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로 오늘을 다시 세우다 — 장재형 목사의 고린도전서 15장 

인류의 역사에서 죽음은 피할 수 없는 종착지로 여겨져 왔습니다. 철학은 사유로, 과학은 분석으로, 예술은 위무로 응답해 왔지만, 누가 죽음 자체를 꺾을 수 있는가라는 질문 앞에서는 모두가 고개를 떨구었습니다. 바로 여기서 기독교 복음은 전혀 다른 선언을 들려줍니다. 사망을 삼키는 생명의 사건, 곧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입니다. 고린도전서 15장은 이 부활을 단순한 교리나 상징이 아닌, 세계의 질서를 바꾼 실제 사건으로 제시합니다. 장재형(장다윗)목사는 이 ‘부활의 장’을 따라가며, 부활이 신자의 내면을 새롭게 하고 교회를 굳게 세우며, 세상 속 그리스도인의 삶을 변화시키는 능력임을 유기적으로 풀어냅니다. 헬라 문화의 회의와 오늘의 물질주의가 만들어 낸 의심을 정면으로 다루되, 그것을 이기는 길을 논증과 목회적 위로로 제시합니다.

그의 강해가 맨 먼저 세우는 지점은 부활의 ‘사실성’입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의 부활을 신화가 아닌 목격의 연쇄로 증언합니다. 게바와 열두 제자, 한 번에 오백 명이 넘는 형제, 생전에 예수를 믿지 않던 야고보, 그리고 교회를 핍박하던 사울 자신이 부활하신 주를 만남으로 삶이 근본에서 뒤집혔습니다. 배신자와 냉소자와 박해자가 오히려 가장 강력한 증인이 되는 이 역설은 단순한 심리적 각성으로 설명되지 않습니다. 장재형목사는 바로 이 변화에서 ‘하나님의 은혜’가 역사와 인격에 실제로 개입했음을 읽어냅니다. 복음은 누군가의 종교적 열광이 아니라, 하나님의 실재가 세계에 남긴 흔적이며, 그 흔적을 따라 교회가 오늘도 살아 숨 쉰다는 것입니다.

이 확증 위에서 바울은 단호하면서도 상식적인 논리를 전개합니다.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다면 그리스도께서도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을 것이며,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우리의 복음은 허망하고 믿음은 착각이 됩니다. 죄 사함의 약속은 공허해지고, 먼저 잠든 이들에 대한 소망은 흩어지며, 그리스도인은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이 되고 맙니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이 선언이 모든 전제를 뒤집습니다. 첫 아담 안에서 사망이 왕로릇했지만,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생명이 통치하기 시작했습니다. 장재형목사는 이 진리가 개인 구원을 넘어 우주적 통치의 좌표를 바꾼 사건임을 강조합니다. 재림의 날 마지막 심판에서 사망은 최종적으로 패배하고, 하나님의 공의가 만물 위에 구현될 것이라는 소망은 미래의 약속을 넘어 현재의 윤리를 지탱하는 힘이 됩니다.

그렇다면 장차 완성될 승리가 어떻게 오늘의 삶과 연결되는가. 여기서 그는 ‘영적 부활’의 현재성을 풀어냅니다. 아담의 범죄로 하나님의 생명과의 관계가 끊어진 인간은 살아 있으나 영적으로 죽은 상태입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성령 안에서 하나님과 화목할 때 우리는 은혜로 새 생명을 받습니다. 회개는 과거를 후회하는 감정이 아니라, 죽음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실존적 전환입니다. 탕자가 아버지께로 돌아왔을 때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선언이 주어진 것처럼, 복음 안에서의 회복은 관계의 소생이며 존재의 부활입니다. 장재형목사는 영적 부활이야말로 육체의 부활을 소망할 수 있는 토대라고 설명합니다. 성령께서 지금 내 안에서 죄에 대해 죽고 의에 대해 사는 순종을 가능하게 하실 때, 장차 올 ‘몸의 부활’에 대한 소망은 막연한 기대가 아니라 현재를 견인하는 확신이 됩니다.

