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재형목사 – 제자의 부르심

1. 깊은 데로 나아가 그물을 내리라는 부르심과 제자의 사명

예수님께서 갈릴리 호수, 곧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 계실 때의 장면(눅 5:1-11)은 우리가 이미 여러 복음서를 통해서도 익히 알고 있는 사건이지만, 누가복음 5장은 마태복음 4장과 비교했을 때 조금 더 상세하고 생생한 묘사를 담고 있습니다. 특히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눅 5:4)”는 명령과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눅 5:10)”는 선언은 제자로 부름받은 이들의 구체적 사명을 직접적으로 보여줍니다. 갈릴리 어부로 살던 베드로와 안드레, 또 야고보와 요한 같은 평범한 이들이 어떻게 ‘사람 낚는 어부’가 되는지에 대한 전환점을 극적으로 드러내 주는 장면입니다.

장재형(장다윗)목사는 이 본문을 두고, 예수님께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라”라고 하신 말씀을 ‘천명(天命)’이자 ‘그레잇 커미션(Great Commission)’을 이루는 실제적 행동 지침으로 풀이합니다. 물고기를 잡던 어부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는 그 전이(轉移)는 인간의 노력이나 지식으로는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차원의 도약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이 장면에서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5:8)”라며 두려워하고, 예수님은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눅 5:10)”라고 하십니다. 이처럼 부름받은 제자가 겪는 두려움과 설렘, 그리고 과거와 전혀 다른 길을 가게 될 것이라는 예수님의 예언이 동시에 드러나는 사건이 바로 눅 5:1-11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라’라는 말씀에 대해 다시금 묵상해야 합니다. 이것은 물고기를 잡고 안 잡고를 넘어서는 문제입니다. 누군가에게는 인생의 한가운데서 진지하게 자신이 받은 소명을 확인해야 하는 결정적 부르심이 될 수 있습니다. 게네사렛 호숫가에서의 이 사건은 우리의 삶에도 계속해서 반복되는 본질적 질문을 던집니다. 과연 우리는 어떤 목적을 위해 살아가고 있으며, 무엇을 위해 부름을 받았는가? 예수님은 어부였던 제자들에게 “깊은 곳으로 나가라”고 하셨습니다. 얕은 물가에서 조금 잡다가 실패에 지치고 낙심해 그물을 씻고 있던 그들에게, 상식과는 전혀 다르게, 다시 한번 바다로 나가서 그물을 내려보라고 하십니다. ‘밤이 새도록 수고했지만 빈 그물이었습니다’라는 베드로의 현실 고백이 무색할 정도로, 주님의 말씀 한 마디가 상황을 뒤집는 열쇠가 됩니다.

장재형목사는 이것이 바로 신앙 안에서 일어나는 역설적 진리임을 강조합니다. 현실적으로는 ‘이미 노력해 봤다, 안 된다, 해 봤는데 빈손이었다’라는 상황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전도와 선교의 현장에서도 그럴 때가 많습니다. 아무리 애써도 결과가 보이지 않고 열매가 안 맺히는 것 같아 보이는 순간이 다가옵니다. 그런데 주님의 말씀, 즉 “깊은 데로 가라”는 명령에 다시금 순종할 때, 그물이 찢어지도록 고기가 잡히는 기적을 체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역사적이고도 상징적인 사건이 제자들의 ‘사람 낚는 어부’로서의 여정을 시작하게 하였습니다.

사실 베드로의 대답,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눅 5:5)”에는 중요한 원리가 들어 있습니다. 모든 인간적 경험과 지식, 게다가 지쳐 있는 몸과 마음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음에도, 하나님 말씀에 대한 믿음이 그를 다시 한번 순종하게 만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따라 그물을 내린 결과, 심히 많은 물고기가 잡혀 그물이 찢어지게 되었습니다. 다른 배를 불러서까지 도와 달라고 할 정도로 배가 가라앉을 만큼 고기를 잡은 것은, 주님의 말씀을 따라 움직일 때 나타나는 풍성함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전도의 사역 역시 이와 유사한 패턴을 지닙니다. 사람을 구원하는 일, 영혼을 인도하는 일은 인간의 능력과 지혜가 아닌, 전적으로 말씀에 대한 순종과 성령의 역사로 이뤄지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그 광경을 보고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했을 때, 이는 단순히 ‘죄책감’을 느꼈기 때문만이 아니라, ‘이런 능력을 보이시는 분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구나, 나의 삶은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것을’이라는 절실한 깨달음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전능하신 주님 앞에서 스스로를 의지하는 삶이 얼마나 한계가 뚜렷한지를 체감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며 그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 보이십니다. 이처럼 전혀 다른 차원으로 초대받는 것은 인간적으로 보면 두렵고 낯선 도전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약속과 명령이 있는 그 자리에는 반드시 성취가 따릅니다.

이제는 이 예수님의 말씀을,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진 소명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흔히 이 장면을 전도에 적용하면서, ‘무엇을 먹고 살 것인가?’라는 일상의 문제와 ‘사람을 구원하는 사역’이라는 영적인 문제가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사실 그동안의 교회사에서 “사람 낚는 어부가 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전도와 선교의 핵심 구절로 사랑받아 왔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에 기초해 교회가 부흥해 왔으며, 많은 성도들이 헌신과 순종을 배웠습니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두고 ‘깊은 데로 가라는 말씀은 전 세대, 전 세계에 걸쳐 변치 않는 하나님의 부르심’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이 본문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또 다른 관점은, ‘어부’로서의 정체성을 벗고 ‘사람 낚는 어부’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입는 과정이 매우 짧은 순간에 일어났다는 점입니다. 보통 인생의 커다란 전환점이 오려면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가라’고 하셨을 때 그가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렸고, 단숨에 그 역사를 체험했습니다. 그 체험이 곧 제자들의 길로 들어서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고, 마침내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랐습니다(눅 5:11). 그들은 그날 이후로 본업인 어부로의 삶을 전혀 이어가지 않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제는 삶의 우선순위와 궁극적 목적이 하나님 나라와 영혼 구원에 두어진 것입니다. 즉, 생계와 일상의 문제를 넘어서서, ‘그물질’ 자체의 의미가 바뀌어 버린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명령은 한 개인의 인생 전반을 재정립하게 만듭니다. 물고기를 위한 그물이 아닌 사람을 위해 던지는 그물, 일용할 양식을 넘어 영혼을 살리는 사명, ‘밤이 새도록 수고했음에도 얻은 것이 없음’에서 벗어나 ‘주님의 말씀에 의지하는 놀라운 승리’로 들어가는 변화. 이 전 과정이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실로 큽니다. 장재형목사는 ‘어부가 고기를 잡는 형식과 사람이 영혼을 구원하는 형식이 비슷해 보이나, 실제로는 전혀 다른 차원의 영역이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그 모습을 통해 누구나 이해하기 쉽게 복음을 설명하신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복음서의 스토리텔링적 특징이자, 예수님의 가르침 방식입니다.

대개 신학을 공부하는 이들이나 교회의 사역자들은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라”는 이 구절을 가지고 많은 설교를 해 왔습니다. 왜냐하면 전도의 현장이야말로 ‘깊은 데’와 같고, 우리의 노력으로는 결코 불가능해 보이는 곳에서 결국 주님의 능력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와 복음의 본질을 잃어버리거나, 혹은 전도의 현장을 떠나 뒷짐 지고 있을 때, 예수님의 이 말씀은 다시금 교회를 깨우는 소리가 됩니다. 헛수고로 끝난 것 같은 경험이 우리를 지치게 만들지만, ‘말씀에 의지하여’ 다시 한번 그물을 던지는 자는 예상치 못한 풍성함을 경험하게 됩니다.

장재형목사는 이러한 본문 해석을 토대로, 실제 교회 사역과 선교, 그리고 교육 영역에서 “깊은 데로” 나아가는 구체적 비전을 제시하기도 합니다. 가령 Great Commission University(GCU)를 설립하며, 교육 현장에서 지식만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의 영적 갈급함을 채우고, 그들을 세계 선교로 파송하려는 목적을 실현하고자 하는 것도 이 본문의 적용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그동안의 교회 교육이 형식과 전통에만 매몰되어 있었다면, 이제는 다시 한번 깊은 바다, 즉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는(마 28:19)’ 명령을 실제로 이뤄 낼 수 있는 장으로 삼자는 비전입니다.

장재형목사는 교회와 다양한 사역 단체, 그리고 개인의 비즈니스 현장에서도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라고 권면합니다. 그냥 자신에게 익숙하고 편안한 범위, 곧 얕은 물가에서만 그물을 던지는 것이 아니라, 두려울 정도로 깊고 넓은 바다를 향해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미지의 도전이 있고, 실패할 수도 있다는 공포가 도사리고 있지만, 주님이 함께하시고 말씀을 주시는 그 자리에는 반드시 놀라운 승리가 보장된다는 믿음을 가지라고 가르칩니다.

이처럼 눅 5:1-11의 말씀은 물고기를 잡는 사건 자체가 기적이라기보다는, 어부들이 전혀 다른 차원의 부르심을 받고 그 길에 순종함으로써 보게 된 ‘하나님의 세계’를 체험하는 데에 핵심이 있습니다. 그들의 빈 그물이 풍성한 그물로 바뀌는 전환, 깊은 데로 나아가는 용기와 주님의 말씀에 대한 온전한 신뢰,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통해 결국은 ‘사람 낚는 어부’로 살아가게 되는 인생의 대변혁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이 부름에 적극적으로 반응하여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랐다는(눅 5:11) 결단이, 오늘날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고 장재형목사는 말합니다. 그 부름이 교회 안에서 기도하며 대기하는 소극적 태도가 아니라, 전도와 선교의 현장으로 실질적으로 나아가는 능동적 태도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사건이 보여주는 핵심은 ‘주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압축될 수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1장 26절에서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결국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쓰임받도록 구별된 인생이 됩니다. 그리고 그 구체적 모양이 바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라’는 명령을 실행하는 데서 나타납니다. 우리의 소명이란, 비단 교회 안의 예배와 봉사에 국한되지 않고, 삶의 전 영역에서 사람들을 구원하고 영혼을 살리는 방향으로 집중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제자들의 두려움도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입니다.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는 말씀을 듣기 전까지, 베드로에게는 자신이 알지 못했던 더 큰 세계에 대한 ‘막연한 공포’가 있었습니다. 어부로서의 삶에 만족하거나, 혹은 나름의 생존방식을 굳혀온 베드로 입장에서는, 사람 낚는 어부가 된다는 것은 전혀 다른 생태계를 경험하는 일이었습니다. 허나 그 두려움은 ‘설렘’과 ‘소망’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더 넓은 지경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 앞에서, 우리도 그 은혜 안에 들어가려면 과거의 안전지대를 떠나야 합니다. 이는 우리 각자의 영적 여정에서 상징적으로 반복됩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라”는 요구는, 처음엔 우리의 과거 실패나 두려움을 떠올리게 만들 수 있습니다. ‘이미 밤이 새도록 해 봤지만 결과가 없었다’는 베드로의 말처럼, 수차례 시도해도 안 되었던 것들에 대한 기억이 우리를 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결핍과 무력함을 뛰어넘어서 일하십니다.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자’고 결심할 때, 비로소 우리의 삶에 초자연적 열매가 맺히는 체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서 베드로는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어쩌면 이전에는, 자신이 경험한 바다에 대한 지식, 어부로서의 기술, 오랜 업(業)에 대한 노하우를 자랑스럽게 여겼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한마디 하실 때 모든 계산과 예측이 바뀌어 버립니다. 그때 인간은 자신의 제한성과 연약함을 절감하고, 주님 앞에 엎드려 ‘죄인임’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그 고백은 정죄감이나 좌절이 아니라, 새로운 차원으로 진입하는 통로가 됩니다.

