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 깊은 데로 나아가 그물을 내리라는 부르심과 제자의 사명
예수님께서 갈릴리 호수, 곧 게네사렛 호숫가에 서 계실 때의 장면(눅 5:1-11)은 우리가 이미 여러 복음서를 통해서도 익히 알고 있는 사건이지만, 누가복음 5장은 마태복음 4장과 비교했을 때 조금 더 상세하고 생생한 묘사를 담고 있습니다. 특히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고기를 잡으라(눅 5:4)”는 명령과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눅 5:10)”는 선언은 제자로 부름받은 이들의 구체적 사명을 직접적으로 보여줍니다. 갈릴리 어부로 살던 베드로와 안드레, 또 야고보와 요한 같은 평범한 이들이 어떻게 ‘사람 낚는 어부’가 되는지에 대한 전환점을 극적으로 드러내 주는 장면입니다.
장재형(장다윗)목사는 이 본문을 두고, 예수님께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라”라고 하신 말씀을 ‘천명(天命)’이자 ‘그레잇 커미션(Great Commission)’을 이루는 실제적 행동 지침으로 풀이합니다. 물고기를 잡던 어부가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는 그 전이(轉移)는 인간의 노력이나 지식으로는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어마어마한 차원의 도약을 의미합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이 장면에서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눅 5:8)”라며 두려워하고, 예수님은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눅 5:10)”라고 하십니다. 이처럼 부름받은 제자가 겪는 두려움과 설렘, 그리고 과거와 전혀 다른 길을 가게 될 것이라는 예수님의 예언이 동시에 드러나는 사건이 바로 눅 5:1-11입니다.
우리는 여기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라’라는 말씀에 대해 다시금 묵상해야 합니다. 이것은 물고기를 잡고 안 잡고를 넘어서는 문제입니다. 누군가에게는 인생의 한가운데서 진지하게 자신이 받은 소명을 확인해야 하는 결정적 부르심이 될 수 있습니다. 게네사렛 호숫가에서의 이 사건은 우리의 삶에도 계속해서 반복되는 본질적 질문을 던집니다. 과연 우리는 어떤 목적을 위해 살아가고 있으며, 무엇을 위해 부름을 받았는가? 예수님은 어부였던 제자들에게 “깊은 곳으로 나가라”고 하셨습니다. 얕은 물가에서 조금 잡다가 실패에 지치고 낙심해 그물을 씻고 있던 그들에게, 상식과는 전혀 다르게, 다시 한번 바다로 나가서 그물을 내려보라고 하십니다. ‘밤이 새도록 수고했지만 빈 그물이었습니다’라는 베드로의 현실 고백이 무색할 정도로, 주님의 말씀 한 마디가 상황을 뒤집는 열쇠가 됩니다.
장재형목사는 이것이 바로 신앙 안에서 일어나는 역설적 진리임을 강조합니다. 현실적으로는 ‘이미 노력해 봤다, 안 된다, 해 봤는데 빈손이었다’라는 상황이 존재할 수 있습니다. 전도와 선교의 현장에서도 그럴 때가 많습니다. 아무리 애써도 결과가 보이지 않고 열매가 안 맺히는 것 같아 보이는 순간이 다가옵니다. 그런데 주님의 말씀, 즉 “깊은 데로 가라”는 명령에 다시금 순종할 때, 그물이 찢어지도록 고기가 잡히는 기적을 체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역사적이고도 상징적인 사건이 제자들의 ‘사람 낚는 어부’로서의 여정을 시작하게 하였습니다.
사실 베드로의 대답,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눅 5:5)”에는 중요한 원리가 들어 있습니다. 모든 인간적 경험과 지식, 게다가 지쳐 있는 몸과 마음이 ‘아무 소용이 없다’는 결론을 내렸음에도, 하나님 말씀에 대한 믿음이 그를 다시 한번 순종하게 만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말씀을 따라 그물을 내린 결과, 심히 많은 물고기가 잡혀 그물이 찢어지게 되었습니다. 다른 배를 불러서까지 도와 달라고 할 정도로 배가 가라앉을 만큼 고기를 잡은 것은, 주님의 말씀을 따라 움직일 때 나타나는 풍성함을 상징적으로 보여줍니다. 전도의 사역 역시 이와 유사한 패턴을 지닙니다. 사람을 구원하는 일, 영혼을 인도하는 일은 인간의 능력과 지혜가 아닌, 전적으로 말씀에 대한 순종과 성령의 역사로 이뤄지는 것입니다.