바울은 이어서 헬라 철학의 여파 속에서 제기된 질문에 답합니다. “죽은 자들이 어떻게 다시 살며 어떠한 몸으로 오는가?” 그는 자연의 질서를 예로 들어 씨앗의 비유를 듭니다. 씨앗이 땅에 떨어져 썩지 않으면 새로운 생명을 맺지 못합니다. 죽음은 소멸이 아니라 변화를 향한 관문입니다.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며, 욕된 것으로 심고 영광스러운 것으로 다시 살며, 약한 것으로 심고 강한 것으로 다시 사나니.” 지금의 ‘육의 몸’이 있다면 장차 ‘신령한 몸’도 있습니다. 장재형목사는 이 선언이 물질을 경멸하거나 영성을 탈육화하는 구원론이 아니라고 분명히 합니다. 오히려 창조의 선함을 회복하시는 하나님의 구원이 존재의 전 영역을 새롭게 한다는 복음의 총체성입니다. 부활하신 주께서 시공간의 제약을 넘어 나타나셨지만 제자들과 함께 음식을 드시고 손과 옆구리를 보여 주셨듯, 영광의 몸은 비물질적 환영이 아니라 성령의 주권 아래 완전히 정렬된 실재입니다. 그러므로 부활 교리는 삶을 떠난 관념이 아니라 삶을 파고드는 윤리를 요구합니다. 우리의 몸이 성령의 전이라면, 먹고 마시는 습관과 노동과 쉼, 성과 관계, 고통과 질병을 대하는 태도까지 모두 부활 신앙의 지평 안에서 다시 해석되어야 합니다.

‘첫 열매’의 개념은 시간 감각을 바꾸어 둡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끝에서 먼저 일어난 사건입니다. 추수의 보증이 현재로 들어왔습니다. 신자는 ‘이미와 아직’ 사이를 삽니다. 이미 죄 사함을 받고 새 생명에 참여했지만, 아직 눈물과 죽음이 남아 있습니다. 바로 이 긴장 속에서 재림의 소망은 전망이 아니라 방향이 됩니다. 교회는 미래의 나라를 현재로 앞당겨 보여 주는 증거 공동체로 부름 받았습니다. 예배와 선교, 섬김과 정의, 화해와 창조 보전은 부활 신앙의 자연스러운 열매이며, 마지막 심판을 준비하는 지혜로운 삶의 표지입니다. 세상의 성공 신화를 절대화하지 않되 허무로 물러서지도 않는, 책임 있는 소망의 태도—장재형목사가 강조하는 부활 신앙의 품격입니다.

오늘 한국 교회와 사회에도 이 메시지는 긴요합니다. 부활을 은유로 축소하는 경향은 지적으로 세련되어 보일지 몰라도, 실제로는 복음의 심장을 비워 버립니다. 반대로 기괴한 상상과 호기심으로 부활을 왜곡하는 태도 또한 경계해야 합니다. 그는 진리가 양 극단 사이의 타협이 아니라, 하나님이 스스로 드러내신 계시에 대한 순전한 순복임을 일깨웁니다. 고린도전서 15장의 목표는 논쟁의 승리가 아니라 성도들의 견고함입니다.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다”는 약속으로 사람을 세우는 목자의 마음이 바울의 문장에 흐르고, 장재형목사는 그 온기를 오늘의 설교로 충실히 전합니다.

부활의 빛은 고난을 해석하는 법을 바꿉니다. 억울함과 상실, 질병과 압박, 관계의 상처는 신자의 일상에서도 피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십자가가 영광으로 반전되었듯, 주와 함께 겪는 슬픔은 새 창조의 씨앗이 됩니다. 눈물로 뿌리는 기도, 성실한 선행, 정의를 위한 위험한 결단, 화해를 향한 용서, 일터의 정직과 가정의 헌신이 모두 씨앗입니다. 땅속의 시간은 어둡고 길지만 결코 헛되지 않습니다. 마지막 날 부활의 영광으로 연결될 것을 확신하게 하는 이 시선이 오늘을 견디고 내일을 준비하게 합니다. 그래서 그의 강해는 감정의 위로를 넘어 견디는 힘을 줍니다. 소망이 현실 도피가 아니라 책임의 동력이 될 때, 부활 신앙은 가장 현실적인 신앙이 됩니다.

