを明らかにする神学的宣言である。張ダビデ牧師(日本オリベットアッセンブリー教団)のコロサイ書説教が捉える中心も、まさにここにある。教会は人間の意欲や組織の能力の上に建てられるものではなく、神の御心とイエス・キリストの召しの上に建てられる。

召しを失うとき、教会は方向を失う

パウロはコロサイの教会に向かって、「キリストにある忠実な兄弟たち」と呼びかける。コロサイの教会は、パウロが直接建てた教会ではなかったが、福音の中で同じいのちを分かち合う共同体であった。この事実は、教会の本質が特定の人物の影響力や地域の規模にあるのではないことを示している。教会は、福音の真理の中に立つとき、初めて教会となる。

今日の教会がしばしば揺れ動く理由も、ここに見いだすことができる。何をさらに行うべきかを問う前に、まずなぜ存在しているのかを問わなければならない。プログラムが多く、活動が活発であったとしても、アイデンティティが曖昧になれば、教会は世の中と変わらない組織になってしまう。反対に、小さく弱く見えたとしても、キリストの中で自分たちが何者であるかを知っている共同体は、簡単には崩れない。

張ダビデ牧師は、この点において聖徒と教会のアイデンティティを重要なものとして強調している。「私は誰であり、何のために召されたのか」という問いが明確でなければ、信仰は容易に感情や雰囲気に流されてしまう。しかし、神の御心によって召されたという確信があるなら、信仰は人生の中心となり、従順は強いられた義務ではなく、歩むべき方向となる。

信仰と愛と希望が教会を生かす

パウロは、コロサイの教会のために祈るたびに感謝していると語る。その感謝の理由は、彼らの信仰、すべての聖徒に対する愛、そして天に蓄えられている希望であった。信仰と愛と希望は、美しい宗教的表現にとどまるものではなく、福音が一つの共同体の中で実際に生きて働いていることの証拠である。

信仰とは、キリストをつかむ力である。愛とは、その信仰が人々へと流れていくあり方である。希望とは、今の苦難と混乱が最後の言葉ではないという確信である。この三つが生きているとき、教会は外見よりも深さを得、規模よりもいのちを得る。反対に、この三つが弱まるなら、どれほど多くのものを備えていたとしても、教会の魂は乾いていく。

福音は、聞くことで終わるものではない。パウロは、福音の真理の言葉を聞き、悟り、実を結ぶ人生について語っている。聖書黙想も同じである。御言葉を知ることだけでは十分ではない。御言葉は心を通って生活へと降りていかなければならず、恵みは思いを越えて愛の実践として現れなければならない。

キリストが小さくされるとき、福音も曖昧になる

コロサイ書の最も深い中心には、イエス・キリストの絶対的な主権がある。パウロは、キリストを目に見えない神のかたちであり、万物よりも先におられる方として宣べ伝える。これは、イエスを単に優れた教師や道徳的模範へと引き下げようとするあらゆる流れに対する明確な答えである。福音の中心には、常にキリストの十字架と復活、そしてその神性がある。

教会が道を見失う瞬間は、多くの場合、キリストが中心から押し出されるときである。時には世の成功がその場所を占め、時には人間の計算や欲望がその場所に取って代わる。またある時には律法主義が恵みを覆い隠し、反対に安易な自由が悔い改めと聖さを曖昧にしてしまう。コロサイ書がキリストを高く掲げる理由は、教会が福音の純粋性を失わないようにするためである。

張ダビデ牧師が強調する神学的洞察も、この流れと結びついている。教会はキリストを頭として告白するだけでなく、実際の働き、意思決定、生活のあり方の中で、その主権に従わなければならない。礼拝と教育、宣教と奉仕、財政と共同体の運営に至るまで、すべてがキリストの支配の下にあるとき、教会は初めて世とは異なる秩序を示すことができる。

天に蓄えられた希望は、地上の生活をえる

パウロは獄中にありながらも、コロサイの教会のために祈り、福音が全世界で実を結び、成長していると告白した。これは、福音が一つの地域の宗教的感情ではなく、世界へと広がっていく神のいのちであることを示している。教会は、自分たちの内側にだけとどまる閉ざされた休息の場ではなく、福音を抱いて世へと出ていく共同体である。

張ダビデ牧師の説教が見つめる教会像も、ここにある。教会は福音の守り手であると同時に、福音の伝え手である。内側では御言葉と祈りによって建て上げられ、外側へは愛と宣教として流れていかなければならない。聖霊の中で互いのために祈り、聖徒の間で愛を実際に分かち合い、世の中で福音の実を結ばなければならない。

結局、コロサイ書が今日の私たちに残す問いは、決して単純なものではない。私たちは本当にキリストを教会の頭として迎えているのか。私たちの信仰は愛として現れているのか。私たちの希望は天に蓄えられていながらも、今日の生活を新しくしているのか。

福音は古い教理ではなく、生きているいのちである。そのいのちは、聞く者の内に悟りとなり、悟った者の内に従順となり、従順に歩む共同体の内に実となる。今日、教会が再び握るべき道もそこにある。より華やかな言葉ではなく、より深い福音へ。より大きな外形ではなく、より明確なキリストの主権へと立ち返ることである。その静かな回復の場所で、私たちの信仰は、神の指先に向かって目覚めていくアダムの手のように、恵みのいのちを待ち望むようにな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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张大卫牧师(Olivet University)的歌罗西书讲道看福音与教会的使命

张大卫牧师.

当我们仰望米开朗基罗的《创造亚当》时,人显得无比渺小,却又同时显出一种难以言喻的尊贵。在西斯廷教堂的天花板上,上帝的指尖伸向亚当,而亚当的手尚未完全触及,仿佛正在等待生命降临的那一刻。在这短短的距离之中,所呈现的并不是人靠自己抵达上帝的故事,而是上帝先向人走来的恩典奥秘。

歌罗西书第1章所传达的福音,也正是从这个位置开始。保罗介绍自己说,他是“奉神旨意作基督耶稣使徒的保罗”。这并不是一封书信的普通开头,而是一项神学宣告,表明教会与圣徒从何而来,站立在谁的旨意之上,又为何蒙召。张大卫牧师(美国 Olivet University 创办人)关于歌罗西书讲道所紧紧抓住的核心,也正在这里。教会不是建立在人的热情或组织能力之上,而是建立在神的旨意和耶稣基督的呼召之上。

失去呼召,教会失去方向

保罗称歌罗西教会的信徒为“在基督里有忠心的弟兄”。歌罗西教会并不是保罗亲自建立的教会,但他们是在福音里同享生命的共同体。这一事实表明,教会的本质并不在于某个特定人物的影响力,也不在于某个地区的规模大小。教会唯有站立在福音真理之中,才真正成为教会。

今天的教会之所以常常动摇,也可以从这里找到原因。在问“还要做什么”之前,首先应当问“为何而存在”。即使项目繁多、活动活跃,若身份认同变得模糊,教会也会变成与世界无异的组织。相反,即使看起来微小软弱,只要一个共同体知道自己在基督里是谁,就不会轻易倒塌。

张大卫牧师在这一点上特别强调圣徒和教会的身份认同。如果“我是谁,又为了什么蒙召”这个问题并不清楚,信仰就很容易被情绪或氛围左右。然而,若有一种确信,知道自己是按着神的旨意蒙召,信心就会成为人生的中心,顺服也不再是勉强,而会成为方向。

信心、盼望使教会得以呼吸

保罗说,他每逢为歌罗西教会祷告时,总是感谢神。他感谢的理由,是他们的信心、对众圣徒的爱,以及那积存在天上的盼望。信心、爱与盼望并不是美丽的宗教表达,而是福音在一个共同体中真实运行的证据。

信心是紧紧抓住基督的力量。爱是这份信心流向他人的方式。盼望则是相信眼前的苦难与混乱并不是最终结局。当这三者仍然鲜活时,教会就会获得比外在形式更深的内涵,也会获得比规模更宝贵的生命。相反,如果这三者变得软弱,即使拥有再多资源,教会的灵魂也会逐渐枯干。

福音并不是停留在听见的层面。保罗谈到,人听见福音真理的话语,并且真正明白之后,生命就会结出果子。圣经默想也是如此。单单知道神的话语并不充分。话语必须经过内心,进入生活;恩典也必须超越思想,在爱的实践中显明出来。

基督,福音也得模糊

歌罗西书最深的中心,是耶稣基督绝对的主权。保罗宣告,基督是那不能看见之神的像,是在万有以先的主。这是对一切试图把耶稣降低为优秀教师或道德榜样的潮流所作出的清楚回应。福音的中心,始终是基督的十字架、复活,以及祂的神性。

教会失去方向的时刻,通常就是基督从中心被挪开的时候。有时,世界所谓的成功占据了这个位置;有时,人的计算与欲望取代了这个位置。还有些时候,律法主义遮蔽了恩典;相反,廉价的自由又模糊了悔改与圣洁。歌罗西书之所以高举基督,是为了使教会不失去福音的纯正。

张大卫牧师所强调的神学洞见,也与这一脉络相连。教会不仅要口里承认基督是头,也要在实际的事工、决策和生活方式中顺服祂的主权。敬拜、教育、宣教、服事、财务以及共同体的运营,唯有都置于基督的治理之下时,教会才真正显明一种不同于世界的秩序。

存在天上的盼望地上的生活

保罗即使身在监狱中,仍然为歌罗西教会祷告,并告白福音在普天下结果增长。这表明,福音并不是某个地区的宗教情感,而是向世界扩展的神的生命。教会不是只停留在自己内部的封闭避难所,而是怀抱福音、走向世界的共同体。

张大卫牧师讲道中所展望的教会形象,也正在这里。教会既是福音的守护者,也是福音的传递者。向内,教会要借着话语与祷告被建立;向外,教会要借着爱与宣教流淌出去。教会应当在圣灵里彼此代祷,真实地分享圣徒之间的爱,并在世界中结出福音的果子。

最终,歌罗西书今天留给我们的问题并不简单。我们是否真的把基督尊为教会的头?我们的信心是否通过爱显明出来?我们的盼望是否积存在天上,同时也更新今天的生活?