베드로가 그 광경을 보고 “주여 나를 떠나소서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했을 때, 이는 단순히 ‘죄책감’을 느꼈기 때문만이 아니라, ‘이런 능력을 보이시는 분 앞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구나, 나의 삶은 초라하고 보잘것없는 것을’이라는 절실한 깨달음에서 비롯된 것이었습니다. 전능하신 주님 앞에서 스스로를 의지하는 삶이 얼마나 한계가 뚜렷한지를 체감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며 그에게 새로운 길을 열어 보이십니다. 이처럼 전혀 다른 차원으로 초대받는 것은 인간적으로 보면 두렵고 낯선 도전입니다. 그러나 주님의 약속과 명령이 있는 그 자리에는 반드시 성취가 따릅니다.
이제는 이 예수님의 말씀을, 오늘날 우리에게 주어진 소명으로 받아들여야 합니다. 흔히 이 장면을 전도에 적용하면서, ‘무엇을 먹고 살 것인가?’라는 일상의 문제와 ‘사람을 구원하는 사역’이라는 영적인 문제가 서로 연결되어 있음을 깨닫게 됩니다. 사실 그동안의 교회사에서 “사람 낚는 어부가 되라”는 예수님의 말씀은 전도와 선교의 핵심 구절로 사랑받아 왔습니다. 그리고 그 말씀에 기초해 교회가 부흥해 왔으며, 많은 성도들이 헌신과 순종을 배웠습니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두고 ‘깊은 데로 가라는 말씀은 전 세대, 전 세계에 걸쳐 변치 않는 하나님의 부르심’이라고 말합니다.
또한, 이 본문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또 다른 관점은, ‘어부’로서의 정체성을 벗고 ‘사람 낚는 어부’라는 새로운 정체성을 입는 과정이 매우 짧은 순간에 일어났다는 점입니다. 보통 인생의 커다란 전환점이 오려면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하지만, 예수님이 베드로에게 ‘깊은 데로 가라’고 하셨을 때 그가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렸고, 단숨에 그 역사를 체험했습니다. 그 체험이 곧 제자들의 길로 들어서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고, 마침내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랐습니다(눅 5:11). 그들은 그날 이후로 본업인 어부로의 삶을 전혀 이어가지 않았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제는 삶의 우선순위와 궁극적 목적이 하나님 나라와 영혼 구원에 두어진 것입니다. 즉, 생계와 일상의 문제를 넘어서서, ‘그물질’ 자체의 의미가 바뀌어 버린 것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명령은 한 개인의 인생 전반을 재정립하게 만듭니다. 물고기를 위한 그물이 아닌 사람을 위해 던지는 그물, 일용할 양식을 넘어 영혼을 살리는 사명, ‘밤이 새도록 수고했음에도 얻은 것이 없음’에서 벗어나 ‘주님의 말씀에 의지하는 놀라운 승리’로 들어가는 변화. 이 전 과정이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실로 큽니다. 장재형목사는 ‘어부가 고기를 잡는 형식과 사람이 영혼을 구원하는 형식이 비슷해 보이나, 실제로는 전혀 다른 차원의 영역이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그 모습을 통해 누구나 이해하기 쉽게 복음을 설명하신다’라고 말합니다. 이것이 복음서의 스토리텔링적 특징이자, 예수님의 가르침 방식입니다.
대개 신학을 공부하는 이들이나 교회의 사역자들은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라”는 이 구절을 가지고 많은 설교를 해 왔습니다. 왜냐하면 전도의 현장이야말로 ‘깊은 데’와 같고, 우리의 노력으로는 결코 불가능해 보이는 곳에서 결국 주님의 능력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교회와 복음의 본질을 잃어버리거나, 혹은 전도의 현장을 떠나 뒷짐 지고 있을 때, 예수님의 이 말씀은 다시금 교회를 깨우는 소리가 됩니다. 헛수고로 끝난 것 같은 경험이 우리를 지치게 만들지만, ‘말씀에 의지하여’ 다시 한번 그물을 던지는 자는 예상치 못한 풍성함을 경험하게 됩니다.