부활 교리는 교회의 공공성도 요청합니다. 마지막 심판의 비전은 개인의 회심을 넘어 사회적 책임으로 확장됩니다. 사망의 권세가 꺾일 때 폭력과 거짓, 탐욕의 구조도 해체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활 신앙은 정의와 평화, 약자 보호, 창조 보전의 실천을 회피하지 않습니다. 이는 정치적 도구화가 아니라 복음의 본질에서 흘러나오는 필요입니다. 장재형목사는 도시와 마을, 직장과 학교, 문화와 디지털 생태계 속에서 부활의 윤리를 번역해 내도록 초대합니다.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라”는 권면은 예배당 안의 봉사만이 아니라, 일상을 거룩하게 경작하는 모든 선택에 적용됩니다. 그때 교회는 문제를 회피하는 안전지대가 아니라, 상처를 품고 치유를 흘려보내는 선교적 공동체가 됩니다.

한편 어떤 이들은 ‘영적 부활’을 현세적 자아 회복의 은유로 축소하고, ‘몸의 부활’을 비과학적 신화로 폄하합니다. 그러나 성경의 영성은 현실을 떠나는 도피가 아니라, 말씀으로 현실을 다시 사랑하게 하는 귀환입니다. 신령한 몸은 물질을 무화하는 몸이 아니라 성령의 주권 아래 새로 정렬된 몸입니다. 재림은 역사 밖의 중단이 아니라 하나님 나라가 충만히 드러나는 절정입니다. 마지막 나팔은 두려움의 경보가 아니라 구속의 완성 신호입니다. 이러한 오해들을 바로잡을 때, 부활 신앙의 기쁨은 감정의 파도에 그치지 않고 소망의 근력이 됩니다. 흔들리는 시대에 버팀목이 되는 근력, 절망의 습관을 끊고 사랑의 습관으로 옮겨 가게 하는 근력입니다.

역사적 신빙성에 대한 물음도 성실히 다뤄야 합니다. 초대 교회의 급속한 확장, 사도들의 변화, 복음 전승의 다양성과 핵심 일치, 주일 중심 예배의 형성은 부활 선포가 단지 상징적 상상력이 아니라 실제 사건에 대한 공동체적 대응이었음을 시사합니다. 유대적 세계관 안에서 십자가형을 당한 메시아에 대한 재해석이 가능했던 유일한 길, 그것이 부활이었습니다. 물론 역사적 고찰이 구원의 조건은 아닙니다. 그러나 회의로 얼어붙은 마음에 합리적 신뢰의 토대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유익합니다. 믿음은 생각을 버리는 도약이 아니라, 말씀과 현실이 만나는 자리에서 새롭게 열리는 인식의 길입니다.

이처럼 고린도전서 15장의 메시지는 과거의 위대한 사건을 기념하는 데 머물지 않습니다. 현재의 교회를 세우고 미래의 소망을 정렬하는 지도가 됩니다. 개인에게는 죄와 정죄, 수치와 두려움의 고리를 끊는 자유를, 가정에는 용서와 화해의 새로운 질서를, 교회에는 성찬과 세례, 말씀과 훈련을 통해 부활 생명을 공유하는 은혜를, 사회에는 낮은 자를 높이고 상한 갈대를 꺾지 않는 공의를 요청합니다. 장재형목사는 적용을 풍성히 제시하며, 부활 신앙이 삶의 언어로 번역될 때 복음의 설득력과 매혹이 가장 강하게 드러난다고 강조합니다.