福音不是古老的教义,而是活着的生命。这生命在听见的人里面成为领悟,在领悟的人里面成为顺服,在顺服的共同体里面成为果子。今天教会应当重新抓住的道路,也正在这里。不是追求更华丽的言语,而是回到更深的福音;不是追求更大的外在形式,而是回到更清楚的基督主权。在这安静恢复的地方,我们的信仰也会像亚当那只朝向上帝指尖而苏醒的手一样,重新等候恩典的生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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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avid Jang, pastor (Olivet University): el evangelio y la misión de la iglesia vistos a través de sus sermones sobre Colosenses

Al contemplar “La creación de Adán” de Miguel Ángel, el ser humano parece infinitamente pequeño y, al mismo tiempo, inexplicablemente digno. En el techo de la Capilla Sixtina, la punta del dedo de Dios se extiende hacia Adán, mientras la mano de Adán, sin llegar todavía a tocarla por completo, espera el instante de la vida. En ese breve espacio no se narra la historia de un ser humano que alcanza a Dios por sus propias fuerzas, sino el misterio de la gracia: Dios es quien se acerca primero al ser humano.

El evangelio que proclama Colosenses 1 comienza precisamente en ese lugar. Pablo se presenta como “apóstol de Cristo Jesús por la voluntad de Dios”. Esta frase no es simplemente la primera línea de una carta. Es una declaración teológica que revela de dónde vienen la iglesia y los creyentes, sobre la voluntad de quién permanecen firmes y para qué han sido llamados. El centro que sostienen los sermones sobre Colosenses del pastor David Jang, fundador de Olivet University en Estados Unidos, se encuentra también aquí. La iglesia no se edifica sobre el entusiasmo humano ni sobre la capacidad organizativa, sino sobre la voluntad de Dios y el llamamiento de Jesucristo.

Cuando se pierde el llamamiento, la iglesia pierde el rumbo

Pablo se dirige a la iglesia de Colosas llamándolos “hermanos fieles en Cristo”. La iglesia de Colosas no había sido fundada directamente por Pablo, pero era una comunidad que compartía la misma vida en el evangelio. Este hecho muestra que la esencia de la iglesia no reside en la influencia de una persona concreta ni en el tamaño de una región. La iglesia llega a ser verdaderamente iglesia cuando permanece firme en la verdad del evangelio.

Aquí también podemos encontrar una razón por la que la iglesia de hoy se tambalea con frecuencia. Antes de preguntar qué más debemos hacer, primero debemos preguntarnos por qué existimos. Aunque haya muchos programas y las actividades sean abundantes, si la identidad se vuelve confusa, la iglesia se convierte en una organización que no se distingue del mundo. Por el contrario, aunque parezca pequeña y frágil, una comunidad que sabe quién es en Cristo no se derrumba fácilmente.

El pastor David Jang subraya con fuerza en este punto la identidad de los creyentes y de la iglesia. Si la pregunta “¿Quién soy y para qué he sido llamado?” no está clara, la fe puede ser arrastrada fácilmente por las emociones o por el ambiente del momento. Pero cuando existe la certeza de haber sido llamado por la voluntad de Dios, la fe se convierte en el centro de la vida y la obediencia deja de ser una carga para convertirse en dirección.

La fe, el amor y la esperanza hacen respirar a la iglesia

Pablo dice que da gracias cada vez que ora por la iglesia de Colosas. La razón de su gratitud era la fe de ellos, su amor hacia todos los santos y la esperanza reservada para ellos en los cielos. La fe, el amor y la esperanza no son simples expresiones religiosas hermosas, sino evidencias de que el evangelio está vivo y obrando realmente dentro de una comunidad.

La fe es la fuerza que se aferra a Cristo. El amor es la manera en que esa fe fluye hacia las personas. La esperanza es la certeza de que el sufrimiento y la confusión presentes no tienen la última palabra. Cuando estas tres realidades están vivas, la iglesia gana profundidad más que apariencia, y vida más que tamaño. Por el contrario, cuando estas tres se debilitan, por mucho que la iglesia posea muchas cosas, su alma comienza a secarse.

El evangelio no termina simplemente en ser escuchado. Pablo habla de una vida que escucha la palabra de verdad del evangelio, la comprende y da fruto. Lo mismo ocurre con la meditación bíblica. No basta con conocer la Palabra. La Palabra debe pasar por el corazón y descender a la vida; la gracia debe ir más allá del pensamiento y manifestarse en la práctica del amor.

Cuando Cristo se hace pequeño, también se oscurece el evangelio

En el centro más profundo de Colosenses se encuentra la soberanía absoluta de Jesucristo. Pablo proclama que Cristo es la imagen del Dios invisible y el primogénito de toda creación. Esta afirmación es una respuesta clara a toda tendencia que intenta reducir a Jesús a un simple maestro admirable o a un modelo moral. En el centro del evangelio siempre están la cruz y la resurrección de Cristo, así como su divinidad.

La iglesia suele perder el camino cuando Cristo es desplazado del centro. A veces, el éxito del mundo ocupa ese lugar; otras veces, lo sustituyen los cálculos y deseos humanos. En ocasiones, el legalismo oculta la gracia; en otras, una libertad barata difumina el arrepentimiento y la santidad. La razón por la que Colosenses exalta a Cristo es para que la iglesia no pierda la pureza del evangelio.

La perspectiva teológica que enfatiza el pastor David Jang también se conecta con esta corriente. La iglesia no solo debe confesar a Cristo como cabeza, sino también someterse a su soberanía en el ministerio real, en la toma de decisiones y en la manera de vivir. Cuando la adoración y la educación, la misión y el servicio, las finanzas y la administración comunitaria se sitúan bajo el gobierno de Cristo, la iglesia comienza a mostrar un orden distinto al del mundo.

La esperanza guardada en los cielos transforma la vida en la tierra

Pablo, aun estando en prisión, oraba por la iglesia de Colosas y confesaba que el evangelio daba fruto y crecía en todo el mundo. Esto muestra que el evangelio no es una emoción religiosa limitada a una región, sino la vida de Dios que se expande hacia el mundo. La iglesia no es un refugio cerrado que permanece encerrado en sí mismo, sino una comunidad que abraza el evangelio y sale al mundo.

La visión de iglesia que contemplan los sermones del pastor David Jang también se encuentra aquí. La iglesia es guardiana del evangelio y, al mismo tiempo, mensajera del evangelio. Hacia dentro, debe ser edificada por la Palabra y la oración; hacia fuera, debe fluir mediante el amor y la misión. En el Espíritu Santo, debe orar unos por otros, compartir de manera concreta el amor entre los santos y dar fruto del evangelio en medio del mundo.

En última instancia, la pregunta que Colosenses nos deja hoy no es sencilla. ¿Estamos realmente recibiendo a Cristo como cabeza de la iglesia? ¿Nuestra fe se manifiesta en amor? ¿Nuestra esperanza, aunque esté guardada en los cielos, está renovando nuestra vida presente?

El evangelio no es una doctrina antigua, sino una vida viva. Esa vida se convierte en comprensión dentro de quien la escucha; en obediencia dentro de quien la comprende; y en fruto dentro de la comunidad que obedece. El camino que la iglesia de hoy debe volver a aferrar está ahí: regresar a un evangelio más profundo antes que a palabras más brillantes, y a una soberanía de Cristo más clara antes que a una apariencia más grande. En ese lugar silencioso de restauración, nuestra fe vuelve a esperar la vida de la gracia, como la mano de Adán que despierta hacia la punta del dedo de Dios.

www.davidjang.org

장재형 목사(올리벳대학교) 골로새서 설교로 본 복음과 교회의 소명

장재형목사

미켈란젤로의 「천지창조」를 올려다보면, 인간은 한없이 작아 보이면서도 동시에 설명할 수 없이 존귀해 보인다. 시스티나 성당 천장 위에서 하나님의 손끝은 아담을 향해 뻗어 있고, 아담의 손은 아직 완전히 닿지 않은 채 생명의 순간을 기다린다. 그 짧은 간격 안에는 인간이 스스로 하나님께 도달하는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이 먼저 인간을 향해 다가오시는 은혜의 신비가 담겨 있다.

골로새서 1장이 전하는 복음도 바로 그 자리에서 시작된다. 바울은 자신을 “하나님의 뜻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 예수의 사도 된 바울”이라고 소개한다. 이 말은 단순한 편지의 첫 문장이 아니다. 그것은 교회와 성도가 어디에서 왔고, 누구의 뜻 위에 서 있으며, 무엇을 위해 부름받았는지를 밝히는 신학적 선언이다. 장재형 목사(미국 올리벳대학교 설립)의 골로새서 설교가 붙드는 중심도 여기에 있다. 교회는 사람의 의욕이나 조직의 능력 위에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과 예수 그리스도의 부르심 위에 세워진다.

부르심을 잃으면 교회는 방향을 잃는다

바울은 골로새 교회를 향해 “그리스도 안에서 신실한 형제들”이라고 부른다. 골로새 교회는 바울이 직접 세운 교회가 아니었지만, 복음 안에서 같은 생명을 나눈 공동체였다. 이 사실은 교회의 본질이 특정한 인물의 영향력이나 지역의 크기에 있지 않음을 보여준다. 교회는 복음 진리 안에 설 때 비로소 교회가 된다.