장재형목사는 이러한 본문 해석을 토대로, 실제 교회 사역과 선교, 그리고 교육 영역에서 “깊은 데로” 나아가는 구체적 비전을 제시하기도 합니다. 가령 Great Commission University(GCU)를 설립하며, 교육 현장에서 지식만을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의 영적 갈급함을 채우고, 그들을 세계 선교로 파송하려는 목적을 실현하고자 하는 것도 이 본문의 적용 사례라 할 수 있습니다. 그동안의 교회 교육이 형식과 전통에만 매몰되어 있었다면, 이제는 다시 한번 깊은 바다, 즉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는(마 28:19)’ 명령을 실제로 이뤄 낼 수 있는 장으로 삼자는 비전입니다.
장재형목사는 교회와 다양한 사역 단체, 그리고 개인의 비즈니스 현장에서도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 하나님의 역사를 경험하라고 권면합니다. 그냥 자신에게 익숙하고 편안한 범위, 곧 얕은 물가에서만 그물을 던지는 것이 아니라, 두려울 정도로 깊고 넓은 바다를 향해 나아가라는 것입니다. 거기에는 미지의 도전이 있고, 실패할 수도 있다는 공포가 도사리고 있지만, 주님이 함께하시고 말씀을 주시는 그 자리에는 반드시 놀라운 승리가 보장된다는 믿음을 가지라고 가르칩니다.
이처럼 눅 5:1-11의 말씀은 물고기를 잡는 사건 자체가 기적이라기보다는, 어부들이 전혀 다른 차원의 부르심을 받고 그 길에 순종함으로써 보게 된 ‘하나님의 세계’를 체험하는 데에 핵심이 있습니다. 그들의 빈 그물이 풍성한 그물로 바뀌는 전환, 깊은 데로 나아가는 용기와 주님의 말씀에 대한 온전한 신뢰, 그리고 그 모든 것을 통해 결국은 ‘사람 낚는 어부’로 살아가게 되는 인생의 대변혁이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제자들이 이 부름에 적극적으로 반응하여 모든 것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랐다는(눅 5:11) 결단이, 오늘날 우리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된다고 장재형목사는 말합니다. 그 부름이 교회 안에서 기도하며 대기하는 소극적 태도가 아니라, 전도와 선교의 현장으로 실질적으로 나아가는 능동적 태도로 이어져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사건이 보여주는 핵심은 ‘주께서 우리를 부르신 목적이 무엇인가?’라는 질문으로 압축될 수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고린도전서 1장 26절에서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라고 말합니다. 이처럼 부르심을 받은 자들은 결국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쓰임받도록 구별된 인생이 됩니다. 그리고 그 구체적 모양이 바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라’는 명령을 실행하는 데서 나타납니다. 우리의 소명이란, 비단 교회 안의 예배와 봉사에 국한되지 않고, 삶의 전 영역에서 사람들을 구원하고 영혼을 살리는 방향으로 집중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제자들의 두려움도 우리가 주목해야 할 부분입니다.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는 말씀을 듣기 전까지, 베드로에게는 자신이 알지 못했던 더 큰 세계에 대한 ‘막연한 공포’가 있었습니다. 어부로서의 삶에 만족하거나, 혹은 나름의 생존방식을 굳혀온 베드로 입장에서는, 사람 낚는 어부가 된다는 것은 전혀 다른 생태계를 경험하는 일이었습니다. 허나 그 두려움은 ‘설렘’과 ‘소망’으로 바뀌어야 합니다. 더 넓은 지경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의 음성 앞에서, 우리도 그 은혜 안에 들어가려면 과거의 안전지대를 떠나야 합니다. 이는 우리 각자의 영적 여정에서 상징적으로 반복됩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라”는 요구는, 처음엔 우리의 과거 실패나 두려움을 떠올리게 만들 수 있습니다. ‘이미 밤이 새도록 해 봤지만 결과가 없었다’는 베드로의 말처럼, 수차례 시도해도 안 되었던 것들에 대한 기억이 우리를 묶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의 결핍과 무력함을 뛰어넘어서 일하십니다.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자’고 결심할 때, 비로소 우리의 삶에 초자연적 열매가 맺히는 체험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거기서 베드로는 “나는 죄인이로소이다”라고 고백했습니다. 어쩌면 이전에는, 자신이 경험한 바다에 대한 지식, 어부로서의 기술, 오랜 업(業)에 대한 노하우를 자랑스럽게 여겼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주님이 한마디 하실 때 모든 계산과 예측이 바뀌어 버립니다. 그때 인간은 자신의 제한성과 연약함을 절감하고, 주님 앞에 엎드려 ‘죄인임’을 고백합니다. 그러나 그 고백은 정죄감이나 좌절이 아니라, 새로운 차원으로 진입하는 통로가 됩니다.