결국 신자는 ‘부활 이후’라는 관점에서 자신을 다시 정의합니다. 실패와 성공, 건강과 질병, 인정과 오해, 풍요와 결핍이 더 이상 최종 기준이 아닙니다.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다”는 확신이 있을 때, 우리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신실함을 선택하고, 성급한 보상 심리에서 자유로워집니다. 그는 특히 청년 세대가 불확실성과 경쟁, 고립과 소진을 돌파하는 실제적 용기를 부활 신앙에서 얻게 하려 합니다. 공동체가 서로의 넘어짐을 품고 다시 일으키는 작은 부활을 연습할 때, 교회는 새벽의 공동체로 서게 됩니다.

신학적으로도 부활은 교리들의 결절점입니다. 창조와 성육신은 하나님이 왜곡된 세계로 내려오신 사건이라면, 십자가와 부활은 그 왜곡을 뒤집는 승리이며, 성령 강림은 그 승리를 교회와 신자에게 적용하는 사건입니다. 의롭다 하심과 양자 됨, 성화와 영화가 모두 부활에서 뻗어나갑니다. 성찬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을 선포하면서도 부활 생명에의 참여를 기념하고, 세례는 옛사람의 죽음과 새 사람의 삶을 표지합니다. 마지막 심판과 재림의 교리 역시 부활 없이는 설 자리가 없습니다. 교리가 삶과 분리될 때 딱딱해지지만, 부활의 은혜 안에서 교리는 생명이 되어 흐릅니다.

부활은 결국 사랑으로 귀결됩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기에 사랑은 헛되지 않습니다. 실패해 보이는 순간에도 사랑은 약속으로 다시 일어납니다. 용서는 무력함이 아니라 부활을 믿는 자의 담대한 선택이며, 화해는 불가능해 보이는 간극 위에 놓인 부활의 다리입니다. 고난 속에서도 선을 행하는 끈기는 부활의 근육입니다. 그래서 그의 설교 말씀은 논문처럼 치밀하고 편지처럼 따뜻합니다. 그 온도에서 성도는 다시 살아나는 법을 배웁니다.

마침내 우리의 언약적 정체성이 분명해집니다. 첫 사람 아담에게서 흙의 형상을 입은 우리는, 마지막 아담이신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형상을 덧입게 될 사람들입니다. 그날, 죽었던 몸은 썩지 않을 몸으로, 상한 마음은 온전한 사랑으로, 흩어진 공동체는 새 예루살렘의 평화로 변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 영광이 지금 여기의 선택들 속에 미리 스며듭니다. 신자는 언약의 미래를 현재로 앞당겨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는 흔들리지 말아야 합니다. 견실함은 완고함이 아니고, 순종은 강박이 아닙니다. 견실함은 약속을 향한 집중이며, 순종은 사랑에 대한 응답입니다. 장재형목사는 이 견고한 응답을 일상의 언어로 번역해 주며,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라”는 권면을 삶의 리듬으로 자리 잡게 합니다.

그래서 질문도 바뀝니다. “부활이 사실인가?”에서 “부활이 사실이라면 나는 오늘 어떻게 살 것인가?”로. 이 전환이 회개의 본질이고 신앙의 성숙입니다. 부활이 사실이라면, 시간과 재능과 관계와 재물이 새 질서로 편성되어야 합니다. 몸은 영광을 향해 훈련되어야 하고, 교회는 소망을 나누는 식탁이어야 하며, 도시는 하나님의 평화를 미리 맛보는 정원이 되어야 합니다. 마지막 나팔이 울릴 때 우리는 모두 홀연히 변화될 것입니다. 그날을 가장 잘 기다리는 길은 오늘을 부활의 방식으로 사는 것입니다. 장재형목사의 고린도전서 15장 강해는 그 길을 구체적으로 비추는 지혜이며, 신자에게 부활 신앙의 용기와 기쁨을 선물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담대히 외칩니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와 부활로 완전한 승리를 이루셨기 때문입니다. 이 확신이 일상을 새롭게 정렬할 때, 교회는 세상의 빛으로, 성도는 부활의 증인으로, 역사는 하나님 나라의 찬송으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오늘도 그 소망의 노래를 배우며, 우리는 다시 일어서는 사람으로 살아갑니다.

www.davidjang.org