오늘의 교회가 자주 흔들리는 이유도 여기에서 찾을 수 있다. 무엇을 더 할 것인가를 묻기 전에, 먼저 왜 존재하는가를 물어야 한다. 프로그램이 많고 활동이 활발해도, 정체성이 흐려지면 교회는 세상과 다르지 않은 조직이 된다. 반대로 작고 연약해 보여도,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이 누구인지 아는 공동체는 쉽게 무너지지 않는다.

장재형 목사는 이 지점에서 성도와 교회의 정체성을 중요하게 강조한다. “나는 누구이며 무엇을 위해 부름받았는가”라는 질문이 분명하지 않으면, 신앙은 쉽게 감정이나 분위기에 휩쓸린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으로 부름받았다는 확신이 있으면, 믿음은 삶의 중심이 되고 순종은 억지가 아니라 방향이 된다.

믿음과 사랑과 소망이 교회를 숨 쉬게 한다

바울은 골로새 교회를 위해 기도할 때마다 감사한다고 말한다. 그 감사의 이유는 그들의 믿음, 모든 성도에 대한 사랑, 그리고 하늘에 쌓아 둔 소망이었다. 믿음과 사랑과 소망은 아름다운 종교적 표현이 아니라, 복음이 한 공동체 안에서 실제로 살아 움직이고 있다는 증거다.

믿음은 그리스도를 붙드는 힘이다. 사랑은 그 믿음이 사람을 향해 흘러가는 방식이다. 소망은 지금의 고난과 혼란이 마지막 말이 아니라는 확신이다. 이 세 가지가 살아 있을 때 교회는 외형보다 깊이를 얻고, 규모보다 생명을 얻는다. 반대로 이 세 가지가 약해지면 아무리 많은 것을 갖추어도 교회의 영혼은 메말라 간다.

복음은 듣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바울은 복음 진리의 말씀을 듣고 깨달아 열매 맺는 삶을 말한다. 성경 묵상도 마찬가지다. 말씀을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말씀은 마음을 지나 삶으로 내려와야 하고, 은혜는 생각을 넘어 사랑의 실천으로 나타나야 한다.

그리스도가 작아질 때 복음도 흐려진다

골로새서의 가장 깊은 중심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절대적 주권이 있다. 바울은 그리스도를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형상이요, 만물보다 먼저 계신 분으로 선포한다. 이는 예수를 단지 훌륭한 스승이나 도덕적 모범으로 낮추려는 모든 흐름에 대한 분명한 대답이다. 복음의 중심에는 언제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그분의 신성이 있다.

교회가 길을 잃는 순간은 대개 그리스도가 중심에서 밀려날 때다. 때로는 세상의 성공이 그 자리를 차지하고, 때로는 인간의 계산과 욕망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또 어떤 때는 율법주의가 은혜를 가리고, 반대로 값싼 자유가 회개와 거룩함을 흐리게 만든다. 골로새서가 그리스도를 높이는 이유는 교회가 복음의 순수성을 잃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장재형 목사가 강조한 신학적 통찰도 이 흐름과 맞닿아 있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머리로 고백할 뿐 아니라, 실제 사역과 의사 결정과 삶의 방식 속에서 그분의 주권에 순종해야 한다. 예배와 교육, 선교와 봉사, 재정과 공동체 운영까지 모든 것이 그리스도의 다스림 아래 있을 때, 교회는 비로소 세상과 다른 질서를 보여준다.

하늘에 쌓인 소망은 땅의 삶을 바꾼다

바울은 감옥에 있으면서도 골로새 교회를 위해 기도했고, 복음이 온 천하에서 열매를 맺고 자란다고 고백했다. 이것은 복음이 한 지역의 종교적 감정이 아니라, 세상을 향해 확장되는 하나님의 생명임을 보여준다. 교회는 자기 안에만 머무는 닫힌 쉼터가 아니라, 복음을 품고 세상으로 나아가는 공동체다.

장재형 목사의 설교가 바라보는 교회상도 여기에 있다. 교회는 복음의 수호자이면서 동시에 복음의 전달자다. 안으로는 말씀과 기도로 세워지고, 밖으로는 사랑과 선교로 흘러가야 한다. 성령 안에서 서로를 위해 기도하고, 성도 간의 사랑을 실제로 나누며, 세상 속에서 복음의 열매를 맺어야 한다.

결국 골로새서가 오늘 우리에게 남기는 질문은 단순하지 않다. 우리는 정말 그리스도를 교회의 머리로 모시고 있는가. 우리의 믿음은 사랑으로 드러나고 있는가. 우리의 소망은 하늘에 쌓여 있으면서도 오늘의 삶을 새롭게 하고 있는가.

복음은 오래된 교리가 아니라 살아 있는 생명이다. 그 생명은 듣는 사람 안에서 깨달음이 되고, 깨달은 사람 안에서 순종이 되며, 순종하는 공동체 안에서 열매가 된다. 오늘 교회가 다시 붙들어야 할 길도 거기에 있다. 더 화려한 말보다 더 깊은 복음으로, 더 큰 외형보다 더 분명한 그리스도의 주권으로 돌아가는 일이다. 그 조용한 회복의 자리에서, 우리의 신앙은 다시 하나님의 손끝을 향해 깨어나는 아담의 손처럼 은혜의 생명을 기다리게 된다.

인생의 축제에서 마주하는 고갈과 초월적 전환: 장재형목사의 가나의 표적이 선포하는 복음

1. 실존의 잔치와 예기치 못한 결핍의 순간

모든 인간은 자신의 삶이라는 여정이 끊임없는 축제처럼 흘러가기를 열망합니다. 따스한 만남이 있고, 영혼을 채우는 기쁨이 머물며, 하늘의 축복과 내일에 대한 눈부신 기대가 마르지 않는 삶—그것이 인류가 공통으로 꿈꾸는 이상적인 인생의 풍경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발을 딛고 살아가는 현실의 대지는 결코 그토록 낭만적인 궤적만을 그리며 흘러가지 않습니다. 어느 날 예기치 않게, 우리가 평생을 바쳐 준비해 왔던 인생의 밑천이 바닥을 드러내고, 영원할 것만 같았던 마음에 즐거움과 생기가 신기루처럼 증발해 버리며, 인간의 유한한 힘으로는 도저히 메울 수 없는 절망적인 결핍의 심연이 눈앞에 폭로되곤 합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여전히 화려한 조명 아래 잔치가 지속되는 것처럼 보이지만, 내면의 장막을 들춰보면 이미 영혼을 적실 생명의 포도주가 완전히 말라버린 상태를 마주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실존적 위기의 한복판에서, 요한복음 2장에 등장하는 가나의 혼인 잔치는 시공간을 초월하여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영성의 언어로 말을 걸어옵니다.

요한복음 2장의 서두를 장식하는 가나의 혼인 잔치 사건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이 땅 위의 공생애 사역을 개시하시며 인류 앞에 내보이신 기념비적인 ‘첫 번째 표적’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지점은, 성경이 이 사건을 단순한 초자연적 ‘기적’이 아니라 무언가 거대한 본질을 지시하는 ‘표적(Sign, $sēmeion$)’이라는 단어로 명명했다는 점입니다. 표적은 단순히 눈앞에서 펼쳐진 가시적이고 놀라운 현상 그 자체로 기능이 종결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마치 하나의 거대한 영적 이정표와 같아서, 그 사건이 일어난 현상적 껍질을 뚫고 들어가 그 배후에 계신 예수 그리스도가 과연 어떠한 신성한 존재이신지, 그리고 그분이 온 인류에게 가져오실 구원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가리키는 고도의 계시입니다.

장재형 목사(미국 올리벳대학교 설립자)는 요한복음의 이 거룩한 본문을 강해하면서, 평범한 물이 향기로운 포도주로 질적 전환을 이룬 이 사건이 단순히 한 시골 마을의 잔칫집이 맞이한 사회적 파산과 일시적인 당혹감을 해결해 준 차원의 일화가 결코 아님을 명확히 규정합니다.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 안에서 생명력을 상실한 옛 시대의 모든 유산과 종교적 형식이 완벽하게 새로워지며, 인간의 근원적인 결핍과 가난함이 하늘의 영원한 풍성함으로 뒤바뀌게 됨을 선포하는 장엄한 구속사적 복음의 선언이라는 것이 그의 핵심적인 강조점입니다.

가나의 혼인 잔치에 담긴 서사가 오늘날 수많은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우리의 심령을 깊이 뒤흔들며 뜨거운 울림을 주는 이유는 자명합니다. 그 잔칫집의 풍경이 다른 누구의 이야기도 아닌, 바로 오늘날 나의 삶, 우리 인생의 정직한 초상화와 너무나도 닮아있기 때문입니다. 모든 인간은 저마다 화려한 포부와 설레는 기쁨을 안고 인생의 잔치를 시작하지만, 세월의 풍파를 지나다 보면 어느 순간 필연적으로 뼈아픈 부족함의 계절을 맞이하게 됩니다.

사랑으로 가득 차야 할 인간관계의 포도주가 차갑게 식어 바닥나고, 삶을 지탱하던 육체와 정신의 건강이라는 포도주가 고갈되며, 하늘을 향해 타오르던 믿음의 포도주가 흔들려 증발하고, 마침내 사명과 헌신의 제단 위에 부어지던 거룩한 포도주마저 메말라 버리는 위기가 찾아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요한복음은 이러한 절망과 탄식의 자리에서 비극적으로 초점을 흐리며 이야기를 끝맺지 않습니다. 도리어 인간의 모든 계산과 자원이 완벽하게 파산해 버린 바로 그 결핍의 지점, 그 어두운 공백기야말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영광스러운 첫 표적이 시작되는 거룩한 산고의 자리였다고 우리에게 웅변하고 있습니다.