그런 맥락에서, 장재형목사는 이 사건을 두고 우리도 ‘주님 앞에 더 낮아지고 순종할 때, 비로소 하나님이 열어주시는 더 깊은 물, 더 넓은 비전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이 교훈은 개인의 신앙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와 더 나아가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사역 전반에 적용됩니다. 선교지나 전도의 현장에 나가면, 특히 해외에 나가서 문화와 언어, 풍습이 전혀 다른 사람들 앞에서 복음을 전하려 시도할 때 빈 그물이 반복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지식이나 전략이 소용없을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이제는 저 깊은 곳으로 가라’고, ‘새로운 방식을 시도하라’고 말씀하실 때, 그 명령에 순종하는 자는 결국 풍성한 결실을 볼 수 있습니다.

장재형목사는 이 동일한 논리를 예술, 음악, 비즈니스, 학문, 사회봉사 등 다양한 영역으로 확장시킵니다. 예를 들어, 예술가라면 자기 작품을 통해 어떻게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할 수 있을지, 음악가라면 찬양과 세속 음악의 경계를 넘어 더 넓은 영역에서 사람들의 심령 깊은 곳을 울릴 수 있는 사역을 어떻게 펼칠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됩니다. 장사나 비즈니스를 하는 이들은 경제활동을 통해 어떻게 더 많은 사람을 주님께로 인도할 수 있을지 모색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움직임의 핵심에는 ‘주님의 말씀’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단순한 열심이나 방법론만으로는 한계가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5장은, 낯선 방식으로 나타나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과거의 경험이나 실패의 틀을 깨고 전혀 다른 차원의 부르심을 발견하게 되는 사건을 보여줍니다. 이 부르심은 곧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는 거대한 약속으로 이어지는데, 이는 제자들만이 아니라 오늘날 그리스도인인 우리 모두가 붙들어야 할 말씀입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로 살라는 명령은 곧 ‘생명을 구원하라’는 요청이기도 합니다. 한 명의 영혼이라도 더 구원코자 교회는 존재하며, 그리스도인은 이 사명을 위해 자신의 재능과 시간을 활용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라”는 이 말씀을 잊어버리고 살아간다면, 그것은 곧 소금이 짠맛을 잃은 상태(마 5:13)와 같을 것입니다.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밖에 내버려져 사람들에게 밟힐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의 사명, 그리스도인의 사명이 바로 이런 전도와 선교, 즉 사람을 구원하는 일에 있음을 분명히 자각해야 합니다. 아무리 교회가 크고, 재정적으로 안정되어 있으며, 프로그램이 다양해 보여도, 정작 사람 구원이라는 본질을 놓치면 소금의 짠맛을 잃은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처음 제자들이 거대한 부르심 앞에서 두려워했듯이, 우리도 나름의 긴장과 두려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무서워하지 말라”라고 하십니다.

그 부르심과 약속을 가슴에 새기고 우리가 새로운 차원으로 나아갈 때, 비로소 우리는 ‘빈 그물’의 처지에서 벗어나 영적 풍성함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전도와 선교는 결코 인간적인 계략이나 기술로만 되는 일이 아닙니다. 밤새도록 열심히 수고해도 못 잡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한마디와 함께할 때,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문이 활짝 열립니다. 이것이 갈릴리 어부였던 제자들에게 일어난 실제 사건이자, 오늘날 우리의 영적 현실에서 얼마든지 재현될 수 있는 복음의 능력입니다.

2. 추수의 때와 영혼 구원의 비전

마태복음 9장 35-38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병과 약한 것을 고치셨습니다. 그리고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마 9:36)”는 말씀이 이어집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영혼 상태를 꿰뚫어 보시고, 그들이 마치 목자 잃은 양처럼 방황하고 있음을 지적하십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유명한 비유가 바로 추수와 일꾼에 관한 말씀입니다.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마 9:37-38).”

장재형목사는 이 본문을 누가복음 5장의 ‘사람 낚는 어부’ 비유와 결합하여, 복음 전파와 영혼 구원이라는 동일한 사명이 두 가지 메타포(어부의 비유와 추수의 비유)를 통해 강조되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갈릴리 호수에서 ‘물고기를 잡는’ 행위가 전도의 상징이라면,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다”는 농경적 비유는 땅에서 영혼을 거두는 그림을 보여줍니다. 바다는 험난하고 거칠며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공간인 반면, 들판은 광활하고 햇빛 아래 노출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서로 다른 이미지이지만, 결국 동일하게 ‘사람을 구원하고 생명을 얻는 사역’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기독교 역사가 진행되는 모든 시대에 걸쳐 여전히 유효합니다. 이 시대에도 여전히 복음이 들려져야 할 땅이 넓고, 교회 밖에는 수많은 영혼이 목자 없는 양처럼 방황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꾼이 적다’는 문제는 과거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교회는 때로 건물을 더 크게 짓고, 프로그램을 늘리는 데 집중할지언정, 정작 한 영혼 한 영혼을 추수하는 ‘일꾼’을 키워 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전도와 선교는 ‘위임’하거나 ‘누군가가 하겠지’라고 방관하기 쉬운 분야로 전락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추수의 주인에게 청하라”라고 말씀하시면서, 적극적으로 일꾼을 세우라는 과제를 주셨습니다.

그 일꾼들이 곧 누가복음 5장의 ‘사람 낚는 어부’가 되는 이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리의 평범한 어부들을 부르시어, 세계 역사를 바꿀 ‘사도’로 만드셨습니다. 그들이 비록 당대 지식층도 아니었고, 정치·종교적 권력자도 아니었지만, 예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면서 세상에 복음을 전파하는 핵심 일꾼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직접 가르치셨던 천국 복음과 죄 사함의 메시지를 전 세계로 퍼뜨리는 일에 이들은 중추적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이것은 현대 교회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원리입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은 평범한 우리의 일상 속에서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라는 음성을 들려주실 수 있습니다.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라는 탄식을 여전히 우리의 심령에 새기시면서, 교회가 곧 그 일꾼을 양성하고 파송해야 함을 강하게 촉구하십니다.

장재형목사는 이 사명의식을 되살리기 위해, 교회와 목회자, 신학계, 그리고 일반 성도들의 마음가짐이 새로워져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오로지 “나의 신앙만 챙기고, 나의 구원만 보장받으면 된다”는 개인주의적 시각에서 벗어나, 복음이 땅끝까지 전해져야 한다는 ‘대사명(Great Commission)’을 삶의 중심에 두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8장 19-20절에 따르면, 예수님은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는 명령을 남기셨고, 이는 그리스도인의 공동체가 지상에서 절대적으로 붙들어야 할 과제입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며,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말씀하실 때, 예수님은 이어서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약속하십니다. 이는 결코 ‘혼자 떠나는 길’이 아니라, 주님이 친히 동행하시는 길임을 보여줍니다.

추수의 시점은 바로 지금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아직 준비가 덜 되었으니, 언젠가 때가 되면…’ 하고 미루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추수할 것은 많다”고 단언하셨고, ‘일꾼’만 준비된다면 당장 수확할 만큼 누렇게 익은 곡식이 널려 있다는 뜻입니다. 문제는 일꾼이 부족하다는 것이며, 이 말은 곧 교회와 성도들에게 “너희가 가라”는 도전을 안겨 줍니다. 실제로 복음 전파의 역사에서, 먼저 가서 생명을 건 헌신자들이 있었기에 새로운 지역, 새로운 문화권에서 교회가 세워지고, 영혼들이 구원을 얻었습니다.

이 시점에서, “추수의 주인에게 청하여 일꾼들을 보내 달라”는 기도가 교회 안에 깊이 울려 퍼져야 합니다. 그러나 기도로만 멈추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는 이들 자신이 답이 되어야 할 때도 많습니다. 장재형목사는 이 부분을 강조하면서, ‘기도하되 내가 직접 그 일꾼이 되겠다는 결심을 하라’고 도전합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과 소통하는 통로이며, 동시에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기폭제가 됩니다. 하나님은 구약 시대나 신약 시대나 언제나 기도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시고 그들을 부르셔서 구체적인 행동으로 옮기게 하셨습니다. 모세나 다윗, 이사야, 예레미야처럼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선지자들은 자기 부족함을 깨닫고도, 결국 주님의 명령을 따르기 위해 일어섰습니다. “제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는 이사야의 고백이 그러한 예입니다(사 6:8).

누가복음 5장의 어부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밤새도록 수고했으나 빈 그물을 체험하고,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에 다시 한번 그물을 내리는 과정을 통해 기적을 봤습니다. 그 기적은 단지 물고기의 풍성함만이 아니라, ‘이제 내가 무슨 일을 해야 하는가?’라는 깨달음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즉시 배와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랐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행위는 곧 자신들이 그동안 살아왔던 모든 우선순위와 가치관을 바꾸는 결단이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추수의 일꾼이자 사람 낚는 어부가 되어, 교회의 기초를 세우는 기가 막힌 역할을 감당하게 됩니다.

장재형목사는 이 과정을 오늘날의 교회와 성도들이 동일하게 밟아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우리의 빈 그물을 통렬히 인식하고, 주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다시금 그물을 던져야 합니다. 여기서 빈 그물이란, 단순히 전도에 실패했다거나, 교회 성장이 더디다는 의미만이 아닙니다. 나의 영혼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있거나, 말씀에 대한 갈급함 없이 형식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상태를 뜻하기도 합니다. 혹은 교회가 사회 안에서 진정한 빛과 소금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고, 자기 울타리 안에서만 만족하고 있는 상태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여러 모습이 ‘빈 그물’로 상징되는 영적 결핍입니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주님은 ‘깊은 데로 가라’고 하십니다. 다시금 말씀에 순종하라는 요청입니다.

추수 현장은 늘 새로운 도전을 요구합니다. 옛날 방식, 옛날 예배 형식, 옛날의 전도 방식을 고집하다 보면, 변화된 세대와 문화 속에서 복음이 유효적절하게 전달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본질적인 복음의 메시지는 절대로 변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죄와 죽음의 권세를 이기셨다는 사실은, 어떤 시대에도 가장 중요한 진리입니다. 하지만 이를 전달하는 방식과 우리가 뛰어들어야 할 ‘깊은 바다’의 풍경은 시대마다 달라질 수 있습니다.

