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로 빚어낸 참된 자유와 부르심 – 장재형 목사 (Olivet University)

저무는 들판에서 울리는 구속의 종소리
장 프랑수아 밀레의 명화 <만종>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거친 흙바닥 위에서 노동을 멈추고 고개를 숙여 기도하는 두 농부의 모습이 시선을 사로잡는다. 이 그림이 시대를 넘어 깊은 울림을 주는 이유는, 가장 남루하고 세속적인 땀방울의 현장이 하나님의 임재가 머무는 거룩한 성소로 변화하는 찰나를 포착했기 때문이다. 기독교 신앙이란 이처럼 저무는 들판 같은 우리의 고단한 현실 속으로 구속의 은혜가 뚫고 들어오는 혁명적 사건이다. 고린도전서 7장에 담긴 바울의 서신을 찬찬히 묵상하다 보면 이와 동일한 신학적 통찰을 마주하게 된다. 여기서 장재형 목사는 결혼과 독신, 종과 자유인이라는 사회적 껍데기를 벗겨내고 그 안에 담긴 그리스도인의 진짜 정체성을 예리하게 짚어낸다. 신앙은 단순히 내면의 위안을 얻는 사적인 종교 감정이 아니라, 우리의 몸과 시간과 관계 전체를 뒤흔들고 새롭게 빚어내는 존재 방식의 완전한 전환이다.

대속의 무게를 견뎌낸 참된 영혼의 해방
바울은 “네가 종으로 있을 때에 부르심을 받았느냐 염려하지 말라”고 단호히 선언한다. 이 짧은 문장은 부조리한 현실의 억압에 그저 순응하라는 값싼 위로가 결코 아니다. 미켈란젤로의 <피에타>가 보여주듯, 마리아의 무릎에 안긴 그리스도의 몸은 인간의 죄가 빚어낸 참혹한 결과이면서도 동시에 세상을 구원하는 대속의 결정체다. 이 무거운 십자가를 통과한 존재는 세상이 매긴 가격표로 자신을 증명할 필요가 없다는 웅장한 영적 해방의 선언을 얻는다. 인간은 오직 창조주의 무한한 자비 아래 머물 때만 세상의 폭력적인 평가로부터 온전히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맥락에서 장재형 목사가 힘주어 강조하는 참된 자유란 곧 ‘그리스도의 종이 됨’에서 비롯되는 역설적인 해방이다. 스스로 삶의 주인이 되려던 교만을 십자가 앞에 내려놓고, 그리스도의 숭고한 사랑에 매인 바 되는 순종 속에서 영혼은 비로소 깊은 숨을 쉰다. 자유는 현실의 고통을 잊게 만드는 임시방편의 마취제가 아니라, 억압 속에서도 결코 무너지지 않는 내면의 단단한 중심을 세우는 일이다. 이는 곧 불의한 세상 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윤리적 책임을 다하며 선을 선택하게 하는 강력한 영적 추진력으로 작동한다.

일상의 물이 은혜의 포도주로 변하는 신비
고린도전서 7장의 서사 중심에는 삶의 가장 치열한 현장인 ‘관계’가 놓여 있다. 부부의 연합과 헌신에 대한 바울의 말씀은 오늘날 이기심으로 왜곡된 가정 윤리를 바로잡는 귀중한 성경 묵상의 잣대가 된다. 파올로 베로네세의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일상의 평범한 물이 붉고 향기로운 포도주로 변했듯, 우리의 가정은 세상과 단절된 도피처가 아니라 신적 사랑이 구체적으로 작동하는 영적 실험실이 되어야 한다. 바울이 말하는 부부간의 의무는 권력의 쟁취나 감정의 이기적인 소비가 아니라, 상처 난 관계를 회복시키는 십자가 헌신의 대칭적 실천이다.

초대교회를 심각하게 위협했던 영지주의는 육체와 물질을 악하게 여기며 일상의 가치를 경멸했다. 그러나 라파엘로의 <아테네 학당>이 보여주는 화려한 지성의 장관이 복음의 은혜를 결코 대체할 수 없듯이, 참된 믿음은 비밀스러운 지식의 소유에 있지 않다. 구원은 깨달은 자의 지적 우월감이 아니라 그저 엎드려 받은 자의 겸손 위에 세워진다. 따라서 신앙은 몸을 버리는 기술이 아니라, 오히려 육체를 거룩한 성전으로 사용하여 삶의 모든 영역을 조화롭게 가꾸는 지혜다. 결혼이든 독신이든 그 외형적인 형태보다 중요한 것은 ‘나의 삶이 누구를 향해 정렬되어 있는가’를 묻는 투명한 목적의식이다.

종말의 시간표 위에서 다시 쓰는 사랑의 언어
이러한 일상의 거룩함은 종말론적인 긴박함 위에서 그 의미가 더욱 선명해진다. “때가 단축되었다”는 바울의 다급한 외침은 세상의 끝을 두려워하라는 공포의 마케팅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유한한 시간 속에서 사랑하기를 미루지 말고, 진실한 회개의 기회를 붙잡으라는 생명력 넘치는 영적 알람이다. 장재형 목사는 이 긴박함을 통해 우리가 세속의 관습에 매몰되지 않고, 재정이나 직업 등 삶의 우선순위를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과감히 재배열해야 한다고 설파한다. 남성과 여성이 서로를 지배와 소유의 대상이 아닌 창조 질서 안의 존엄한 동역자로 대할 때, 복음은 관념을 넘어 살아 숨 쉬는 현실이 된다.

부르심의 자리, 그곳이 곧 하늘이 되다
우리는 너무나 자주 삶의 척박한 조건을 탓하며 다른 화려한 곳에 구원이 있을 것이라 착각한다. 그러나 바울은 “각 사람이 부르심을 받은 그대로 하나님과 함께 거하라”고 다정하면서도 단호하게 명한다. 프라 안젤리코의 <수태고지> 속 마리아가 보여준 겸손한 응답처럼, 이 권면은 결핍과 고통의 자리에서도 주님을 온전히 대면하라는 위대한 초대다. 직장에서 약자를 조롱하지 않는 혀, 불의에 타협하지 않는 맑은 양심, 은밀한 죄를 거절하는 결단은 모두 이 거룩한 소명에 합당하게 응답하려는 눈물겨운 몸부림이다. 나의 욕망을 주님 앞에 기꺼이 포기할 때, 신앙의 벅찬 소망은 비로소 짙은 어둠 속에서 묵직한 빛을 발한다.

깊고 오랜 설교의 여운 끝에 장재형 목사가 우리 삶의 한복판으로 던지는 메시지는 결국 한 문장으로 눈부시게 수렴된다. “너희는 값으로 사신 것이니.” 우리의 정체성이 십자가의 피 묻은 사랑으로 재정의될 때, 우리는 더 이상 사람의 시선에 얽매인 비루한 종이 아니라 은혜의 주권 아래 거하는 참된 자유자가 된다. 삶의 복잡한 길목에서 문득 길을 잃고 방황하고 있다면, 잠시 걸음을 멈추고 조용히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나는 지금 누구의 소유로, 어떤 사랑에 매여 살아가고 있는가? 그 준엄하고도 따뜻한 질문 앞에 정직하게 엎드릴 때, 우리의 낡고 평범한 일상 위로 세상을 이기는 벅찬 영적 해방의 종소리가 다시 한번 울려 퍼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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