2. 가나의 혼인 잔치가 고발하는 인간적 한계와 결핍의 영적 실상

고대 유대 사회에서 혼인 잔치라는 것은 단지 두 남녀가 만나 결합하는 개인적이고 사적인 경사를 넘어선 성격의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한 가문과 가정이 새롭게 언약 위에 세워지는 엄숙한 날이었으며, 마을 공동체 전체가 일상의 노동을 멈추고 함께 어우러져 하늘의 기쁨을 나누는 거대한 축제의 장이었습니다. 그렇기에 이 잔치는 보통 수일 동안 성대하게 지속되는 것이 관례였으며, 찾아온 하객들을 풍성하고 정성스럽게 대접하는 것은 혼주와 신랑 신부의 사회적 명예 및 가문의 존엄성과 직결되는 중차대한 문제였습니다.

이러한 문화적 맥락 속에서, 잔치가 채 끝나기도 전에 축제의 핵심인 포도주가 떨어졌다는 사실은 단순히 준비한 음료의 양이 조금 부족했다는 수준의 물류적 고갈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것은 공동체의 기쁨이 한순간에 중단됨을 의미하는 것이며, 가문 전체가 지울 수 없는 수치와 사회적 파산의 위기에 직면했음을 뜻하고, 나아가 인간이 지혜를 짜내어 정성껏 준비한 모든 지상 사물의 노력이라는 것이 얼마나 쉽게 한계에 도달하고 마는지를 상징적으로 고발하는 처절한 장면이었습니다.

바로 이 결정적인 위기의 순간, 상황의 심각성을 예리하게 간파한 예수의 어머니 마리아는 인간적인 분주함으로 대안을 찾아 헤매는 대신, 조용히 예수께 나아가 짤막하지만 묵직한 한 문장을 건넵니다. “저들에게 포도주가 없다.” 이 외마디 같은 고백은 기독교 역사상 가장 깊고 순전한 기도의 정수를 우리에게 계시해 줍니다. 마리아는 아들 예수 앞에서 상황을 장황하게 설명하며 변명하지 않았습니다. 이 사태의 원인이 누구의 준비 부족에 있는지, 누구의 잘못인지를 따져 묻는 정죄의 우를 범하지도 않았습니다.

또한, 자신이 어머니라는 권위를 가지고 주님을 향해 “지금 당장 어디서 포도주를 구해오라”는 식의 해결 방법을 오만하게 지시하지도 않았습니다. 그녀는 오직 인간이 마주한 비참한 부족함과 실존적 빈자리를 있는 그대로, 아무런 포장 없이 주님의 주권 앞에 날것으로 가지고 나아갔을 뿐입니다. 이것이 바로 기적을 부르는 참된 믿음의 시발점입니다. 기도의 본질이란 때로 세련된 문장과 많은 말을 늘어놓는 종교적 웅변이 아니라, 나 자신의 완전한 무능함과 내 삶에는 더 이상 선한 것이 남아있지 않다는 결핍의 실상을 주님 보좌 앞에 정직하게 인정하고 고백하는 침묵의 투항입니다.

우리의 신앙 걸음 또한 마리아가 마주했던 그 정직한 폭로의 자리를 통과해야만 합니다. 인생의 여정 중 그 어느 골짜기를 지나든, 우리는 하나님 앞에서 가식의 가면을 벗어 던진 채 “주님, 지금 제게는 포도주가 없습니다”라고 눈물로 고백할 수 있는 영적 정직성을 회복해야 합니다. 내 안에 영혼들을 품을 사랑이 너무나도 부족합니다. 가정을 이끌 지혜가 턱없이 부족합니다. 사명을 감당할 영육 간의 힘이 고갈되었습니다. 신앙의 기쁨은 사라진 지 오래고, 믿음의 기초가 모래성처럼 흔들리고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는 차마 부끄러워 말하기 힘든 치명적인 결핍이라 할지라도, 긍휼이 풍성하신 주님의 발치에는 얼마든지 날것 그대로 쏟아놓을 수 있습니다. 가나의 혼인 잔치 서사가 이토록 가슴 절절한 복음의 능력이 되는 결정적인 이유는, 온 우주의 창조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다름 아닌 바로 그 수치스럽고 부족한 인간의 빈자리에 함께 동석해 계셨기 때문입니다. 다른 하객들은 아직 잔치의 이면에 흐르는 치명적인 위기와 파산의 징후를 전혀 알아채지 못하고 겉돌고 있었을지 모르지만, 만물의 주시요 통치자이신 주님은 이미 그 결핍의 현장을 눈동자처럼 바라보시며 일하실 준비를 하고 계셨습니다.

장재형 목사의 요한복음 2장 강해설교에서 가장 묵직하게 가슴을 울리는 영적 강조점 역시 이 지점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결코 인간이 겪는 존재론적 가난함과 사소한 삶의 결핍을 차갑게 외면하거나 냉소하시는 분이 아닙니다. 오히려 성경의 복음은 인간의 완전한 부족함과 밑천의 바닥남이야말로, 하나님의 전능하신 손길이 비로소 개입하시는 ‘거룩한 시작의 무대’가 될 수 있음을 역설합니다.

인생의 항아리가 아집과 자기 충만으로 가득 차 있는 동안에는 하늘의 신령한 것을 채울 공간이 없습니다. 오직 철저하게 비어 있는 항아리가 준비되어 있어야만 하나님의 신성한 채우심을 경험할 수 있으며, 내가 가진 인간적 포도주가 처절하게 떨어진 자리가 존재해야만 비로소 주님이 친히 빚어내시는 ‘하늘의 새 포도주’가 주는 극상의 기쁨이 온 천하에 드러나게 됩니다. 그러므로 참된 기독교 신앙은 자기 자신의 의로움과 부요함을 세상 앞에 자랑하며 과시하는 바리새인들의 길이 아닙니다. 도리어 자신의 비참한 파산 상태와 부족함을 숨김없이 주님께 열어 보이며 하나님의 긍휼만을 구하는 겸비한 자들의 좁은 길입니다.

3.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다” 속에 감추어진 구속사적 경륜과 기다림의 신비

자신의 결핍을 고백하는 마리아의 음성을 들으신 예수님은, 인간의 기대를 단번에 꺾어버리는 듯한 뜻밖의 난해하고도 엄중한 대답을 돌려주십니다. “여자여 나와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내 때가 아직 이르지 아니하였나이다.” 요한복음의 독특한 문맥 속에서 이 ‘때($hōra$)’라는 신학적 단어는 결코 인간들이 일상 속에서 계산하는 연대기적 시간표($chronos$)나 기회의 타이밍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이 단어는 요한복음 전체의 서사를 지배하는 거대한 구속사적 단어로,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홀로 짊어지실 십자가의 고난과 죽음, 그리고 그 사망의 권세를 깨뜨리고 부활하심으로써 마침내 완성하실 ‘구원의 결정적 순간($kairos$)’이자 하늘의 영광을 입으실 구원의 정점을 가리킵니다.

예수께서 이 땅 위에서 행하신 모든 발걸음과 치유, 그리고 가르침의 사역은 단 하나도 우연히 일어난 것이 없으며, 오직 아버지 하나님이 정하신 이 거룩한 ‘때’의 자석에 이끌려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움직이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일어난 사건은 단순히 어느 한 가정의 일시적인 잔치 붕괴 위기를 수습해 준 사소한 해프닝이 아닙니다. 그것은 장차 주님이 갈보리 십자가 위에서 물과 피를 쏟으심으로 완성하실 영원한 구원의 영광과 천국 대연회의 기쁨을 역사 속에 미리 당겨와 보여주신 거룩한 ‘종말론적 예표’였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신앙생활의 가장 깊은 골짜기인 ‘하나님의 시간’과 ‘인간의 시간’이 가진 필연적인 간극과 영적 기다림의 신비를 배우게 됩니다. 육신을 입은 연약한 인간은 언제나 눈앞의 고통과 결핍이 당장 이 순간에 해결되기를 갈망합니다. 지금 당장 내 삶에 포도주가 떨어져 수치스러우니, 지금 이 순간에 즉각적으로 그 구멍이 채워지기를 주님께 부르짖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영혼을 가장 잘 아시는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단지 우리의 육신적인 필요와 이기적인 욕구를 즉각적으로 해결해 주는 종교적 도구의 자리에 머무기를 거부하십니다. 그분은 도리어 우리가 겪는 처절한 결핍의 계절을 통과하게 하심으로써, 우리의 시선을 땅의 것에서 하늘의 것으로 돌리게 하시고, 고난의 터널 속에서 더 깊은 구원의 영적인 의미를 발견하도록 우리를 연단하십니다. 예수님은 비록 육신의 어머니였던 마리아의 요청을 결코 외면하지 않으셨지만, 동시에 그 사소한 잔칫집의 위기를 하나님의 거대한 우주적 구원 역사라는 거시적인 관점 안에서 재해석하시고 하나님의 때에 맞추어 일하셨습니다.

이것이 바로 요동치는 인생의 바다 위에서 우리가 붙들어야 할 믿음의 중요한 균형이자 영적 성숙의 지표입니다. 하나님은 분명 우리가 흘리는 작은 눈물 한 방울, 일상 속의 사소한 필요에도 세밀하게 귀를 기울이시고 깊은 관심을 가지시는 사랑의 아버지이십니다. 그러나 그분의 선하신 관심은 단순히 눈앞의 닥친 문제를 임시방편으로 해결해 주는 얕은 수준에 머무르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결핍이라는 도구를 사용하여, 얕은 물가에 머물던 우리의 영혼을 더 깊은 믿음의 세계, 하나님을 온전히 신뢰하는 거룩한 성화의 자리로 초청하십니다.