한편, 마태복음 9장에서 예수님이 직접 보여주신 사역 방식, 즉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며 “가르치시고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는” 모습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예수님은 한 자리에 머무르거나 사람들을‘스스로 오게만’ 기다리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이 직접 사람들의 삶의 터전으로 들어가셨고, 영혼을 돌보고 육체의 질병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이는 우리도 사람들의 현실 한복판으로 뛰어들어가, 여러 가지 고통과 문제, 상처를 안고 있는 사람들을 직접 만나야 함을 보여줍니다. 목자 없는 양처럼 방황하는 이들에게 다가가 마음을 열고, 예수님의 사랑과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장재형목사는 이 대목을 강조하며, 교회가 더 이상 ‘건물 중심’ 혹은 ‘프로그램 중심’의 사고에 갇혀 있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 물론 예배당은 필요하고, 다양한 프로그램도 한 영혼을 돌보고 양육하는 데 유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추수’의 비유가 보여주듯, 추수는 들판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들판에 이삭이 익어 가듯, 세상 곳곳에서 사람들이 ‘복음’을 기다리며, 목자 없는 양처럼 여기저기 흩어져 있습니다. 교회가 정말 이 사람들을 돌보고 그들의 영혼을 살려 내려면, 교회가 있는 그 지역사회와 도시, 더 나아가 다른 나라와 문화권으로 기꺼이 나가야 합니다. 그곳에서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는 주님의 말씀을 다시 기억하며, 복음의 씨앗을 뿌리고 수확해야 하는 것입니다.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라는 지적은, 결국 우리 각자에게 “그러니 네가 가라”라는 호소로 다가옵니다. 언제까지 남이 해 주기를 바라고, ‘누가 대신 가겠지’라고만 생각할 것인가? 각 사람은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 속에서, 일꾼으로 부름받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 부르심은 목회자나 선교사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 안의 모든 성도들이 함께 감당해야 할 대사명입니다. 어떤 이들은 직장에서, 또 어떤 이들은 예술의 현장에서, 또 다른 이들은 교육의 장에서, 자신이 가진 재능과 기회를 통해 ‘사람을 낚는 어부’ 역할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다양한 분야로 확장된 선교 패러다임’이라고 부릅니다. 과거에는 선교사라 하면 해외로 나가 복음을 전하는 이들만을 떠올렸지만, 이제는 사회 모든 영역이 선교의 장이 될 수 있습니다. 미디어, 문화, 예술, 교육, IT, 비즈니스 등 어디든 복음이 필요한 곳이면 그곳이 바로 추수의 들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친히 “추수의 주인에게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고 가르치셨으므로, 교회는 그 일꾼들이 성장할 수 있도록 돕고, 파송하는 역할을 맡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9장의 ‘추수 비유’는 누가복음 5장에 나타난 ‘사람 낚는 어부’ 비유와 똑같은 주제를 담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의 마음, 곧 영혼을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을 지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다는 것은, 그들이 단순히 육체적으로 고생하고 있음을 넘어, 영혼이 방황하며 지치고 기진한 상태임을 보신 것이었습니다. 목자가 없는 양은 적의 공격에 무방비하며, 길을 잃으면 찾아갈 길도 모릅니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인생에서 길을 잃고 허무와 방황 속에 있습니다. 교회가 이 현실을 외면한다면, 이미 복음의 핵심을 놓치고 있는 셈입니다.

두 번째는, 실제로 그 영혼들을 거두어들일 추수 일꾼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사랑과 긍휼의 마음으로만 끝나서는 안 되고, 구체적인 실행력을 갖춰야 합니다. 말씀이 선포되고, 전도의 현장이 열려야 하며, 영혼들이 교회 안에서 양육과 제자훈련을 받아 또 다른 추수 일꾼으로 세워지는 선순환 구조가 마련되어야 합니다. 이런 선순환이야말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라”는 명령에 순종하는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그물이 찢어지도록 풍성한 고기를 잡는 은혜를 교회가 함께 나누고, 더 많은 이들을 구원하기 위해 기도와 헌신을 계속 이어가는 것입니다.

장재형목사는 이러한 추수 사역을 위해, 교회가 단지 설교와 예배로만 구성되지 않고, 교육·훈련·사회봉사·전문사역 등을 통해 세상과 적극적으로 소통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예수님께서 당시에 회당을 중심으로 가르치시는 동시에 도시와 마을을 직접 방문해 병자들을 고치셨던 사역 방식은, 오늘날 교회가 세상 안에서 어떻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가에 대한 좋은 본보기입니다. 사람들의 필요에 귀 기울이고, 그들이 겪는 현실적인 고통에 대해 연대하며 사랑으로 섬기는 것이 첫 단계가 됩니다. 그리고 그들이 궁극적으로 영적인 목마름을 해결할 수 있도록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전하는 단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는 표현은, 단지 옛날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현대사회에서도 정신적·영적 공허와 우울, 중독 문제, 인간관계의 갈등, 물질만능주의 속의 방황 등이 심각합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교회가 진정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증거할 때, 수많은 이들이 자유와 평안을 찾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곧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가장 정확한 해석이자 적용입니다. 일꾼이 되어 달라는 부르심 앞에서, 우리 각자는 어떤 태도를 보이고 있을까요? ‘주님, 저는 자격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가야 합니다’라고 변명하고 있지는 않은지, 혹은 ‘예, 주님, 제가 그 일꾼이 되겠습니다’라고 결단하고 있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이처럼 오늘날 교회 안에 필요한 것은 ‘사람 낚는 어부’의 열정과 ‘추수 일꾼’의 지혜입니다. 한 영혼이 하나님께 돌아오는 일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안다면, 우리는 결코 이 사명을 가볍게 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사실 우리의 지상명령(The Great Commission)은 바로 여기서 비롯됩니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가리켜, “복음 전파의 궁극적 목적은 하늘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하는 데 있다”고 말합니다. 그 나라가 임하기 위해, 우리는 예수님의 분부에 따라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야 하며, 세례와 말씀으로 양육해야 하고, 그 과정 속에서 성령의 권능이 나타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최종적으로 누가복음 5장과 마태복음 9장은 하나의 공통된 결론을 제시합니다. “사람을 취하라, 추수하라.” 이 두 비유는 서로 다른 이미지로 사람들을 구원하는 사명을 묘사하면서, 예수님의 마음과 교회 공동체의 사명을 함께 보여 줍니다. 바울 사도가“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고전 1:26)”라고 한 것처럼, 우리도 주님의 부르심을 바라볼 때, 결국 그 부르심이 ‘영혼 구원’에 맞춰져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 부름에 “아멘”으로 답할 때, 교회는 소금이 짠맛을 잃지 않고, 등불이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참된 공동체가 될 수 있습니다.

깊은 바다에서 빈 그물이 풍성한 그물로 바뀌고, 목자 잃은 양들이 하나님의 우리 안으로 돌아오는 장면은 우리 모두에게 여전히 살아 있는 부르심입니다. 우리 삶의 한복판에서, 말씀에 의지하여 다시금 그물을 내릴 용기와, 목자 없는 양들을 추수할 결단이 요구되는 시점입니다. 장재형목사는 이 장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두려움을 넘어서는 순종’이라고 말합니다. 아무리 상황이 어렵고 우리의 능력이 부족해 보여도, 주님의 명령이 임하면 그 순종을 통해 역사가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역사를 맛본 자들이 세상 끝까지 복음을 전할 때, 추수의 현장에는 넘쳐 나는 곡식이 주인을 기다리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라”와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라는 말씀을 이어 읽을 때 얻는 통찰입니다. 한쪽은 바다, 한쪽은 들판이지만, 둘 다 주님의 구원 계획 안에 포함된 상징입니다. 사람 낚는 어부와 추수 일꾼의 사명이 오늘 우리 모두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우리가 베드로처럼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리이다”라고 고백하는 순간, 빈 그물은 찢어지도록 가득 찰 것이고, 교회가 세상의 피난처와 빛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될 것입니다. 또한 목자 없는 양들 앞에서, 우리가 그들에게 다가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할 때, 무리를 불쌍히 여기신 주님의 마음이 우리의 마음으로 전달되어, 진정한 추수가 시작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을 통해, 주님은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는 약속을 신실하게 지켜 주십니다.

눅 5장의 물고기 잡는 사건과 마 9장의 추수 비유는, 교회와 성도의 사명이 결코 부분적이거나 소극적일 수 없음을 환기시킵니다. 우리는 모든 민족, 모든 영역,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고, 그 복음을 통해 사람을 낚고, 영혼을 추수하며,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도모해야 합니다. 장재형목사를 비롯해 수많은 목회자와 신학자, 그리고 헌신된 성도들은 이 말씀을 단지 ‘좋은 비유’나 ‘교훈’으로 소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실제 삶에서 구현하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우리 또한 이제는 그 부름을 각자의 자리에서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두려움은 있을 수 있습니다. 밤이 새도록 애썼지만 얻은 것이 없는 경험이 우리의 어깨를 짓누를 수도 있습니다. 주변 상황이“지금은 때가 아니다”라고 말할 수도 있고, ‘교회가 힘을 잃었다’거나 ‘세상은 복음을 원치 않는다’는 식의 회의론이 지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라”고 하십니다. 추수할 곡식이 많다며, 우리가 그 일꾼이 되라고 하십니다. 이 부르심 앞에서, 우리는 베드로처럼 “죄인임”을 고백하되 동시에 그 은혜에 기대어 일어나야 합니다.

장재형목사는 교회가 단순히 과거의 붕(Revival) 경험이나 숫자적 성장에만 매몰되지 말고, 새로운 세대를 향해 여전히 유효한 복음의 능력을 전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새로운 문명과 문화의 파고가 밀려드는 시대일수록, ‘수고했지만 빈 그물’을 경험하는 이들이 더욱 많아질 수 있습니다. 바로 그때 교회가 깊은 곳으로 나아가, 사람들의 영혼 깊숙이 “생수를 주시는 예수님”을 전하고, ‘목자 잃은 양’을 향한 구원의 메시지를 선포해야 합니다. 이는 어렵고 두려운 사역일 수 있으나, 예수님의 권세와 함께하심이 약속되어 있기 때문에 감당해 낼 수 있는 일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말씀을 다시 읽고 묵상함으로써, 영혼 구원의 절박함과 우리에게 이미 부여된 사명을 재확인하게 됩니다. 누가복음 5장이 보여 준 ‘사람 낚는 어부’의 소명, 마태복음 9장이 보여 준 ‘추수의 시급성’, 그리고 마태복음 28장 19-20절의 ‘대사명’은 서로 분리된 이야기가 아니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교회는 이 위대한 부르심을 붙들고, 일꾼을 세우고, 세상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는 말씀을 교회와 성도 개개인에게 적용할 때, 비로소 우리는 빈 그물을 다시 던져 풍성히 거두는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추수의 때에, 목자 잃은 양 같은 영혼들이 예수님께 돌아올 때, 우리는 하나님 나라가 실제적으로 확장되는 현장을 목도하게 될 것입니다. 이 모든 과정은 결코 인간의 능력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며, “말씀에 의지하여” 거룩한 순종을 결행할 때 비로소 열리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한번 확인해야 할 것은, 교회가 존재하는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근본 질문입니다. 사람을 낚는 그물질과 곡식을 거두는 추수는 모두 영혼 구원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교회가 이 본질적 목표를 잃어버릴 때, 우리는 쉽게 세속화의 길로 들어섭니다. 예배는 형식적 이벤트가 되고, 봉사는 자기만족이 되고, 교제는 폐쇄적 동아리 활동이 될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는 말씀과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다”는 외침을 경청한다면, 우리는 멈춰 있지 않고 계속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베드로처럼, 아침 햇살이 비치는 갈릴리 호숫가에서 주님의 명령을 새롭게 듣고, 그날 두 배 가득 잡혀 올려진 물고기를 보고 놀라워하는 기쁨을 맛볼 수 있습니다.