그런 맥락에서, 장재형목사는 이 사건을 두고 우리도 ‘주님 앞에 더 낮아지고 순종할 때, 비로소 하나님이 열어주시는 더 깊은 물, 더 넓은 비전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가르칩니다. 이 교훈은 개인의 신앙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와 더 나아가 하나님의 나라를 확장하는 사역 전반에 적용됩니다. 선교지나 전도의 현장에 나가면, 특히 해외에 나가서 문화와 언어, 풍습이 전혀 다른 사람들 앞에서 복음을 전하려 시도할 때 빈 그물이 반복될 수 있습니다. 우리의 지식이나 전략이 소용없을 때가 많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 ‘이제는 저 깊은 곳으로 가라’고, ‘새로운 방식을 시도하라’고 말씀하실 때, 그 명령에 순종하는 자는 결국 풍성한 결실을 볼 수 있습니다.
장재형목사는 이 동일한 논리를 예술, 음악, 비즈니스, 학문, 사회봉사 등 다양한 영역으로 확장시킵니다. 예를 들어, 예술가라면 자기 작품을 통해 어떻게 하나님의 메시지를 전할 수 있을지, 음악가라면 찬양과 세속 음악의 경계를 넘어 더 넓은 영역에서 사람들의 심령 깊은 곳을 울릴 수 있는 사역을 어떻게 펼칠 수 있을지 고민하게 됩니다. 장사나 비즈니스를 하는 이들은 경제활동을 통해 어떻게 더 많은 사람을 주님께로 인도할 수 있을지 모색합니다. 그리고 그 모든 움직임의 핵심에는 ‘주님의 말씀’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단순한 열심이나 방법론만으로는 한계가 분명하기 때문입니다.
누가복음 5장은, 낯선 방식으로 나타나신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과거의 경험이나 실패의 틀을 깨고 전혀 다른 차원의 부르심을 발견하게 되는 사건을 보여줍니다. 이 부르심은 곧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는 거대한 약속으로 이어지는데, 이는 제자들만이 아니라 오늘날 그리스도인인 우리 모두가 붙들어야 할 말씀입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로 살라는 명령은 곧 ‘생명을 구원하라’는 요청이기도 합니다. 한 명의 영혼이라도 더 구원코자 교회는 존재하며, 그리스도인은 이 사명을 위해 자신의 재능과 시간을 활용해야 합니다.
만약 우리가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라”는 이 말씀을 잊어버리고 살아간다면, 그것은 곧 소금이 짠맛을 잃은 상태(마 5:13)와 같을 것입니다. 소금이 짠맛을 잃으면 밖에 내버려져 사람들에게 밟힐 수밖에 없습니다. 교회의 사명, 그리스도인의 사명이 바로 이런 전도와 선교, 즉 사람을 구원하는 일에 있음을 분명히 자각해야 합니다. 아무리 교회가 크고, 재정적으로 안정되어 있으며, 프로그램이 다양해 보여도, 정작 사람 구원이라는 본질을 놓치면 소금의 짠맛을 잃은 것과 다를 바 없습니다. 처음 제자들이 거대한 부르심 앞에서 두려워했듯이, 우리도 나름의 긴장과 두려움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지금도 “무서워하지 말라”라고 하십니다.