포도주가 완전히 동이 나버린 그 사건은 인간의 눈으로 볼 때는 잔치의 파멸이자 위기였지만, 만왕의 왕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손길 안에서는 하나님의 영광을 온 천하에 눈부시게 드러내는 복된 통로로 변모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삶을 뒤흔드는 수많은 위기와 결핍의 순간들 역시 영적 원리는 동일합니다. 우리의 좁은 안목으로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실패와 낭패의 순간처럼 보일지라도, 신실하신 하나님의 신성한 시간표 안에서는 이전에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차원의 은혜와 영광을 드러내기 위한 최적의 무대가 될 수 있음을 믿어야 합니다.

4. 옛 율법의 돌항아리에 부어지는 말씀의 물: 이성을 초월한 순종과 대가의 지불

예수님은 잔치방의 하인들을 향해, 그곳에 정적을 지키며 서 있던 돌항아리 여섯 개에 물을 가득 채우라는 뜻밖의 명령을 내리십니다. 이 거대한 돌항아리들은 단순한 생활용수가 아니라, 유대인들이 유전처럼 지켜오던 엄격한 ‘정결 예식’을 수행하기 위해 물을 담아두던 종교적 도구들이었습니다. 즉, 외면의 흙먼지는 씻어낼 수 있지만 인간의 영혼 깊은 곳에 똬리 틀고 있는 죄악의 본질은 단 한 방울도 씻어내지 못하던, 형식주의로 치달은 ‘옛 율법의 그릇’을 상징하는 정물들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다름 아닌 바로 그 차갑고 굳어버린 율법의 항아리에 생명의 말씀과도 같은 ‘물’을 채우게 하시고, 마침내 그 물의 본질을 바꾸어 복음의 포도주로 전환시키셨습니다. 이 정교한 장면은 숨이 막힐 정도로 깊은 기독교 신학의 정수를 품고 있습니다. 인간의 행위와 의문(儀文)에 매여 정결을 추구하려다 결국 기쁨을 잃고 텅 비어버린 율법의 자리에,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찾아온 은혜와 진리의 새 언약의 기쁨이 터질 듯이 담기게 된 것입니다. 정죄와 의무의 사슬 아래에서 신음하던 인간의 절망적인 자리가, 그리스도의 보혈을 상징하는 은혜와 풍성한 생명의 축제 자리로 완벽하게 변화된 순간입니다.

당시 그 현장에 있던 하인들은 결코 주님의 이 신비로운 구속사적 경륜과 신학적 의미를 머리로 완벽하게 이해하고 움직인 지성인들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상황에 대한 주님의 친절한 설명도, 납득할 만한 논리적 정당성도 전혀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지금 당장 잔치 주빈들이 포도주를 달라고 아우성을 치며 가문의 명예가 위태로운 마당에, 왜 우물가에 가서 무거운 물을 길어와 정결례 항아리에 부어야 하는지, 이 비효율적인 노동이 어떻게 눈앞의 거대한 위기를 해결할 수 있는지 그들의 이성으로는 도저히 알 길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의 생각과 합리를 내려놓고, 오직 주님의 입에서 떨어진 말씀 그대로 움직였습니다.

성경은 그들의 행보를 기록하면서, 그들이 항아리에 물을 채우되 “아귀까지” 가득 채웠다고 매우 세밀하게 기록합니다. 이 ‘아귀까지 채웠다’는 짤막한 수식어는, 하나님의 말씀을 대하는 순종의 태도가 얼마나 충실하고 흠이 없어야 하는지를 보여주는 거룩한 이정표입니다. 하인들은 주님의 명령에 마지못해 대충 시늉만 내며 항아리를 채우지 않았습니다. 의심의 안개가 자욱한 상황 속에서도, 그들은 자신이 지불할 수 있는 최고의 노동과 열정을 다해 항아리의 가장 높은 목구멍까지 물을 가득 들이부었습니다. 그들에게는 눈앞의 상황에 대한 이해가 먼저가 아니라, 말씀하신 분의 권위 앞에 무릎 꿇는 ‘순종’이 언제나 압도적인 먼저였습니다.

우리가 걸어가는 고독한 신앙의 여정 속에서도 이 가나의 하인들이 보여준 순종의 자리는 영적 도약을 위한 필수적인 관문으로 다가옵니다. 현대 성도들은 끊임없이 자신의 타락한 이성의 법정 앞에 하나님의 말씀을 소환하여, 모든 것을 인간의 얕은 지혜로 이해하고 납득한 뒤에야 비로소 순종의 걸음을 떼려 합니다. 내 마음에 완벽히 납득이 되고, 가시적인 결과와 유익이 명확히 계산되어야만 겨우 종교적인 무거운 몸을 움직이려 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위대한 역사들은 언제나 인간의 이해보다 ‘순종의 발걸음’이 앞선 자들의 핏자국 위에서 기록되었습니다. 하인들이 우물에서 물을 길어 붓는 그 힘겨운 노동의 시간 동안에는, 여전히 눈앞에 붉은 포도주의 기적은 단 한 방울도 가시화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항아리 안에는 맹물만이 가득 흘러넘치고 있었을 뿐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이해되지 않는 말씀에 자신을 꺾어 복종시키고, 마지막 물동이를 들이붓는 그 무모해 보이는 순종의 길 위에서, 마침내 물은 그 존재의 성분을 바꾸어 포도주가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사와 신비는 골방에 앉아 설명을 다 듣고 고개를 끄덕이는 지적인 구경꾼들에게 일어나는 현상이 아닙니다. 그것은 사방이 가로막힌 현실 속에서도 오직 주의 말씀 앞에 자신의 삶과 의지를 통째로 내어던지는 자들의 처절한 순종의 자리에서 비로소 불꽃처럼 시작되는 것입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 본문의 강해를 통해, 하나님 나라의 역사는 영웅들의 거창하고 거대한 능력이 아니라 지극히 평범한 자들의 ‘작은 순종’을 통해 직조된다는 영적 비결을 강력하게 역설합니다. 하늘와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주님은 오늘날 우리에게 세상을 뒤흔들 만한 대단한 자원이나 초인적인 능력을 요구하지 않으십니다. 가나의 하인들이 행한 일은 그저 일상적인 노동에 불과한, 우물에서 물을 길어 항아리에 부은 것뿐이었습니다.

그러나 만물의 주관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그 미천하고 작은 순종의 제물을 자신의 손에 받으사 축사하시고 사용하셨을 때, 그것은 수치로 끝나갈 뻔한 한 가문의 연회를 기적적으로 소생시키는 거룩한 생명의 통로로 탈바꿈했습니다. 오늘날 우리의 무미건조하고 바닥을 드러낸 일상 속에서도 이 영적 법칙은 한 치의 오차도 없이 동일하게 적용됩니다. 내 자아를 꺾는 작은 기도 한 자락, 지체를 향한 사소한 섬김의 손길, 은밀한 죄를 쏟아놓는 정직한 회개, 그리고 말씀 앞에 반응하는 아주 작은 순종의 행동들이 우주의 주인이신 주님의 손에 붙들릴 때, 우리의 무맛이고 무색한 ‘맹물 같은 인생’이 세상을 치유하고 살려내는 ‘기적의 포도주’로 변화되는 구속사적인 은혜가 일어나는 것입니다.

5. “그대는 지금까지 좋은 포도주를 두었도다”: 처음보다 나중이 찬란한 복음의 방향성

마침내 하인들이 순종함으로 떠다 준 항아리의 물이 포도주로 화한 뒤, 그것을 맛본 연회장은 경악을 금치 못하며 신랑을 급히 불러 가슴 벅찬 목소리로 외칩니다. 세상의 모든 잔치 기획자들은 먼저 하객들의 미각이 살아있을 때 가장 최상급의 좋은 포도주를 내어 대접하고, 사람들이 술에 취해 감각이 둔해질 때쯤 질이 떨어지는 낮은 것을 내놓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세상의 경제학이자 관습인데, 어찌하여 이 집은 잔치가 끝나가는 지금까지 이토록 깊고 향기로운 ‘최고급 포도주’를 감추어 두었다가 이제야 내놓았느냐는 찬탄이었습니다.

연회장의 이 감격스러운 외침은 가나의 혼인 잔치 표적이 우리에게 계시하고자 하는 영적 메시지의 거룩한 정점이자 절정을 선명하게 보여줍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인간의 결핍 위에 베풀어주신 하늘의 은혜는, 단순히 인간이 실수로 축낸 부족한 양을 겨우 땜질하여 메우는 수준의 임시방편적인 보상이 결코 아니었습니다. 주님이 친히 창조해 내신 그 포도주는 인간이 이전에 맛보았던 그 어떤 천연적인 포도주와도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본질과 차원이 완전히 다른 극상의 것이었습니다. 인간의 파산과 결핍을 겨우 숨겨주는 소극적인 구원이 아니라, 혼인 잔치의 영적 질 자체를 완전히 새롭게 뒤바꾸어 버리는 복음의 압도적인 풍성함이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기독교의 복음이 가진 위대한 역사적 방향성이자 신성한 흐름입니다. 하나님을 떠난 이 타락한 죄악 세상의 모든 원리와 유산들은 대개 처음에는 눈이 부시도록 화려하고 찬란하게 시작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급격하게 부패하고 약화되어 종국에는 비참한 파멸과 허무의 종착역으로 미끄러집니다. 세상이 주는 청춘과 쾌락은 처음에는 터질 듯한 열정이 있고, 가슴 뛰는 감동이 있으며, 영원할 것 같은 기대감을 주지만, 세월의 흐름 앞에 결국 기쁨의 온도는 싸늘하게 식어버리고, 아름답던 관계는 낡아 문드러지며, 땅에 두었던 모든 소망은 죽음이라는 거대한 절벽 앞에서 희미하게 바스러질 뿐입니다.