이 모든 여정에서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고 약속하셨다는 점입니다. 두려움과 약함 속에서도, 추수의 주인 되시는 예수님이 함께하신다면 우리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될 수 있고, 목자 없는 양들에게 목자 되신 주님의 음성을 전할 수 있으며, 땅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는 그레잇 커미션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장재형목사를 비롯해 이 말씀에 사로잡힌 수많은 이들이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 또한 이 두려움을 이기고, 주님의 명령에 참여하는 이들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본문 누가복음 5장 1-11, 그리고 마태복음 9장 35-38 말씀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입니다. 한편으로는 어부의 비유, 또 한편으로는 추수의 비유를 통해, 우리는 교회와 성도가 왜 ‘사람을 구원하는’ 일에 힘써야 하는지를 깨닫습니다. 그 목적을 놓치지 않을 때, 교회는 짠맛을 잃지 않는 소금이 되고, 어두운 세상에서 빛을 발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충성되고 지혜로운 종들이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마 24:45) 때, 세상은 “목자 없는 양”이 아니라, 참된 목자이신 예수님께 돌아오는 추수의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라”는 말씀이 우리의 마음을 두드리고,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다”는 주님의 음성이 우리를 깨우치는 이 순간이, 우리 각자와 교회 공동체 모두에게 새로운 시작점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www.davidjang.org

장재형목사 – 부활 신앙의 회복

1. 예루살렘 마가의 다락방, 부활신앙의 현장

예루살렘의 마가의 다락방은 기독교 교회사에서 특별한 의미를 가진 공간이며, 동시에 오늘날 교회 공동체에 깊은 영적 통찰을 주는 장소로 잘 알려져 있다. 이 다락방은 사도행전 1장부터 2장으로 이어지는 매우 중요한 장면의 무대가 되는데, 바로 여기서 초대교회의 태동과 성령 강림 사건이 일어났다고 전해진다. 또한 그 시작점인 사도행전 1장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지상 사역을 마무리하시는 시점, 즉 승천 직전 제자들에게 마지막 당부와 약속을 주신 사건이 기록된 장면이다. 그리고 이 다락방은 단지 물리적 공간의 개념을 넘어, ‘초대교회가 두려움 속에서도 예루살렘 한복판에 모여 역사적 변화를 일으킨 상징적 장소’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장재형 (장다윗)목사는 이 장면을 가리켜 “비록 제자들이 공포와 두려움에 떨고 있었지만,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약 40일 동안 그들을 직접 찾아오셔서 다시 세우시고, 믿음을 불어넣어 주신 뒤 예루살렘으로 모이게 하셨다”라고 설명한다. 제자들은 갈릴리까지 흩어졌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서야 비로소 “부활신앙”으로 무장되어 예루살렘에 돌아올 수 있었다. 이는 신앙공동체 안에서 부활이 어떠한 힘을 발휘하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이며, 그 출발점에 마가의 다락방이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왜 굳이 예루살렘이어야 했을까? 예수님께서 잡히시고, 거기서 처형되셨던 도시가 예루살렘이다. 제자들에게는 몹시도 두렵고 참혹한 기억이 남은 곳이었을 것이다.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후, 그분을 따르던 많은 이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주님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려라”(행1:4-5)는 말씀을 직접 주심으로써, 제자들이 오히려 가장 위험하고 두려운 지역에 다시 모이게 하셨다. 장재형 목사는 이를 “하나님의 역사는 늘 우리의 기대와 상식을 뛰어넘는다. 부활신앙이란, 가장 절망적인 곳에서 가장 소망을 전하는 힘을 발휘할 때 드러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부활신앙의 특징은, ‘죽음이 끝이 아니다’라는 확신에 있다. 제자들이 한때는 ‘주님이 처형당했고, 이제 우리도 붙잡혀 죽을 것’이라는 두려움 속에 주저앉았으나, 예수님께서 실제로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다시 살아나신 모습을 보고 “죽음 그 너머의 새로운 시대”를 경험한 것이다. 그래서 사도행전 1장 3절에서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40일 동안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셨다”고 증언한다. 여기서 “하나님 나라의 일”이란 단지 막연한 종말론이나 철학이 아니라, 지금 현실에서 교회가 어떤 능력으로 세워져야 하고, 어떻게 전진해야 하는지에 대한 구체적 방향을 포함한다. 그 핵심 중 하나가 “너희는 예루살렘에서부터 출발하라”는 말씀이다.

장재형 목사는 “사람이 가장 약해지고 넘어졌던 곳에서 다시 회복하는 역사를 ‘부활신앙의 실제’라고 정의할 수 있다”고 말하며, 이것이야말로 예루살렘 마가의 다락방이 주는 교훈이라 강조한다. 처음에 제자들이 이 다락방에 모였을 때, 그 분위기는 지극히 숨죽인 상태였을 것이다. 십자가 사건 직후, 예수님의 시신이 무덤에 안치되었고, 지도층은 예수님의 잔당까지 모조리 소탕하려는 기세가 등등했다. 그렇기에 그 다락방은, ‘잠깐 모여서 기도하는 안전한 은신처’ 정도로 활용되었을 수 있다. 그러나 주님은 “그곳에서 멈추지 말고 기다리라. 멈추어 서 있으라는 의미가 아니라, 성령을 받을 때까지 머물라는 것”이었다. 마가의 다락방이 이처럼 ‘무력한 도피처’에서 ‘능력의 발원지’로 바뀌게 된 것은 바로 성령 강림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곧 성령이 임하심으로(행2장), 그들은 더 이상 두려움 속에 숨은 제자들이 아니었다. 공포의 공간이던 다락방이 부활의 확신과 성령의 능력이 임하는 현장이 되자, 제자들은 그곳을 떠나 예루살렘 거리로 나아가 담대히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 장재형 목사는 “부활이 교리로만 남아 있다면 의미가 없지만, 부활신앙이 실제 삶을 뒤엎는 능력이 될 때, 사람들이 마침내 예루살렘성 안에서조차도 두려움을 뛰어넘어 행동하는 변화를 보게 된다”라고 역설한다.

이런 ‘행동하는 신앙’은 곧 사도행전 전반에 드러난다.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사마리아와 온 유대, 그리고 땅끝에 이르는 역사적 복음 전파의 여정이 펼쳐지는 것이다. 신앙이 행동으로 이어진 가장 첫 번째 장면은 사도행전 2장 오순절 사건에서 드러나듯, 골방에 숨어 있던 이들이 거리로 나아가 복음을 선포하고, 하루에 수천 명이 회개하고 세례받는 장관이 펼쳐진 것이다. 그 발화점이 바로 마가의 다락방이었다.

한편, 이 다락방은 “교회의 모태” 또는 “교회의 자궁”으로 비유되기도 한다. 그 이유는 새 시대가 마치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는 것처럼,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확신과 성령 강림으로 인해 실제로 ‘새로운 공동체’가 그 안에서 잉태되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아직 지상에 계실 때는, 제자들은 말씀을 배우며 동행하는 수학(修學) 단계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성령이 임하신 이후, 제자들은 ‘교회 공동체의 기둥’으로서 스스로 복음을 확장해나가는 주체가 되었다. 다락방은 그 전환점의 심장부였고, 그 동력이 곧 부활신앙이었다.

요한복음 21장에서 베드로의 회복 장면을 떠올려보면, 제자들이 어떻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고, 또 어떻게 다시금 사명을 확인하며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순종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 부인한 이후, 주님께서 그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세 번 묻고, 베드로가 그 사랑을 고백함으로써 비로소 무너진 자기 자신을 끌어안고 ‘반석’(베드로)으로 거듭 태어난다. 장재형 목사는 이 장면에 대해 “교회가 특정 프로그램이나 조직력으로 움직이지 않고, 결국 그 근본 동력은 ‘주님을 향한 사랑’에서 출발한다. 그 사랑은 곧 주님의 부활하심에서 기인하고, 우리를 품어주신 그 은혜를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할 때에야 견고해지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마가의 다락방 역시 이와 같은 ‘고백’과 ‘회개’와 ‘믿음’의 집합체였다. 부인했던 제자들, 뿔뿔이 흩어졌던 제자들이 다시 돌아와 하나의 공동체가 되고, 절망을 넘어서는 용기를 내어 모일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의 부활과 성령의 약속 때문이었다. “마태복음26장 이하에 기록된 예수님의 고난 현장과, 요한복음 21장 갈릴리로 돌아간 제자들의 모습, 그리고 사도행전 1장의 예루살렘으로의 귀환이 한 줄로 연결될 때, 비로소 부활신앙이 오늘날 교회에 실질적 메시지를 준다”고 장재형 목사는 거듭 강조한다.

이렇듯 예루살렘 마가의 다락방은 결과적으로 ‘두려움에서 대담함으로, 흩어짐에서 모임으로, 수치와 부인에서 회개와 고백으로’ 전환하는 현장이 되었다. 오늘날 교회가 이 점을 깊이 묵상할 필요가 있는데, “교회가 어느 시점부터 사회적 지탄이나 박해의 두려움 속에 숨어만 있는다면, 다시 마가의 다락방에 임한 성령의 불꽃이 필요하다”는 메시지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부활신앙의 현재적 적용이기도 하다. 죽음을 깨뜨리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마치 여전히 우리와 함께하듯 교회를 세우시고, 그 교회가 세상 한복판에서 담대히 복음을 전하도록 지지해주신다는 사실을 붙들 때, 우리는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땅끝까지” 이르는 길을 기쁨으로 갈 수 있다.

이 모든 맥락에서 장재형 목사는 “마가의 다락방을 단지 역사적 장소로만 여기지 말고, 현재의 교회마다 자기만의 다락방을 회복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것이 곧 ‘성령의 임재를 사모하고 기도하는 자리’일 수도 있고, ‘부활신앙을 함께 붙들고 고백하는 자리’일 수도 있다. 다락방에 모여 기도한다는 것은, 내부적으로 숨는 행위가 아니라 “거기서 능력을 받아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한 최종 준비”라는 점이 핵심이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가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행1:5)고 하셨듯, 그런 약속이 ‘다락방’에서 성취되었기에, 초대교회는 결코 사라지지 않고 전 세계로 뻗어나갔다.

2. 맛디아의 선택, 유다의 빈자리를 메우는 교회의 회복

사도행전 1장 후반부에서 제자들은 열두 번째 사도의 자리를 새롭게 채우는 사건을 맞이한다. 부활절을 지나 오순절로 향하는 그 사이, 가장 큰 이슈 중 하나가 “예수님이 열둘 중에 한 사람으로 부르셨던 가룟 유다의 배신과 그 후속 처리를 어떻게 할 것인가”였다. 유다는 예수님을 은 삼십에 팔아넘긴 뒤,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 그뿐 아니라, 그는 불의한 삯으로 밭을 산 뒤 거기서 몸이 떨어져 장기가 터져 죽었다는 기록(행1:18)으로 인해 “핏값의 비극”을 상징하는 인물이 되었다.

장재형 목사는 유다의 비극을 “가장 가까운 자리에 있던 사람이 오히려 가장 큰 범죄를 저지른 사건”이라고 표현한다. 유다는 제자 공동체 안에서 돈궤를 맡던 자였으니, 사실상 재정을 관리하고 봉사하는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교회도 마찬가지로, 재정을 맡고 봉사하는 자리가 때로는 은혜가 충만해야 할 중요한 자리가 되지만, 동시에 사탄의 유혹과 시험이 들어오기 쉬운 통로가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공동체를 운영하기 위해 돈이 필요하고, 이 돈이 때로는 세속적인 이익이나 욕망을 건드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경은 교회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딤전6:10)고 거듭 경계하고, 초대교회가 “모든 재산을 서로 통용하며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었다”(행2:45, 4:34)고 기록함으로써, 물질에 얽매여 부패하지 않도록 초점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유다는 물질적 욕심과 정치적 계산이라는 틈을 통해 사탄에 의해 쓰임받아, 결국 예수님을 팔아넘기는 배신자가 되었다. 그는 배신 직후 뒤늦은 후회를 했지만, 제대로 된 회개에 이르지 못하고 극단적 선택으로 생을 마감함으로써, ‘제자 중 하나를 잃었다’는 뼈아픈 상처를 교회에 남겼다. 열두 제자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상징하는 영적 기둥이었고, 주님이 친히 세우신“새로운 언약 공동체의 문”과 같았다. 그 한쪽 문이 무너졌으니, 이 문을 다시 세우는 작업이 시급했을 것이다.