그 부르심과 약속을 가슴에 새기고 우리가 새로운 차원으로 나아갈 때, 비로소 우리는 ‘빈 그물’의 처지에서 벗어나 영적 풍성함을 누릴 수 있게 됩니다. 전도와 선교는 결코 인간적인 계략이나 기술로만 되는 일이 아닙니다. 밤새도록 열심히 수고해도 못 잡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한마디와 함께할 때, 하나님의 나라를 향한 문이 활짝 열립니다. 이것이 갈릴리 어부였던 제자들에게 일어난 실제 사건이자, 오늘날 우리의 영적 현실에서 얼마든지 재현될 수 있는 복음의 능력입니다.
2. 추수의 때와 영혼 구원의 비전
마태복음 9장 35-38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모든 도시와 마을을 두루 다니시면서 회당에서 가르치시고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병과 약한 것을 고치셨습니다. 그리고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니 이는 그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마 9:36)”는 말씀이 이어집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의 영혼 상태를 꿰뚫어 보시고, 그들이 마치 목자 잃은 양처럼 방황하고 있음을 지적하십니다. 그리고 이어지는 유명한 비유가 바로 추수와 일꾼에 관한 말씀입니다.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 그러므로 추수하는 주인에게 청하여 추수할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마 9:37-38).”
장재형목사는 이 본문을 누가복음 5장의 ‘사람 낚는 어부’ 비유와 결합하여, 복음 전파와 영혼 구원이라는 동일한 사명이 두 가지 메타포(어부의 비유와 추수의 비유)를 통해 강조되고 있다고 설명합니다. 갈릴리 호수에서 ‘물고기를 잡는’ 행위가 전도의 상징이라면,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다”는 농경적 비유는 땅에서 영혼을 거두는 그림을 보여줍니다. 바다는 험난하고 거칠며 깊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공간인 반면, 들판은 광활하고 햇빛 아래 노출된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서로 다른 이미지이지만, 결국 동일하게 ‘사람을 구원하고 생명을 얻는 사역’을 가리키는 것입니다.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다”는 예수님의 말씀은, 기독교 역사가 진행되는 모든 시대에 걸쳐 여전히 유효합니다. 이 시대에도 여전히 복음이 들려져야 할 땅이 넓고, 교회 밖에는 수많은 영혼이 목자 없는 양처럼 방황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꾼이 적다’는 문제는 과거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교회는 때로 건물을 더 크게 짓고, 프로그램을 늘리는 데 집중할지언정, 정작 한 영혼 한 영혼을 추수하는 ‘일꾼’을 키워 내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전도와 선교는 ‘위임’하거나 ‘누군가가 하겠지’라고 방관하기 쉬운 분야로 전락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추수의 주인에게 청하라”라고 말씀하시면서, 적극적으로 일꾼을 세우라는 과제를 주셨습니다.
그 일꾼들이 곧 누가복음 5장의 ‘사람 낚는 어부’가 되는 이들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갈릴리의 평범한 어부들을 부르시어, 세계 역사를 바꿀 ‘사도’로 만드셨습니다. 그들이 비록 당대 지식층도 아니었고, 정치·종교적 권력자도 아니었지만, 예수님의 부르심에 순종하면서 세상에 복음을 전파하는 핵심 일꾼이 되었습니다. 예수님이 직접 가르치셨던 천국 복음과 죄 사함의 메시지를 전 세계로 퍼뜨리는 일에 이들은 중추적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이것은 현대 교회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원리입니다. 오늘날에도 하나님은 평범한 우리의 일상 속에서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라는 음성을 들려주실 수 있습니다.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라는 탄식을 여전히 우리의 심령에 새기시면서, 교회가 곧 그 일꾼을 양성하고 파송해야 함을 강하게 촉구하십니다.
장재형목사는 이 사명의식을 되살리기 위해, 교회와 목회자, 신학계, 그리고 일반 성도들의 마음가짐이 새로워져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오로지 “나의 신앙만 챙기고, 나의 구원만 보장받으면 된다”는 개인주의적 시각에서 벗어나, 복음이 땅끝까지 전해져야 한다는 ‘대사명(Great Commission)’을 삶의 중심에 두라는 것입니다. 마태복음 28장 19-20절에 따르면, 예수님은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으라”는 명령을 남기셨고, 이는 그리스도인의 공동체가 지상에서 절대적으로 붙들어야 할 과제입니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며,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고 말씀하실 때, 예수님은 이어서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고 약속하십니다. 이는 결코 ‘혼자 떠나는 길’이 아니라, 주님이 친히 동행하시는 길임을 보여줍니다.