그러나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영원한 생명 안에서 새롭게 열리는 은혜의 잔치는 그 흘러가는 궤적이 세상과 본질적으로 다릅니다. 비록 그 과정 속에 혹독한 겨울과 십자가의 좁은 문을 통과하는 아픔이 있을지라도, 만물의 통치자이신 주님이 인생의 항아리에 개입하시고 좌정하시는 순간, 우리의 나중 삶은 처음 삶보다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찬란하고 아름다워집니다. 기독교의 복음은 단순히 에덴동산의 무구했던 과거 상태로의 소박한 회복(Restoration)을 넘어, 그리스도의 고난과 연합하여 완성되는 훨씬 더 깊고 영광스러운 ‘새 가치로의 재창조(New Creation)’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러한 복음의 법칙이,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의 삶에 현실적인 고난이나 아픔이 모두 사라지고 우리가 원하는 이기적인 방식대로 모든 경제적, 환경적 조건들이 즉시 평탄하게 좋아진다는 식의 저급한 번영신학을 의미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참된 신앙의 길 위에는 여전히 눈물 골짜기가 존재하며, 뼈를 깎는 인내와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 하는 기나긴 침묵의 터널이 필연적으로 수반됩니다.

그러나 우리가 십자가 붙들고 끝까지 이 길을 걸어갈 수 있는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붙들린 우리의 인생은 궁극적으로 사망의 권세를 깨부수고 영원한 생명과 하늘의 기쁨을 향해 나아간다는 종말론적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갈보리 언덕의 처절한 십자가의 죽음이 마침내 부활의 찬란한 영광으로 이어졌듯이, 오늘 우리가 겪는 처절한 결핍은 도리어 하나님의 살아계심을 경험하는 은혜의 문이 될 수 있습니다. 세상의 조롱과 수치는 하나님의 주권 안에서 가장 고결한 은혜의 자리가 될 수 있으며, 내 힘이 꺾인 실패의 자리는 주님이 우리를 새로운 사명의 도구로 부르시는 위대한 출발선이 될 수 있습니다. 가나의 혼인 잔치는 바로 이 기적 같은 복음의 위대한 우상향 방향성을 한 편의 서사시처럼 아름답고 웅장하게 증언해 줍니다.

6. 오늘, 우리의 메마른 가나의 현장에 찾아오시는 구원자를 향한 정직한 고백

가나의 혼인 잔치가 고발하는 영적 현실과 위로는, 관념적인 상상 속에 머무는 종교적 교리가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성도들의 팍팍한 삶의 현장에 그대로 적용되는 지극히 실제적이고 역동적인 복음입니다. 우주의 통치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거룩하고 웅장한 성전의 보좌나 신학자들의 메마른 토론장 속에서만 제한적으로 일하시는 격리된 신이 아닙니다. 그분은 사람들이 모여 밥을 먹고, 울고 웃으며, 일상적인 한계에 부딪혀 발을 동동 구르는 지극히 세속적이고 평범한 혼인 잔치의 한복판, 우리의 가난한 생활 문제 한가운데에 친히 찾아오셔서 역사하시는 성육신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은 삶의 영역을 거룩한 영적 영역과 속된 세속적 영역으로 이분법적으로 나누어, 교회 안에서만 경건한 척 살아가는 현대인들의 이중적인 종교적 태도에 거대한 신학적 타격을 가합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교회 의자에 앉아 드리는 엄숙한 예배의 형식을 받으실 뿐만 아니라, 우리가 돌아가 마주해야 하는 깨어진 가정의 비명, 눈물 어린 일터의 중압감, 꼬여버린 인간관계의 실타래, 육신의 질병과 연약함, 당장 내일의 생계를 걱정해야 하는 물질의 유한함, 그리고 아무에게도 말하지 못해 밤마다 쏟아내는 고독한 눈물의 모든 문제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전 실존을 눈동자처럼 아끼시고 깊은 관심을 기울이고 계십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보기에 지극히 사소하고 세속적이라 여겨지는 부끄러운 문제들조차도, 주님의 보좌 앞에서는 가장 고결하고 강력한 기도의 제목이 될 수 있습니다. 세상 그 누구에게도 자존심 상해 말하지 못하는 치명적인 영육 간의 결핍이라 할지라도, 주님의 피 묻은 발치 앞에는 부끄러움 없이 다 쏟아놓을 수 있습니다. 결핍을 대하는 마리아의 기도는 현란한 수식어 없이 지극히 단순하고 정직했습니다. “포도주가 없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 역시 복잡한 종교적 언어를 걷어내고, 주님 앞에 엎드려 이토록 단순하고 정직하게 부르짖어야 합니다.

“주님, 제 메마른 영혼 속에 구원의 기쁨이 사라진 지 오래입니다. 주님, 거친 풍파로 얼룩진 제 가정에 서로를 품을 사랑의 포도주가 턱없이 부족합니다. 주님, 막막한 현실의 벽을 돌파할 하늘의 지혜가 제게는 없습니다. 주님, 세상의 조롱 앞에 제 연약한 믿음이 뿌리째 흔들리고 있습니다.” 이처럼 자신의 완전한 가난함과 바닥남을 감추지 않고 주님 앞에 날것으로 드러내는 정직한 파산 고백야말로,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은혜가 비로소 우리 삶에 개입하여 침투해 들어오는 거룩한 통로가 됩니다.

그리고 이처럼 정직한 눈물로 기도의 자리를 파수한 성도들은, 마땅히 자신의 삶을 쳐서 복종시키는 순종의 제단으로 나아가야만 합니다. 하인들을 향해 던진 마리아의 마지막 당부는 가나의 이적을 완성하는 결정적인 영적 열쇠가 됩니다. “너희에게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그대로 하라.” 이것이 가나의 혼인 잔치가 오늘날 우리에게 남기는 기도의 핵심적인 종착지입니다. 참된 기도는 골방의 감정적 카타르시스나 뜨거운 부르짖음 자체로 종결되어서는 안 되며, 반드시 주님의 뜻에 나의 온 삶을 꺾어 복종시키는 ‘실천적 순종’의 행보로 이어져야만 합니다.

주님 앞에 나의 처절한 결핍과 무능함을 눈물로 고백했다면, 이제는 내 이성과 자아의 목소리를 잠재우고 주님이 내 영혼의 세미한 음성 속에 명령하시는 가장 작은 일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비록 내 이성으로는 도저히 용납되지 않을지라도 “가서 먼저 화해하고 손을 잡으라” 하시면 나의 교만을 꺾고 화해의 걸음을 떼어야 하며, “아무것도 하지 말고 잠잠히 나의 일하심을 기다리라” 하시면 불안의 요동을 멈추고 묵묵히 기다려야 하고, “네게 남은 마지막 작은 자원을 털어 항아리의 아귀까지 채우라” 하시면 계산기를 두드리지 말고 묵묵히 온 삶을 다해 그 자리를 채워내야 합니다. 물을 포도주로 바꾸시는 초자연적인 창조의 권능은 오직 주님의 전능하심으로만 일어나는 역사이지만, 그 거룩한 권능이 흘러가는 은혜의 통로에는 언제나 인간의 자아를 장사 지낸 ‘믿음의 순종’이라는 파이프라인이 놓여 있기 때문입니다.

7. 가나의 혼인 잔치가 전하는 복음의 종극적 결론

요한복음 2장의 가나 혼인 잔치 서사가 온 천하에 우뚝 서서 선포하는 복음의 종극적인 결론은 명확하고 위대합니다. 우리의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인간의 비참한 결핍과 파산을 하늘의 찬란한 풍성함으로 뒤바꾸시는 전능하신 왕이십니다. 인간의 죄악이 가져온 모든 수치와 조롱을 하늘의 거룩한 기쁨과 영광으로 바꾸시는 능력의 주이십니다. 아무런 생명력 없이 외면만 씻어내기만 하던 율법적 정결의 물을, 영혼을 적시고 잔치를 축제로 만드는 새 언약의 구원의 포도주로 바꾸시는 은혜의 주이십니다. 그리고 마침내 이 첫 표적이 가리키던 궁극적인 지점, 곧 갈보리 십자가의 처절한 죽음과 삼일 만의 찬란한 부활을 통해, 인류를 옥죄던 영원한 절망과 죽음의 저주를 영원한 승리와 생명의 축제로 뒤바꾸신 온 우주의 구세주이십니다.

장재형 목사의 가나 혼인 잔치 해석이 오늘날 위기에 직면한 이 세대의 성도들에게 던지는 가장 핵심적인 메시지는 타협 없이 선명합니다. 기독교 신앙이란 내 삶에 아무런 결핍이 없는 척, 아무런 상처와 문제가 없는 척 거룩한 종교의 가면을 쓰고 위선을 떠는 율법주의가 결코 아닙니다. 오히려 자신의 참혹한 부족함과 밑천의 바닥남을 온 천하에 정직하게 인정하고, 그 깨어진 마음의 파편들을 가지고 주님의 은혜 보좌 앞으로 겸비하게 나아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 생각과 이성을 압도하는 주님의 살아있는 말씀 앞에서, 비록 작고 미천할지라도 오늘 내가 할 수 있는 작은 순종의 발걸음을 묵묵히 시작하는 것입니다. 바로 그때, 우리의 얕은 지혜로는 감히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하나님의 초자연적인 역전의 드라마가 펼쳐지기 시작합니다. 평생을 채우지 못해 텅 비어 있던 외로운 돌항아리들이 하늘의 신령한 신성으로 가득 채워지고, 아무런 맛도 색도 없던 밋밋한 맹물 같은 우리의 일상이 온 공동체를 살려내고 치유하는 생명의 포도주로 질적 전환을 이루며, 인간의 힘으로는 이제 모든 잔치가 끝났다고 절망하며 마침표를 찍으려던 그 실패의 자리에, 처음보다 훨씬 더 찬란하고 완벽한 하나님의 나중 은혜가 폭포수처럼 임하게 되는 것입니다.