이에 사도행전 1장에서는 그 공석을 채우기 위한 회의가 열린다. 여기서 초대교회는 새롭게 사도의 자리를 메울 인물을 뽑는데, 그것이 바로 맛디아다. 그 과정을 눈여겨보면, 교회의 위기 대처 방식이 어떠했는지 배울 수 있다. 사도행전 1장 21~22절에서 베드로는 이렇게 제안한다. “이 일, 곧 우리와 함께 다니면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증인이 될 사람을 찾아야 한다. ‘요한의 세례’로부터 주님이 승천하시는 그 날까지 우리와 늘 함께하던 사람 중 하나를 세우자.” 그 결과, 두 사람이 후보에 올랐고, 초대교회는 그 자리에서 제비를 뽑아 맛디아를 선택했다.

장재형 목사는 여기서 주목할 몇 가지 포인트를 제시한다. 첫째, 초대교회가 “부활의 증인”을 최우선 자격 요건으로 삼았다는 점이다. 교회가 존재하는 목적은 부활하신 주님을 증거하기 위함이므로, 사도의 핵심 사명 역시 부활의 소식을 전하는 일이었다. 맛디아를 비롯해 후보가 되었던 사람들은 이미 예수님의 공생애와 고난, 죽음, 부활까지 전 과정을 옆에서 지켜본 사람들로, 사실상 열두 사도와 함께 늘 다니며 배웠던 이들이었다. 둘째, 선택 과정에서 보이는 공동체적 합의와 기도, 그리고 제비뽑기가 인상적이다. “모든 사람의 의견과 교회의 합의가 중요했고, 마지막 단계에서 하나님의 주권적 결정에 운명을 맡기는 방식”을 택했다. 이는 교회가 단지 인간적 계산이나 정치적 타협으로 리더를 뽑지 않음을 시사한다. 셋째, 이렇게 뽑힌 맛디아가 이후 교회에서 어떠한 능력을 나타냈는지에 대한 기록 자체는 성경에 길게 남아 있지 않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열두 제자가 온전히 회복되어 다시 오순절 성령 강림을 맞이할 준비가 완료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 선택의 과정이 중요할까? 교회가 성령이 임하기 직전 가장 먼저 한 일이 바로 “지도자 팀(사도단)을 회복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유다가 만들어낸 공백과 배신으로 인한 상처를 치유하지 않고서는 교회가 온전히 하나가 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사람의 마음 속에는 여전히 “우리 중 하나가 주님을 배반했다”는 배신감이 남아 있었고, 그 가운데 제자들은 서로를 향한 신뢰 회복이 시급했다. 또한 각자 흩어졌던 제자들이 다시 예루살렘에 모여 함께 기도하면서, “이제는 다시는 그런 배신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라는 단단한 결속을 다져야 했다.

장재형 목사는 “교회 안에 생겨난 상처, 지도자의 배신이란 것이 얼마나 공동체를 무너뜨릴 수 있는지, 유다의 사건이 상징적으로 보여준다”라고 지적한다. 그렇기에 초대교회는 가룟 유다의 사건을 단순히 잊어버리거나 덮어두지 않고, 아예 교회 첫 발을 내딛는 시점에 투명하게 정리하고 넘어갔다. 유다가 남긴 핏값의 돈은 성전에 던져졌고, 그것으로 ‘피밭’을 샀다는 사실(마27:5-8)이 공공연히 드러났다. 교회는 이 부끄러운 역사를 숨기지 않고, 되레 예언(예레미야나 시편)에 입각하여 “이 일이 예언이 성취되는 과정의 일부”라고까지 받아들이며, 공동체 전체가 한 목소리로 기도하고 새 인물을 임명했다.

그리하여 맛디아가 사도의 자리를 이어받게 되었다. 교회는 다시 열두 사도의 틀을 회복하고, 그 안에서 더욱 공고해진 영적 유대감 속에 오순절 성령 강림을 맞이했다. 그리고 그 성령의 힘을 입은 사도들은 예루살렘을 기점으로 온 유대와 사마리아를 넘어 땅끝까지 복음을 확장해 나가게 된다. 만일 유다의 배신과 죽음으로 인해 생긴 내분과 상처를 방치했다면, 교회가 출범하기 전부터 붕괴될 위험이 컸을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그 상처를 드러내어 해결하고, 회복의 과정을 공적으로 선포함으로써, 교회가 더욱 성숙한 모습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또 다른 관점에서 유다의 실수와 죽음은, 초대교회에 ‘결코 그 누구도 이 길에서 방심해서는 안 된다’라는 경각심을 심어주었다고 볼 수 있다. 예수님을 직접 3년간 따라다니고, 기적과 말씀을 접하며, 심지어 돈궤를 맡겨질 정도로 신뢰받던 인물조차 무너질 수 있다는 사실은, 교회 구성원 누구든지 시험에 드는 위험이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 준다. 장재형 목사는 이 대목에 대해 “현대 교회 리더십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한 사람이 아무리 뛰어나 보여도, 끊임없이 말씀과 성령으로 자신을 살피고 깨어 기도해야 한다. 그리하지 않으면, 사단은 언제든지 우리를 미끼로 삼을 수 있다”라고 경고한다. 교회사는 배신과 타락의 역사가 결코 적지 않았다. 그러나 동시에, 그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인물(맛디아 같은)을 세워 교회의 빈 자리를 메우고, 역사를 이어 가셨음을 우리는 본다.

그렇다면 오늘날 교회가 맛디아의 선택 사건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점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첫째, 교회가 공동체적 합의와 기도 가운데 가장 중요한 지도자 자리를 채워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단순히 능력·명성·정치력을 보고 지도자를 세워서는 안 되며, “부활신앙을 확실히 붙들고 있는가?” “주님과 함께해 온 시간이 있는가?” “주님의 고난·죽음·부활을 옆에서 목격하고, 자기 삶으로 간증할 수 있는가?”라는 핵심 신앙 고백이 훨씬 중요하다. 둘째, 지도자의 배신 또는 교회 안의 큰 상처가 생길 때마다, 그것을 단지 ‘개인의 비극’으로 덮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가 아파하며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를 기도와 말씀 속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유다가 무너진 뒤, 초대교회가 그를 강렬히 비난하는 데 시간을 보내지 않고, 주님의 말씀과 예언을 찾아 연구하며, 거기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새로운 길’을 열어간 자세는 배울 점이 많다. 셋째, 이 모든 회복 과정은 궁극적으로 ‘성령 강림’에 집중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교회가 왜 굳이 이 사건을 성령 임재 이전에 다뤘겠는가? 바로 오순절 성령을 받을 수 있는 온전한 상태로 자신들을 준비해야 했기 때문이다. 불의와 혼란이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성령의 큰 역사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장재형 목사는 “교회가 성령의 역사, 부흥, 성장 등을 말하기 전에, 먼저 내부의 죄와 불의를 다루는 과정을 진지하게 거쳐야 하며, 지도자들의 무너짐이 있다면 그것을 은폐하지 말고 진정으로 치유하는 길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유다에게서 벗어나 맛디아를 세운 것이 “하나의 상징”이라면, 곧 ‘교회는 그 어떤 큰 상처를 당해도,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반드시 회복의 길을 찾는다’는 메시지를 준다. 물론, 유다는 원천적으로 ‘버려진 자’가 아니라, 스스로 길을 선택해 그 길로 나아갔다가 영원한 비극을 맞이한 것이다. 교회가 누구를 불문하고 회복과 구원의 길로 초청하지만, 개인이 끝까지 거부하면 비극은 일어난다. 교회는 그런 비극을 무조건 덮는 대신, 회개와 갱신의 동력을 찾아 새로운 길을 내야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부활신앙”이 핵심 저력으로 작용한다.

부활신앙은 “죽음을 끝장내고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것이다. 유다는 예수님을 죽게 만든 장본인이었고, 그 뒤에 찾아온 죄책감에 무너져 갔지만, 예수님은 부활하심으로 “생명의 길”을 열어놓으셨다. 가룟 유다의 배신이 교회에 남긴 충격과 공포는, 예수님의 부활로 인한 소망에 의해 극복될 수 있었다. 맛디아가 그 빈자리를 메꾸었을 때, 열두 제자는 다시 하나가 되어 성령을 기다렸고, 곧 교회에 불처럼 임한 성령으로 인해 예루살렘에 담대히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했다. 사도행전 1장에서4장까지 읽어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수비대를 비롯한 종교 권력 앞에서도 두려움을 느끼지 않고 “예수 이름 외에 구원 받을 다른 이름이 없다”(행4:12)고 선포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때의 베드로는 “닭 울기 전에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던 베드로”가 더 이상 아니다. 그는 마가의 다락방에서 회복된 자, 성령 받은 자, 그리고 맛디아와 함께한 “온전한 사도단”의 대표가 되어 버젓이 복음을 외친다. 여기에는 “무너져버린 지도자 한 사람의 자리마저도 하나님께서 회복시키셨다”는 강력한 메시지가 담겨 있다.

장재형 목사는 “유다를 잃고 맛디아를 얻은 교회가 ‘피투성이가 된 상처’를 치유받은 것처럼, 교회도 끊임없이 옛 상처와 고통을 치유받으며 새 술 부대를 채워야 한다”고 말한다. 초대교회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현대 교회도 각종 분쟁·부패·배신 같은 사건을 겪을 때가 많으며, 그때마다 어떻게 ‘새로운 맛디아’를 세워서 공동체를 정돈하고 성령의 역사를 받을 것인지를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는 “성령을 통해 새로운 시대를 여는 공동체”이며, 동시에 “배신과 회개, 죽음과 부활, 좌절과 회복”이라는 수많은 교차점을 통과해가며 성장한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죽음을 재촉했고, 맛디아는 그 빈자리를 메우며 복음의 문을 확장했다. 베드로는 부인하고 도망갔으나, 다시 예수님께서 찾아오셔서 요한복음 21장에서 그의 사랑을 회복시키셨고, 사도행전에서 가장 먼저 설교를 펼치는 지도자로 세우셨다. 이렇게 사도들의 재정비가 끝나고, 초대교회는 마가의 다락방이라는 공간에서 성령이 임하는 장관을 경험한다. 그 성령이 임한 순간부터 교회는 더 이상 숨어 있지 않고 거리로 나가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했고, 이내 예루살렘이 발칵 뒤집혔다.

오늘날도 교회가 같은 경험을 할 수 있을까? 장재형 목사는 “당연히 가능하다. 다만, 그 조건은 오늘날 교회가 부활신앙의 실제적 파워를 믿고, 내부의 문제(배신·부패·불신)를 회개와 기도로 해결하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온전히 구하는 데 달렸다”고 주장한다. 마가의 다락방과 맛디아의 선택은, 교회가 어떻게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을 실제 삶에서 체험하고, 어떠한 방식으로 공동체 안의 갈등과 상처를 극복하여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부활신앙으로 대표되는 기독교의 핵심은 “이 땅의 죽음, 절망, 실패가 결코 마지막이 아니다”라는 믿음이다. 가룟 유다라는 절망적 사례가 있어도, 교회는 맛디아를 통해 복음 전파의 긴 역사를 이어 간다. 우리가 때로는 베드로처럼 주님을 부인하고 죄책감 속에 살지라도, 요한복음 21장처럼 주님이 친히 우리를 다시 찾아오시고 회복시킨다. 그 은혜가 우리를 예루살렘 마가의 다락방으로 이끌어, 무기력한 상태가 아니라 담대한 성령의 능력을 입어 세상 한복판으로 나가도록 만든다.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 초대교회는 결국 사도행전 28장 마지막 절에서 “금하는 사람이 없었다”라는 당당한 선포로 마무리한다. 복음 전파를 막을 수 없었다는 뜻이다. 바울은 로마의 옥중에서도 복음을 전했고, 베드로는 역사의 기록에 따르면 거꾸로 십자가에 달리는 순교로 사명을 마무리했으나, 그의 뒤를 잇는 수많은 제자들이 또다시 교회의 빈 자리를 채워나갔다. 이처럼 교회는 주기적으로 흔들리고 넘어질지라도, 부활신앙과 성령의 능력 안에서 새롭게 일어선다.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이 무너져도, 하나님께서는 사도직을 회복하고, 땅끝까지 이어지게 하는 방법을 갖고 계신다.