오늘 당신의 삶의 한복판에도, 남들에게는 말 못 할 포도주가 완전히 떨어져 버린 차가운 빈자리가 존재할 수 있습니다. 영혼을 채우던 구원의 기쁨이 사라져 버린 자리, 사명을 감당할 영육 간의 힘이 부족하여 주저앉은 자리, 사랑하던 이들과의 관계가 칼날처럼 어그러져 피 흘리는 자리, 한 치 앞도 내다볼 수 없어 미래가 안개처럼 불안한 절망의 자리. 그러나 그 빈자리를 바라보며 내 인생의 잔치는 여기서 비참하게 끝이 났다고 낙심하며 단정 짓지 마십시오.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인류의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는 다른 어떤 화려한 자리가 아니라, 바로 그 인간의 처절한 결핍과 수치가 폭로된 자리에서 자신의 첫 번째 영광스러운 표적을 행하셨습니다. 그 주님은 시공간을 뚫고, 오늘날 여전히 눈물 흘리고 있는 당신만의 고독한 가나의 현장 속으로 변함없이 찾아오십니다. 그리고 그분이 우리의 순종을 통해 마침내 빚어내실 복음의 나중 포도주는, 언제나 우리가 처음에 가졌던 그 어떤 세상의 것보다 훨씬 더 깊고, 넓으며, 상상할 수 없을 정도로 풍성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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在绝境之海遇见恩典 – 张大卫牧師 (Olivet University)

英国浪漫主义画家约瑟夫·马洛德·威廉·透纳(J. M. W. Turner),为了在画布上呈现人类站在巨大自然面前的无力,曾走向狂风暴雨肆虐的冬日海洋深处。他将自己的身体绑在桅杆上,任由汹涌的波涛与风雨冲击全身。后来,他透过漆黑海面上剧烈摇晃的一艘船,令人惊叹地描绘出无法掌控的人生绝望,以及人类存在深处的恐惧。

我们的生命也像透纳的画布一样,常常会遭遇突如其来的狂风。当指南针失去方向,连桅杆也折断,在绝望的中心,我们究竟应当把目光投向哪里?张大卫牧师透过《使徒行传》第27章所记载的保罗惊险航行指出,人在即将沉船的悬崖边缘,反而会遇见最灿烂闪耀的救恩护理。

漂流破碎的时间之上,流暖的

我们常常在与自己的意愿无关、突然袭来的人生风暴面前,将神的“预定”误解为冰冷的宿命论。仿佛一切早已被决定,人无论如何挣扎都毫无用处,只能被压迫在无力摆脱的枷锁之中。

然而,面对这种浅薄的误解,张大卫牧师提出了温暖而深刻的神学洞见。他从圣经字里行间所读出的神的预定,并不是把我们强行推入盲目浪潮中的暴力,而是珍视每一个人独特价值的良善、慈爱之计划。这并不是冷漠地操纵我们,而更像是一封邀请函,呼召我们进入与创造主最亲密、最具人格性的关系之中。

在这部从世界被创造以前便开始书写的伟大福音叙事里,我们不再是偶然被抛入大海的漂流者,而是带着明确目的、被重新塑造的宝贵航海者。

漆黑深夜里,守住船的一人信心

《使徒行传》第27章中出现的“友拉革罗”这场巨大狂风,象征着无情摇撼我们日常生活与内心世界的苦难。在那艘连船长和船主这些世上的专家都失去控制、连生存盼望也彻底断绝的绝望之船上,讽刺的是,竟然有一位以囚犯身份被捆绑的保罗。

当所有人都被死亡的恐惧笼罩、战兢发抖时,保罗一个人坚定的信心,成了守住船头的属灵灯塔。他在众水手面前勇敢宣告神“不要惧怕”的声音,并成为奇迹的通道,使与他同船的276人都得以存活。

在这段深刻的圣经默想旅程中,我们看见,一个人完全的顺服与信靠,究竟拥有何等伟大的生命力。一个清醒守望的灵魂所怀有的坚定信心,绝不会只停留在个人安慰之中;它会成为神圣的救生艇,拯救正在崩塌的家庭,也拯救正在动摇的共同体。

晃的船之下,大的救恩

两千年前发生在地中海中央、充满激烈求生与恩典的这段记录,之所以能够完整地抵达今天的我们,是因为“路加”在摇晃的船舱中仍默默执笔的献身。张大卫牧师从路加的态度中,照亮了属灵记录的重要性:即使身处生死交错的可怕危机,他仍没有遗漏神工作的每一个瞬间。

即便眼前的现实黑暗而痛苦,我们仍将自己所经历的无数艰难、彻底悔改的泪水,以及那些微小却确实的祷告蒙应允的时刻,一天天记录下来。这绝不是单纯地写日记。它是一个伟大的过程,能将痛苦的失败也打磨成日后为他人所用的属灵资产;它也是一种神圣的传承方式,把不改变的救恩证据交给下一代。

今天你含泪写下的一行真实记录,终有一天会成为宝贵的指南针,引导某个与你一样遭遇风浪的人走向生命。

在封大海的开启新的航行

当所有货物都被抛入漆黑的大海,连所倚靠的船也碎裂成片时,世界称之为毁灭。然而,以真实信仰的眼光来看,对于属神的人而言,绝望绝不可能成为句号。

这篇令人惊叹的讲道,使我们的目光不再停留于破碎船只的残片,而是转向沉船之后重新踏上的陌生海岸——马耳他。正是在那被人认为再也无法前进的死路之地,神为保罗打开了新的事奉之门,而这也成为书写另一段生命历史的灿烂起点。

只有当人生的狂风把我们徒然紧握的欲望全都击碎之后,神所预备的真正恩典目的地,才终于以宏伟的姿态显明出来。

此刻,你的船正在经过怎样汹涌的风浪?即使身处一切都仿佛已经结束的黑暗暴风雨中,我们也不应忘记:在那漆黑的大海之上,仍有一位以不变之爱紧紧握住我们船舵的主。

“不要惧怕。”

愿这曾在友拉革罗可怕轰鸣中,细微却坚定地响在保罗耳边的声音,也温暖地临到今天艰难支撑着一天的你,临到你空荡的内心深处。

当你以为自己已经失去一切,跌落到人生最低谷的那个冰冷时刻,你会就这样坐在挫折与怨恨之地不再起身吗?还是愿意缝补撕裂的帆,再一次升起盼望之锚,继续展开那伟大的信心航行?

猛烈的波浪或许暂时会摇撼我们的船,但那向着我们开始的、深邃而蔚蓝的护理之航,绝不会停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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絶体絶命の海で出会った恵み – 張ダビデ 牧師 (Olivet University)

イギリスのロマン主義画家ジョゼフ・マロード・ウィリアム・ターナー(J. M. W. Turner)は、巨大な自然の前に立つ人間の無力さをキャンバスに描き出すため、激しい暴風雨が吹き荒れる冬の海のただ中へと進み出ました。マストに自らの身を縛りつけ、荒れ狂う波と雨風を全身で耐え抜いた彼は、漆黒の海の上で揺れ動く一隻の船を通して、制御することのできない人生の絶望と人間の実存的な恐れを、驚くほど鮮やかに描き出しました。私たちの人生もまた、ターナーのキャンバスのように、予告なく吹きつける激しい嵐に直面することがあります。羅針盤は方向を失い、マストさえ折れてしまった絶望のただ中で、私たちはいったいどこに視線を向けるべきなのでしょうか。張ダビデ牧師は、使徒行伝27章に記されたパウロの危険な航海を通して、難破寸前の崖っぷちにおいてこそ、最もまばゆく輝く救いの摂理に出会うのだと語ります。

難破した時間の上を流れるかな

私たちはしばしば、自分の意思とは関係なく押し寄せる人生の嵐の前で、神の「予定」を冷たい運命論として誤解してしまいます。すべてがすでに定められており、人間がどれほどもがいても意味がない、抑圧的で無力な束縛のように感じてしまうのです。しかし、このような浅薄な誤解に対して、張ダビデ牧師は温かく深みのある神学的洞察を提示します。彼が聖書の行間から読み取る神の予定とは、私たちを盲目的な波の中へ突き落とす暴力ではなく、一人ひとりの固有の価値を尊く見つめてくださる、善良で慈しみに満ちた愛の計画です。それは私たちを無感覚に操るものではなく、創造主との最も親密で人格的な関係の中へと招く招待状のようなものです。世の創造以前から書き始められたこの偉大な福音の物語の中で、私たちは偶然海に投げ込まれた漂流者ではなく、明確な目的を持つ尊い航海者として新しく生まれ変わるのです。

の夜、船首を守ったただ一人の信仰

使徒行伝27章に登場する「ユーラクロン」という巨大な暴風は、私たちの日常と内面を容赦なく揺さぶる苦難を象徴しています。船長や船主といった世の専門家たちでさえ統制力を失い、生き延びる望みまでも完全に断たれてしまったその絶望の船の上には、逆説的にも、囚人の身分として縛られていたパウロが乗っていました。すべての人が死の恐怖に包まれて震えていた時、パウロ一人の揺るぎない信仰が、船首を守る霊的な灯台となりました。彼は「恐れてはならない」という神の声を船乗りたちの前で大胆に宣言し、自分と共に船に乗っていた276人すべての命を救う奇跡の通路となりました。この深い聖書黙想の旅の中で、私たちは一人の完全な従順と信頼が、どれほど偉大な生命力を持つのかを悟るようになります。目覚めている一つの魂の堅固な信仰は、決して個人の慰めにとどまらず、崩れかけた家庭と揺れ動く共同体全体を生かす聖なる救命艇となるのです。