맛디아의 선택은 바로 이 ‘회복’과 ‘전진’의 두 가지 정신을 모두 아우른다. 교회가 내부의 상처를 치유하고, 부활신앙에 기초하여 더 큰 비전을 향해 나아가는 출발점이 되는 것이다. 이 메시지는 오늘날도 여전히 유효하고, 교회 지도자들마다 사역 현장에서 다양한 갈등과 문제를 마주할 때마다, “초대교회는 어떻게 이 난관을 돌파했나?”를 돌아보면, 결국 그 답은“부활신앙의 견고한 고백과 성령의 임재를 기다리는 기도, 그리고 투명한 공동체적 절차”에 있음을 깨닫게 된다.

장재형 목사는 이를 정리하며 말한다. “부활은 능력이다. 그 능력은 우리 마음 안에 역사할 때, 사람을 살리고, 교회를 살리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운다. 아무리 큰 배신자가 있어도, 그 배신을 넘어 교회는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는 회복과 새 출발의 길을 찾게 된다. 유다의 실패가 교회 역사의 종말을 뜻하지 않았듯이, 오늘날 우리가 맞닥뜨리는 어떠한 큰 상처도 하나님 나라의 약속을 소멸시키지 못한다.”

바로 이 지점이 “예루살렘 마가의 다락방과 맛디아의 선택”이 하나로 연결되는 결정적 이유다. 마가의 다락방은 숨죽이고 숨어 있던 제자들이 성령 강림을 경험한 뒤 세상으로 나가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한 발화점이라면, 맛디아의 선택은 사도 중 한 사람의 배신과 죽음을 넘어서 교회가 다시 ‘온전한 공동체’로 거듭나는 장면이다. 두 이야기는 “교회 안의 배신·부인·두려움이, 주님의 부활과 성령의 임재로 말미암아 어떻게 회복과 능력의 역사로 바뀌는가”를 종합적으로 보여준다. 여기에는 슬픔과 회환이 섞여 있지만, 더욱 강력한 하나님의 은혜가 깃들어 있다. 그 결과, 초대교회는 예루살렘을 넘어 땅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는 길로 분연히 일어설 수 있었다.

오늘날 교회도 마찬가지다. 어떤 지역 교회나 공동체가 마치 마가의 다락방처럼 ‘현대적 의미의 다락방’을 회복해 부활신앙으로 충만해진다면, 그리고 가룟 유다가 남기고 간 상처를 맛디아의 선출처럼 투명하고 말씀에 충실한 방식으로 치유한다면, 성령의 새 역사를 기대할 수 있다. 오순절 사건이 2000년 전 어느 한 장소에서만 일어난 ‘역사적 일회성’이 아니라, 모든 시대와 지역의 교회가 체험할 수 있는 하나님의 운동인 것이다.

이러한 가르침은 장재형 목사가 줄곧 강조해온 “부활신앙의 실천성”과 맞닿아 있다. 성경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지적(知的)으로만 받아들이고 말면, 그것은 단순한 교리에 그친다. 그러나 초대교회는 이 부활을 실제 삶의 원동력으로 삼아, 배신이나 고난, 죽음이나 절망도 더 이상 끝이 아님을 시연해 보였다. 베드로와 사도들이 예루살렘 한복판에서 자신들을 죽이려 했던 세력들에게도 담대히 복음을 전하는 모습은, 부활이 얼마나 실재적이고 폭발적인 힘을 발휘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므로 “교회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예루살렘 마가의 다락방에서 시작되어, 가룟 유다의 배신을 맛디아의 선출로 회복하고, 성령 강림을 통해 전 세계로 나아간 공동체”라고 답할 수 있다. 그 정체성은 역사의 시공간을 넘어 오늘도 유효하며, 교회가 부활신앙을 지키는 이상 결코 문이 닫히지 않는다. 때로 교회 내부에 치명적인 균열이 일어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인물을 세워 그 자리를 회복시키시고, 또다시 성령을 부어주신다. 이것이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로마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전 세계에 이르기까지” 이어지는 복음의 연속성이자, 현대 교회가 이어받아야 할 믿음의 유산이다.

장재형 목사의 결론적인 권면도 여기에 맞닿는다. “우리는 현재적 다락방을 회복해야 하며, 배신과 실패가 일어날 때마다 그것을 덮는 대신 진실하게 회개하고 투명하게 해결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 출발의 기회를 붙잡아야 한다. 그 중심에는‘부활의 주님’이 계시고, 그분이 교회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선교적 사명이 놓여 있다.” 교회가 이 길에 순종할 때, 사도행전의 역사는 중단되지 않고 계속 펼쳐질 것이다.

www.davidjang.org

부활신앙의 회복 – 장재형목사

장재형목사

1. 예루살렘 마가의 다락방, 부활신앙의 현장

예루살렘의 마가의 다락방은 기독교 교회사에서 특별한 의미를 가진 공간이며, 동시에 오늘날 교회 공동체에 깊은 영적 통찰을 주는 장소로 잘 알려져 있다. 이 다락방은 사도행전 1장부터 2장으로 이어지는 매우 중요한 장면의 무대가 되는데, 바로 여기서 초대교회의 태동과 성령 강림 사건이 일어났다고 전해진다. 또한 그 시작점인 사도행전 1장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지상 사역을 마무리하시는 시점, 즉 승천 직전 제자들에게 마지막 당부와 약속을 주신 사건이 기록된 장면이다. 그리고 이 다락방은 단지 물리적 공간의 개념을 넘어, ‘초대교회가 두려움 속에서도 예루살렘 한복판에 모여 역사적 변화를 일으킨 상징적 장소’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장재형 목사는 이 장면을 가리켜 “비록 제자들이 공포와 두려움에 떨고 있었지만,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약 40일 동안 그들을 직접 찾아오셔서 다시 세우시고, 믿음을 불어넣어 주신 뒤 예루살렘으로 모이게 하셨다”라고 설명한다. 제자들은 갈릴리까지 흩어졌다가,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고서야 비로소 “부활신앙”으로 무장되어 예루살렘에 돌아올 수 있었다. 이는 신앙공동체 안에서 부활이 어떠한 힘을 발휘하는지를 여실히 보여주는 사례이며, 그 출발점에 마가의 다락방이 있는 셈이다.

그렇다면 왜 굳이 예루살렘이어야 했을까? 예수님께서 잡히시고, 거기서 처형되셨던 도시가 예루살렘이다. 제자들에게는 몹시도 두렵고 참혹한 기억이 남은 곳이었을 것이다. 주님이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후, 그분을 따르던 많은 이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말았다. 그러나 주님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 아버지께서 약속하신 성령을 기다려라”(행1:4-5)는 말씀을 직접 주심으로써, 제자들이 오히려 가장 위험하고 두려운 지역에 다시 모이게 하셨다. 장재형 목사는 이를 “하나님의 역사는 늘 우리의 기대와 상식을 뛰어넘는다. 부활신앙이란, 가장 절망적인 곳에서 가장 소망을 전하는 힘을 발휘할 때 드러나는 것”이라고 해석한다.

부활신앙의 특징은, ‘죽음이 끝이 아니다’라는 확신에 있다. 제자들이 한때는 ‘주님이 처형당했고, 이제 우리도 붙잡혀 죽을 것’이라는 두려움 속에 주저앉았으나, 예수님께서 실제로 사망 권세를 깨뜨리고 다시 살아나신 모습을 보고 “죽음 그 너머의 새로운 시대”를 경험한 것이다. 그래서 사도행전 1장 3절에서는 예수님이 부활하신 후 40일 동안 “하나님 나라의 일을 말씀하셨다”고 증언한다. 여기서 “하나님 나라의 일”이란 단지 막연한 종말론이나 철학이 아니라, 지금 현실에서 교회가 어떤 능력으로 세워져야 하고, 어떻게 전진해야 하는지에 대한 구체적 방향을 포함한다. 그 핵심 중 하나가 “너희는 예루살렘에서부터 출발하라”는 말씀이다.

장재형 목사는 “사람이 가장 약해지고 넘어졌던 곳에서 다시 회복하는 역사를 ‘부활신앙의 실제’라고 정의할 수 있다”고 말하며, 이것이야말로 예루살렘 마가의 다락방이 주는 교훈이라 강조한다. 처음에 제자들이 이 다락방에 모였을 때, 그 분위기는 지극히 숨죽인 상태였을 것이다. 십자가 사건 직후, 예수님의 시신이 무덤에 안치되었고, 지도층은 예수님의 잔당까지 모조리 소탕하려는 기세가 등등했다. 그렇기에 그 다락방은, ‘잠깐 모여서 기도하는 안전한 은신처’ 정도로 활용되었을 수 있다. 그러나 주님은 “그곳에서 멈추지 말고 기다리라. 멈추어 서 있으라는 의미가 아니라, 성령을 받을 때까지 머물라는 것”이었다. 마가의 다락방이 이처럼 ‘무력한 도피처’에서 ‘능력의 발원지’로 바뀌게 된 것은 바로 성령 강림으로 설명이 가능하다.

곧 성령이 임하심으로(행2장), 그들은 더 이상 두려움 속에 숨은 제자들이 아니었다. 공포의 공간이던 다락방이 부활의 확신과 성령의 능력이 임하는 현장이 되자, 제자들은 그곳을 떠나 예루살렘 거리로 나아가 담대히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다. 이에 대해 장재형 목사는 “부활이 교리로만 남아 있다면 의미가 없지만, 부활신앙이 실제 삶을 뒤엎는 능력이 될 때, 사람들이 마침내 예루살렘성 안에서조차도 두려움을 뛰어넘어 행동하는 변화를 보게 된다”라고 역설한다.

이런 ‘행동하는 신앙’은 곧 사도행전 전반에 드러난다.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사마리아와 온 유대, 그리고 땅끝에 이르는 역사적 복음 전파의 여정이 펼쳐지는 것이다. 신앙이 행동으로 이어진 가장 첫 번째 장면은 사도행전 2장 오순절 사건에서 드러나듯, 골방에 숨어 있던 이들이 거리로 나아가 복음을 선포하고, 하루에 수천 명이 회개하고 세례받는 장관이 펼쳐진 것이다. 그 발화점이 바로 마가의 다락방이었다.

한편, 이 다락방은 “교회의 모태” 또는 “교회의 자궁”으로 비유되기도 한다. 그 이유는 새 시대가 마치 새로운 생명이 태어나는 것처럼, 부활하신 예수님에 대한 확신과 성령 강림으로 인해 실제로 ‘새로운 공동체’가 그 안에서 잉태되었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아직 지상에 계실 때는, 제자들은 말씀을 배우며 동행하는 수학(修學) 단계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예수님이 승천하시고 성령이 임하신 이후, 제자들은 ‘교회 공동체의 기둥’으로서 스스로 복음을 확장해나가는 주체가 되었다. 다락방은 그 전환점의 심장부였고, 그 동력이 곧 부활신앙이었다.

요한복음 21장에서 베드로의 회복 장면을 떠올려보면, 제자들이 어떻게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났고, 또 어떻게 다시금 사명을 확인하며 예루살렘으로 돌아와 순종했는지를 이해할 수 있다. 베드로가 주님을 세 번 부인한 이후, 주님께서 그에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라고 세 번 묻고, 베드로가 그 사랑을 고백함으로써 비로소 무너진 자기 자신을 끌어안고 ‘반석’(베드로)으로 거듭 태어난다. 장재형 목사는 이 장면에 대해 “교회가 특정 프로그램이나 조직력으로 움직이지 않고, 결국 그 근본 동력은 ‘주님을 향한 사랑’에서 출발한다. 그 사랑은 곧 주님의 부활하심에서 기인하고, 우리를 품어주신 그 은혜를 마음으로 믿고 입으로 시인할 때에야 견고해지는 것”이라고 설명한다.

마가의 다락방 역시 이와 같은 ‘고백’과 ‘회개’와 ‘믿음’의 집합체였다. 부인했던 제자들, 뿔뿔이 흩어졌던 제자들이 다시 돌아와 하나의 공동체가 되고, 절망을 넘어서는 용기를 내어 모일 수 있었던 것은 주님의 부활과 성령의 약속 때문이었다. “마태복음 26장 이하에 기록된 예수님의 고난 현장과, 요한복음 21장 갈릴리로 돌아간 제자들의 모습, 그리고 사도행전 1장의 예루살렘으로의 귀환이 한 줄로 연결될 때, 비로소 부활신앙이 오늘날 교회에 실질적 메시지를 준다”고 장재형 목사는 거듭 강조한다.

이렇듯 예루살렘 마가의 다락방은 결과적으로 ‘두려움에서 대담함으로, 흩어짐에서 모임으로, 수치와 부인에서 회개와 고백으로’ 전환하는 현장이 되었다. 오늘날 교회가 이 점을 깊이 묵상할 필요가 있는데, “교회가 어느 시점부터 사회적 지탄이나 박해의 두려움 속에 숨어만 있는다면, 다시 마가의 다락방에 임한 성령의 불꽃이 필요하다”는 메시지를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이는 부활신앙의 현재적 적용이기도 하다. 죽음을 깨뜨리고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마치 여전히 우리와 함께하듯 교회를 세우시고, 그 교회가 세상 한복판에서 담대히 복음을 전하도록 지지해주신다는 사실을 붙들 때, 우리는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땅끝까지” 이르는 길을 기쁨으로 갈 수 있다.

이 모든 맥락에서 장재형 목사는 “마가의 다락방을 단지 역사적 장소로만 여기지 말고, 현재의 교회마다 자기만의 다락방을 회복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것이 곧 ‘성령의 임재를 사모하고 기도하는 자리’일 수도 있고, ‘부활신앙을 함께 붙들고 고백하는 자리’일 수도 있다. 다락방에 모여 기도한다는 것은, 내부적으로 숨는 행위가 아니라 “거기서 능력을 받아 세상으로 나아가기 위한 최종 준비”라는 점이 핵심이다. 예수님이 제자들에게 “너희가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행1:5)고 하셨듯, 그런 약속이 ‘다락방’에서 성취되었기에, 초대교회는 결코 사라지지 않고 전 세계로 뻗어나갔다.

2. 맛디아의 선택, 유다의 빈자리를 메우는 교회의 회복

사도행전 1장 후반부에서 제자들은 열두 번째 사도의 자리를 새롭게 채우는 사건을 맞이한다. 부활절을 지나 오순절로 향하는 그 사이, 가장 큰 이슈 중 하나가 “예수님이 열둘 중에 한 사람으로 부르셨던 가룟 유다의 배신과 그 후속 처리를 어떻게 할 것인가”였다. 유다는 예수님을 은 삼십에 팔아넘긴 뒤, 스스로 목매어 죽었다. 그뿐 아니라, 그는 불의한 삯으로 밭을 산 뒤 거기서 몸이 떨어져 장기가 터져 죽었다는 기록(행1:18)으로 인해 “핏값의 비극”을 상징하는 인물이 되었다.

장재형 목사는 유다의 비극을 “가장 가까운 자리에 있던 사람이 오히려 가장 큰 범죄를 저지른 사건”이라고 표현한다. 유다는 제자 공동체 안에서 돈궤를 맡던 자였으니, 사실상 재정을 관리하고 봉사하는 중요한 위치에 있었다. 교회도 마찬가지로, 재정을 맡고 봉사하는 자리가 때로는 은혜가 충만해야 할 중요한 자리가 되지만, 동시에 사탄의 유혹과 시험이 들어오기 쉬운 통로가 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공동체를 운영하기 위해 돈이 필요하고, 이 돈이 때로는 세속적인 이익이나 욕망을 건드리기 때문이다. 따라서 성경은 교회가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된다”(딤전6:10)고 거듭 경계하고, 초대교회가 “모든 재산을 서로 통용하며 각 사람의 필요를 따라 나눠주었다”(행2:45, 4:34)고 기록함으로써, 물질에 얽매여 부패하지 않도록 초점을 분명히 했다.

그러나 유다는 물질적 욕심과 정치적 계산이라는 틈을 통해 사탄에 의해 쓰임받아, 결국 예수님을 팔아넘기는 배신자가 되었다. 그는 배신 직후 뒤늦은 후회를 했지만, 제대로 된 회개에 이르지 못하고 극단적 선택으로 생을 마감함으로써, ‘제자 중 하나를 잃었다’는 뼈아픈 상처를 교회에 남겼다. 열두 제자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상징하는 영적 기둥이었고, 주님이 친히 세우신 “새로운 언약 공동체의 문”과 같았다. 그 한쪽 문이 무너졌으니, 이 문을 다시 세우는 작업이 시급했을 것이다.

이에 사도행전 1장에서는 그 공석을 채우기 위한 회의가 열린다. 여기서 초대교회는 새롭게 사도의 자리를 메울 인물을 뽑는데, 그것이 바로 맛디아다. 그 과정을 눈여겨보면, 교회의 위기 대처 방식이 어떠했는지 배울 수 있다. 사도행전 1장 21~22절에서 베드로는 이렇게 제안한다. “이 일, 곧 우리와 함께 다니면서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증인이 될 사람을 찾아야 한다. ‘요한의 세례’로부터 주님이 승천하시는 그 날까지 우리와 늘 함께하던 사람 중 하나를 세우자.” 그 결과, 두 사람이 후보에 올랐고, 초대교회는 그 자리에서 제비를 뽑아 맛디아를 선택했다.

장재형 목사는 여기서 주목할 몇 가지 포인트를 제시한다. 첫째, 초대교회가 “부활의 증인”을 최우선 자격 요건으로 삼았다는 점이다. 교회가 존재하는 목적은 부활하신 주님을 증거하기 위함이므로, 사도의 핵심 사명 역시 부활의 소식을 전하는 일이었다. 맛디아를 비롯해 후보가 되었던 사람들은 이미 예수님의 공생애와 고난, 죽음, 부활까지 전 과정을 옆에서 지켜본 사람들로, 사실상 열두 사도와 함께 늘 다니며 배웠던 이들이었다. 둘째, 선택 과정에서 보이는 공동체적 합의와 기도, 그리고 제비뽑기가 인상적이다. “모든 사람의 의견과 교회의 합의가 중요했고, 마지막 단계에서 하나님의 주권적 결정에 운명을 맡기는 방식”을 택했다. 이는 교회가 단지 인간적 계산이나 정치적 타협으로 리더를 뽑지 않음을 시사한다. 셋째, 이렇게 뽑힌 맛디아가 이후 교회에서 어떠한 능력을 나타냈는지에 대한 기록 자체는 성경에 길게 남아 있지 않지만, 이 사건을 계기로 열두 제자가 온전히 회복되어 다시 오순절 성령 강림을 맞이할 준비가 완료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이 선택의 과정이 중요할까? 교회가 성령이 임하기 직전 가장 먼저 한 일이 바로 “지도자 팀(사도단)을 회복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유다가 만들어낸 공백과 배신으로 인한 상처를 치유하지 않고서는 교회가 온전히 하나가 되기 어려웠을 것이다. 사람의 마음 속에는 여전히 “우리 중 하나가 주님을 배반했다”는 배신감이 남아 있었고, 그 가운데 제자들은 서로를 향한 신뢰 회복이 시급했다. 또한 각자 흩어졌던 제자들이 다시 예루살렘에 모여 함께 기도하면서, “이제는 다시는 그런 배신이 일어나서는 안 된다”라는 단단한 결속을 다져야 했다.

장재형 목사는 “교회 안에 생겨난 상처, 지도자의 배신이란 것이 얼마나 공동체를 무너뜨릴 수 있는지, 유다의 사건이 상징적으로 보여준다”라고 지적한다. 그렇기에 초대교회는 가룟 유다의 사건을 단순히 잊어버리거나 덮어두지 않고, 아예 교회 첫 발을 내딛는 시점에 투명하게 정리하고 넘어갔다. 유다가 남긴 핏값의 돈은 성전에 던져졌고, 그것으로 ‘피밭’을 샀다는 사실(마27:5-8)이 공공연히 드러났다. 교회는 이 부끄러운 역사를 숨기지 않고, 되레 예언(예레미야나 시편)에 입각하여 “이 일이 예언이 성취되는 과정의 일부”라고까지 받아들이며, 공동체 전체가 한 목소리로 기도하고 새 인물을 임명했다.

그리하여 맛디아가 사도의 자리를 이어받게 되었다. 교회는 다시 열두 사도의 틀을 회복하고, 그 안에서 더욱 공고해진 영적 유대감 속에 오순절 성령 강림을 맞이했다. 그리고 그 성령의 힘을 입은 사도들은 예루살렘을 기점으로 온 유대와 사마리아를 넘어 땅끝까지 복음을 확장해 나가게 된다. 만일 유다의 배신과 죽음으로 인해 생긴 내분과 상처를 방치했다면, 교회가 출범하기 전부터 붕괴될 위험이 컸을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그 상처를 드러내어 해결하고, 회복의 과정을 공적으로 선포함으로써, 교회가 더욱 성숙한 모습으로 거듭날 수 있었다.

또 다른 관점에서 유다의 실수와 죽음은, 초대교회에 ‘결코 그 누구도 이 길에서 방심해서는 안 된다’라는 경각심을 심어주었다고 볼 수 있다. 예수님을 직접 3년간 따라다니고, 기적과 말씀을 접하며, 심지어 돈궤를 맡겨질 정도로 신뢰받던 인물조차 무너질 수 있다는 사실은, 교회 구성원 누구든지 시험에 드는 위험이 있다는 것을 상기시켜 준다. 장재형 목사는 이 대목에 대해 “현대 교회 리더십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한 사람이 아무리 뛰어나 보여도, 끊임없이 말씀과 성령으로 자신을 살피고 깨어 기도해야 한다. 그리하지 않으면, 사단은 언제든지 우리를 미끼로 삼을 수 있다”라고 경고한다. 교회사는 배신과 타락의 역사가 결코 적지 않았다. 그러나 동시에, 그때마다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인물(맛디아 같은)을 세워 교회의 빈 자리를 메우고, 역사를 이어 가셨음을 우리는 본다.