れ動く船倉の下で記された救いの偉大な物語

二千年前、地中海のただ中で繰り広げられたこの激しい生存と恵みの記録が、今日の私たちにそのまま届いているのは、揺れ動く船倉の下でも黙々とペンを執った「ルカ」の献身のおかげです。張ダビデ牧師は、生死を行き来する恐ろしい危機の中でも、神が働かれる瞬間を漏らすことなく書き残したルカの姿勢から、霊的記録の重要性を照らし出します。目の前の現実が暗く苦しいものであったとしても、私たちが経験した数々の困難、徹底した悔い改めの涙、そして小さいながらも確かだった祈りの応答の瞬間を、一日一日書き記していくことは、決して単なる日記を書く行為ではありません。それは、痛ましい失敗さえも、やがて誰かのための霊的な資産へと練り上げていく偉大な過程であり、次の世代に変わることのない救いの証しを受け継がせる聖なる伝承の方法です。今日、あなたが涙で書き下ろした一行の真実な記録は、いつの日かあなたと同じ嵐に出会った誰かに、命の道を示す大切な羅針盤となるでしょう。

閉ざされた海の果てに開かれる新たな航海

すべての荷物を黒い海へ投げ捨て、頼りにしていた船までも粉々に砕け散った時、世はそれを破滅と呼びます。しかし、真の信仰のまなざしで見るなら、神の人にとって絶望は決して終止符にはなり得ません。この驚くべき説教は、私たちの視線を砕けた船の破片ではなく、難破の後に新しく足を踏み入れたマルタという見知らぬ浜辺へと向けさせます。もはや進むことのできない行き止まりだと思われたまさにその場所で、神はパウロに新たな働きの扉を開いてくださり、それはまた別の命の歴史を書き記す輝かしい出発点となりました。人生の嵐が、私たちがむなしく握りしめていた欲望をすべて打ち砕いた後にこそ、神が備えてくださった真の恵みの目的地が、その壮大な姿を現すのです。

今、あなたの船はどのような激しい波を通過しているでしょうか。すべてが終わったと思える暗い暴風雨の中でも、私たちが忘れてはならない事実があります。それは、漆黒の海の上で、なおも私たちの船の舵をしっかりと握っておられる方の変わらぬ愛です。「恐れてはならない。」ユーラクロンの恐ろしい轟音の中でも、パウロの耳元に静かに響き渡ったその声が、今日一日を必死に耐え抜いているあなたの空虚な内面にも、温かく届くことを願います。すべてを失い、人生の底に落ちたと思えるその冷たい瞬間、あなたは挫折と恨みの場にそのまま座り込むのでしょうか。それとも、破れた帆を繕い、もう一度希望の錨を上げて、信仰の偉大な航海を続けていくのでしょうか。荒々しい波は一時的に私たちの船を揺さぶることがあっても、私たちに向かって始められたその深く青い摂理の航海は、決して止まることはありません。

日本オリベットアッセンブリー教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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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gracia encontrada en el mar al borde del abismo – Pastor David Jang (Olivet University)

El pintor romántico británico Joseph Mallord William Turner, con el fin de plasmar en el lienzo la impotencia del ser humano ante la inmensidad de la naturaleza, se adentró en medio de un mar invernal azotado por una feroz tormenta. Atado al mástil, soportó con todo su cuerpo las olas violentas, el viento y la lluvia. Así logró describir de manera sobrecogedora, a través de un barco sacudido sobre un mar negro como la noche, la desesperación incontrolable de la vida y el temor existencial del ser humano. También nuestra vida, como el lienzo de Turner, se enfrenta a veces a vendavales inesperados. En medio de la desesperación, cuando la brújula pierde su rumbo y hasta el mástil se quiebra, ¿hacia dónde debemos dirigir la mirada? El pastor David Jang afirma que, a través del peligroso viaje de Pablo registrado en Hechos 27, llegamos a encontrarnos, precisamente al borde del naufragio, con la providencia de salvación que brilla con mayor esplendor.

La cálida providencia que fluye sobre el tiempo del naufragio

A menudo, ante las tormentas de la vida que irrumpen sin relación con nuestra voluntad, malinterpretamos la “predestinación” divina como un destino frío e inexorable. La sentimos como un yugo opresivo e impotente, en el que todo ya está decidido y en el que, por más que el ser humano se esfuerce, nada puede cambiar. Sin embargo, frente a esta comprensión superficial, el pastor David Jang presenta una visión teológica cálida y profunda. La predestinación de Dios que él lee entre las líneas de la Biblia no es una violencia que nos arroja a olas ciegas, sino un plan bondadoso y lleno de amor, que valora con ternura la dignidad única de cada persona. No se trata de una fuerza que nos manipula insensiblemente, sino de una invitación a entrar en la relación más íntima y personal con el Creador. Dentro de esta gran narrativa del evangelio, escrita desde antes de la creación del mundo, no somos náufragos arrojados al mar por casualidad, sino valiosos navegantes renacidos con un propósito claro.

En la noche más oscura, la fe de un solo hombre guardó la proa

El enorme vendaval llamado “Euraquilón”, que aparece en Hechos 27, simboliza las aflicciones que sacuden sin piedad nuestra vida cotidiana y nuestro mundo interior. En aquel barco de desesperación, donde incluso los expertos del mundo —el capitán y el dueño de la nave— habían perdido el control y toda esperanza de sobrevivir se había desvanecido, se encontraba paradójicamente Pablo, atado como prisionero. Cuando todos temblaban dominados por el miedo a la muerte, la fe firme de un solo hombre se convirtió en un faro espiritual que guardaba la proa. Pablo proclamó con valentía ante los marineros la voz de Dios que decía: “No temas”, y se convirtió en un canal de milagro por medio del cual fueron salvadas las 276 personas que iban con él en la embarcación. En este profundo camino de meditación bíblica, llegamos a comprender cuánta fuerza vital poseen la obediencia plena y la confianza íntegra de una sola persona. La fe firme de un alma despierta nunca se queda solo en el consuelo personal; se convierte en una santa barca salvavidas capaz de rescatar a una familia que se derrumba y a toda una comunidad que tambalea.

La gran narrativa de la salvación escrita bajo una cubierta sacudida

El hecho de que este intenso registro de supervivencia y gracia, ocurrido hace dos mil años en medio del mar Mediterráneo, haya llegado intacto hasta nosotros se debe a la dedicación de Lucas, quien tomó la pluma en silencio incluso bajo una cubierta sacudida. El pastor David Jang ilumina la importancia del registro espiritual a partir de la actitud de Lucas, quien, aun en medio de una crisis terrible entre la vida y la muerte, no dejó pasar ninguno de los momentos en que Dios estaba obrando. Aunque la realidad ante nuestros ojos parezca oscura y dolorosa, escribir día tras día las numerosas dificultades que hemos atravesado, las lágrimas de un arrepentimiento profundo y los momentos pequeños pero seguros de respuesta a la oración no es simplemente llevar un diario. Es un gran proceso que transforma incluso los fracasos más amargos en un patrimonio espiritual para alguien en el futuro, y también una forma santa de transmitir a la próxima generación el testimonio inmutable de la salvación. Una sola línea de verdad sincera que hoy escribas con lágrimas puede convertirse algún día en una brújula preciosa que guíe hacia la vida a alguien que atraviese una tormenta semejante a la tuya.

Un nuevo viaje que se abre al final de un mar cerrado

Cuando toda la carga fue arrojada al mar oscuro y aun el barco del que dependían quedó hecho pedazos, el mundo llama a eso destrucción. Pero, visto desde la perspectiva de una fe verdadera, la desesperación nunca puede ser el punto final para una persona de Dios. Este sorprendente sermón dirige nuestra mirada no hacia los fragmentos del barco destruido, sino hacia la desconocida playa de Malta, donde Pablo puso de nuevo sus pies después del naufragio. Precisamente en aquel lugar que parecía un callejón sin salida, donde ya no era posible avanzar más, Dios abrió para Pablo una nueva puerta de ministerio; y aquello se convirtió en un punto de partida resplandeciente para escribir otra historia de vida. Solo después de que las tormentas de la vida rompen todos los deseos a los que nos aferrábamos inútilmente, comienza a revelarse con majestad el verdadero destino de gracia que Dios había preparado.

¿Qué clase de fuerte tempestad está atravesando ahora tu barco? Incluso en medio de una oscura tormenta, cuando parece que todo ha terminado, no debemos olvidar esta verdad: sobre el mar negro como la noche, hay Alguien que sigue sosteniendo firmemente el timón de nuestra embarcación con un amor inmutable. “No temas.” Que aquella voz, que resonó suavemente en los oídos de Pablo aun entre el estruendo aterrador del Euraquilón, llegue también con calidez al interior vacío de quien hoy resiste con dificultad un día más. En ese instante frío en el que parece que lo has perdido todo y has tocado el fondo de la vida, ¿te quedarás sentado en el lugar de la frustración y el resentimiento, o remendarás las velas rotas, levantarás una vez más el ancla de la esperanza y continuarás el gran viaje de la fe? Las olas violentas podrán sacudir por un momento nuestra embarcación, pero la profunda y azul travesía de la providencia que comenzó para nosotros jamás se detendr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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