그렇다면 오늘날 교회가 맛디아의 선택 사건으로부터 배울 수 있는 점은 구체적으로 무엇인가? 첫째, 교회가 공동체적 합의와 기도 가운데 가장 중요한 지도자 자리를 채워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단순히 능력·명성·정치력을 보고 지도자를 세워서는 안 되며, “부활신앙을 확실히 붙들고 있는가?” “주님과 함께해 온 시간이 있는가?” “주님의 고난·죽음·부활을 옆에서 목격하고, 자기 삶으로 간증할 수 있는가?”라는 핵심 신앙 고백이 훨씬 중요하다. 둘째, 지도자의 배신 또는 교회 안의 큰 상처가 생길 때마다, 그것을 단지 ‘개인의 비극’으로 덮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전체가 아파하며 “어떻게 회복할 것인가”를 기도와 말씀 속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유다가 무너진 뒤, 초대교회가 그를 강렬히 비난하는 데 시간을 보내지 않고, 주님의 말씀과 예언을 찾아 연구하며, 거기에 부합하는 방식으로 ‘새로운 길’을 열어간 자세는 배울 점이 많다. 셋째, 이 모든 회복 과정은 궁극적으로 ‘성령 강림’에 집중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교회가 왜 굳이 이 사건을 성령 임재 이전에 다뤘겠는가? 바로 오순절 성령을 받을 수 있는 온전한 상태로 자신들을 준비해야 했기 때문이다. 불의와 혼란이 정리되지 않은 상태에서 성령의 큰 역사를 기대하기는 어렵다. 장재형 목사는 “교회가 성령의 역사, 부흥, 성장 등을 말하기 전에, 먼저 내부의 죄와 불의를 다루는 과정을 진지하게 거쳐야 하며, 지도자들의 무너짐이 있다면 그것을 은폐하지 말고 진정으로 치유하는 길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유다에게서 벗어나 맛디아를 세운 것이 “하나의 상징”이라면, 곧 ‘교회는 그 어떤 큰 상처를 당해도, 하나님의 계획 속에서 반드시 회복의 길을 찾는다’는 메시지를 준다. 물론, 유다는 원천적으로 ‘버려진 자’가 아니라, 스스로 길을 선택해 그 길로 나아갔다가 영원한 비극을 맞이한 것이다. 교회가 누구를 불문하고 회복과 구원의 길로 초청하지만, 개인이 끝까지 거부하면 비극은 일어난다. 교회는 그런 비극을 무조건 덮는 대신, 회개와 갱신의 동력을 찾아 새로운 길을 내야 한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부활신앙”이 핵심 저력으로 작용한다.

부활신앙은 “죽음을 끝장내고 다시 살리시는 하나님의 능력”을 믿는 것이다. 유다는 예수님을 죽게 만든 장본인이었고, 그 뒤에 찾아온 죄책감에 무너져 갔지만, 예수님은 부활하심으로 “생명의 길”을 열어놓으셨다. 가룟 유다의 배신이 교회에 남긴 충격과 공포는, 예수님의 부활로 인한 소망에 의해 극복될 수 있었다. 맛디아가 그 빈자리를 메꾸었을 때, 열두 제자는 다시 하나가 되어 성령을 기다렸고, 곧 교회에 불처럼 임한 성령으로 인해 예루살렘에 담대히 복음을 전파하기 시작했다. 사도행전 1장에서 4장까지 읽어보면, 베드로와 요한이 성전 수비대를 비롯한 종교 권력 앞에서도 두려움을 느끼지 않고 “예수 이름 외에 구원 받을 다른 이름이 없다”(행4:12)고 선포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이 때의 베드로는 “닭 울기 전에 예수님을 세 번 부인하던 베드로”가 더 이상 아니다. 그는 마가의 다락방에서 회복된 자, 성령 받은 자, 그리고 맛디아와 함께한 “온전한 사도단”의 대표가 되어 버젓이 복음을 외친다. 여기에는 “무너져버린 지도자 한 사람의 자리마저도 하나님께서 회복시키셨다”는 강력한 메시지가 담겨 있다.

장재형 목사는 “유다를 잃고 맛디아를 얻은 교회가 ‘피투성이가 된 상처’를 치유받은 것처럼, 교회도 끊임없이 옛 상처와 고통을 치유받으며 새 술 부대를 채워야 한다”고 말한다. 초대교회만의 이야기가 아니라, 현대 교회도 각종 분쟁·부패·배신 같은 사건을 겪을 때가 많으며, 그때마다 어떻게 ‘새로운 맛디아’를 세워서 공동체를 정돈하고 성령의 역사를 받을 것인지를 고민해야 한다는 것이다.

교회는 “성령을 통해 새로운 시대를 여는 공동체”이며, 동시에 “배신과 회개, 죽음과 부활, 좌절과 회복”이라는 수많은 교차점을 통과해가며 성장한다. 가룟 유다는 예수님의 죽음을 재촉했고, 맛디아는 그 빈자리를 메우며 복음의 문을 확장했다. 베드로는 부인하고 도망갔으나, 다시 예수님께서 찾아오셔서 요한복음 21장에서 그의 사랑을 회복시키셨고, 사도행전에서 가장 먼저 설교를 펼치는 지도자로 세우셨다. 이렇게 사도들의 재정비가 끝나고, 초대교회는 마가의 다락방이라는 공간에서 성령이 임하는 장관을 경험한다. 그 성령이 임한 순간부터 교회는 더 이상 숨어 있지 않고 거리로 나가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했고, 이내 예루살렘이 발칵 뒤집혔다.

오늘날도 교회가 같은 경험을 할 수 있을까? 장재형 목사는 “당연히 가능하다. 다만, 그 조건은 오늘날 교회가 부활신앙의 실제적 파워를 믿고, 내부의 문제(배신·부패·불신)를 회개와 기도로 해결하며, 성령의 인도하심을 온전히 구하는 데 달렸다”고 주장한다. 마가의 다락방과 맛디아의 선택은, 교회가 어떻게 부활하신 주님의 능력을 실제 삶에서 체험하고, 어떠한 방식으로 공동체 안의 갈등과 상처를 극복하여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는지를 보여주는 대표적 사례다.

부활신앙으로 대표되는 기독교의 핵심은 “이 땅의 죽음, 절망, 실패가 결코 마지막이 아니다”라는 믿음이다. 가룟 유다라는 절망적 사례가 있어도, 교회는 맛디아를 통해 복음 전파의 긴 역사를 이어 간다. 우리가 때로는 베드로처럼 주님을 부인하고 죄책감 속에 살지라도, 요한복음 21장처럼 주님이 친히 우리를 다시 찾아오시고 회복시킨다. 그 은혜가 우리를 예루살렘 마가의 다락방으로 이끌어, 무기력한 상태가 아니라 담대한 성령의 능력을 입어 세상 한복판으로 나가도록 만든다.

이와 같은 과정을 거쳐 초대교회는 결국 사도행전 28장 마지막 절에서 “금하는 사람이 없었다”라는 당당한 선포로 마무리한다. 복음 전파를 막을 수 없었다는 뜻이다. 바울은 로마의 옥중에서도 복음을 전했고, 베드로는 역사의 기록에 따르면 거꾸로 십자가에 달리는 순교로 사명을 마무리했으나, 그의 뒤를 잇는 수많은 제자들이 또다시 교회의 빈 자리를 채워나갔다. 이처럼 교회는 주기적으로 흔들리고 넘어질지라도, 부활신앙과 성령의 능력 안에서 새롭게 일어선다.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이 무너져도, 하나님께서는 사도직을 회복하고, 땅끝까지 이어지게 하는 방법을 갖고 계신다.

맛디아의 선택은 바로 이 ‘회복’과 ‘전진’의 두 가지 정신을 모두 아우른다. 교회가 내부의 상처를 치유하고, 부활신앙에 기초하여 더 큰 비전을 향해 나아가는 출발점이 되는 것이다. 이 메시지는 오늘날도 여전히 유효하고, 교회 지도자들마다 사역 현장에서 다양한 갈등과 문제를 마주할 때마다, “초대교회는 어떻게 이 난관을 돌파했나?”를 돌아보면, 결국 그 답은 “부활신앙의 견고한 고백과 성령의 임재를 기다리는 기도, 그리고 투명한 공동체적 절차”에 있음을 깨닫게 된다.

장재형 목사는 이를 정리하며 말한다. “부활은 능력이다. 그 능력은 우리 마음 안에 역사할 때, 사람을 살리고, 교회를 살리고, 그리스도의 몸을 세운다. 아무리 큰 배신자가 있어도, 그 배신을 넘어 교회는 다음 단계로 나아갈 수 있는 회복과 새 출발의 길을 찾게 된다. 유다의 실패가 교회 역사의 종말을 뜻하지 않았듯이, 오늘날 우리가 맞닥뜨리는 어떠한 큰 상처도 하나님 나라의 약속을 소멸시키지 못한다.”

바로 이 지점이 “예루살렘 마가의 다락방과 맛디아의 선택”이 하나로 연결되는 결정적 이유다. 마가의 다락방은 숨죽이고 숨어 있던 제자들이 성령 강림을 경험한 뒤 세상으로 나가 복음을 선포하기 시작한 발화점이라면, 맛디아의 선택은 사도 중 한 사람의 배신과 죽음을 넘어서 교회가 다시 ‘온전한 공동체’로 거듭나는 장면이다. 두 이야기는 “교회 안의 배신·부인·두려움이, 주님의 부활과 성령의 임재로 말미암아 어떻게 회복과 능력의 역사로 바뀌는가”를 종합적으로 보여준다. 여기에는 슬픔과 회환이 섞여 있지만, 더욱 강력한 하나님의 은혜가 깃들어 있다. 그 결과, 초대교회는 예루살렘을 넘어 땅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는 길로 분연히 일어설 수 있었다.

오늘날 교회도 마찬가지다. 어떤 지역 교회나 공동체가 마치 마가의 다락방처럼 ‘현대적 의미의 다락방’을 회복해 부활신앙으로 충만해진다면, 그리고 가룟 유다가 남기고 간 상처를 맛디아의 선출처럼 투명하고 말씀에 충실한 방식으로 치유한다면, 성령의 새 역사를 기대할 수 있다. 오순절 사건이 2000년 전 어느 한 장소에서만 일어난 ‘역사적 일회성’이 아니라, 모든 시대와 지역의 교회가 체험할 수 있는 하나님의 운동인 것이다.

이러한 가르침은 장재형목사가 줄곧 강조해온 “부활신앙의 실천성”과 맞닿아 있다. 성경에서 예수님의 부활을 지적(知的)으로만 받아들이고 말면, 그것은 단순한 교리에 그친다. 그러나 초대교회는 이 부활을 실제 삶의 원동력으로 삼아, 배신이나 고난, 죽음이나 절망도 더 이상 끝이 아님을 시연해 보였다. 베드로와 사도들이 예루살렘 한복판에서 자신들을 죽이려 했던 세력들에게도 담대히 복음을 전하는 모습은, 부활이 얼마나 실재적이고 폭발적인 힘을 발휘하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러므로 “교회란 무엇인가?”라는 질문에 대해 “예루살렘 마가의 다락방에서 시작되어, 가룟 유다의 배신을 맛디아의 선출로 회복하고, 성령 강림을 통해 전 세계로 나아간 공동체”라고 답할 수 있다. 그 정체성은 역사의 시공간을 넘어 오늘도 유효하며, 교회가 부활신앙을 지키는 이상 결코 문이 닫히지 않는다. 때로 교회 내부에 치명적인 균열이 일어나더라도, 하나님께서는 새로운 인물을 세워 그 자리를 회복시키시고, 또다시 성령을 부어주신다. 이것이 “예루살렘에서 시작하여 로마에 이르기까지, 그리고 전 세계에 이르기까지” 이어지는 복음의 연속성이자, 현대 교회가 이어받아야 할 믿음의 유산이다.

장재형 목사의 결론적인 권면도 여기에 맞닿는다. “우리는 현재적 다락방을 회복해야 하며, 배신과 실패가 일어날 때마다 그것을 덮는 대신 진실하게 회개하고 투명하게 해결함으로써, 하나님께서 주시는 새 출발의 기회를 붙잡아야 한다. 그 중심에는 ‘부활의 주님’이 계시고, 그분이 교회를 통해 이루고자 하는 선교적 사명이 놓여 있다.” 교회가 이 길에 순종할 때, 사도행전의 역사는 중단되지 않고 계속 펼쳐질 것이다.

faithfulnews.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