추수의 시점은 바로 지금입니다. 우리는 때때로 ‘아직 준비가 덜 되었으니, 언젠가 때가 되면…’ 하고 미루기도 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추수할 것은 많다”고 단언하셨고, ‘일꾼’만 준비된다면 당장 수확할 만큼 누렇게 익은 곡식이 널려 있다는 뜻입니다. 문제는 일꾼이 부족하다는 것이며, 이 말은 곧 교회와 성도들에게 “너희가 가라”는 도전을 안겨 줍니다. 실제로 복음 전파의 역사에서, 먼저 가서 생명을 건 헌신자들이 있었기에 새로운 지역, 새로운 문화권에서 교회가 세워지고, 영혼들이 구원을 얻었습니다.
이 시점에서, “추수의 주인에게 청하여 일꾼들을 보내 달라”는 기도가 교회 안에 깊이 울려 퍼져야 합니다. 그러나 기도로만 멈추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는 이들 자신이 답이 되어야 할 때도 많습니다. 장재형목사는 이 부분을 강조하면서, ‘기도하되 내가 직접 그 일꾼이 되겠다는 결심을 하라’고 도전합니다.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과 소통하는 통로이며, 동시에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는 기폭제가 됩니다. 하나님은 구약 시대나 신약 시대나 언제나 기도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의 뜻을 보여주시고 그들을 부르셔서 구체적인 행동으로 옮기게 하셨습니다. 모세나 다윗, 이사야, 예레미야처럼 하나님의 음성을 들은 선지자들은 자기 부족함을 깨닫고도, 결국 주님의 명령을 따르기 위해 일어섰습니다. “제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라는 이사야의 고백이 그러한 예입니다(사 6:8).
누가복음 5장의 어부들도 마찬가지였습니다. 그들은 밤새도록 수고했으나 빈 그물을 체험하고,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에 다시 한번 그물을 내리는 과정을 통해 기적을 봤습니다. 그 기적은 단지 물고기의 풍성함만이 아니라, ‘이제 내가 무슨 일을 해야 하는가?’라는 깨달음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그 즉시 배와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랐습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행위는 곧 자신들이 그동안 살아왔던 모든 우선순위와 가치관을 바꾸는 결단이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추수의 일꾼이자 사람 낚는 어부가 되어, 교회의 기초를 세우는 기가 막힌 역할을 감당하게 됩니다.
장재형목사는 이 과정을 오늘날의 교회와 성도들이 동일하게 밟아야 한다고 역설합니다. 우리의 빈 그물을 통렬히 인식하고, 주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다시금 그물을 던져야 합니다. 여기서 빈 그물이란, 단순히 전도에 실패했다거나, 교회 성장이 더디다는 의미만이 아닙니다. 나의 영혼이 하나님으로부터 멀어져 있거나, 말씀에 대한 갈급함 없이 형식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상태를 뜻하기도 합니다. 혹은 교회가 사회 안에서 진정한 빛과 소금 역할을 감당하지 못하고, 자기 울타리 안에서만 만족하고 있는 상태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 여러 모습이 ‘빈 그물’로 상징되는 영적 결핍입니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주님은 ‘깊은 데로 가라’고 하십니다. 다시금 말씀에 순종하라는 요청입니다.
추수 현장은 늘 새로운 도전을 요구합니다. 옛날 방식, 옛날 예배 형식, 옛날의 전도 방식을 고집하다 보면, 변화된 세대와 문화 속에서 복음이 유효적절하게 전달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물론 본질적인 복음의 메시지는 절대로 변하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죄를 대신하여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부활하심으로 죄와 죽음의 권세를 이기셨다는 사실은, 어떤 시대에도 가장 중요한 진리입니다. 하지만 이를 전달하는 방식과 우리가 뛰어들어야 할 ‘깊은 바다’의 풍경은 시대마다 달라질 수 있습니다.
한편, 마태복음 9장에서 예수님이 직접 보여주신 사역 방식, 즉 모든 도시와 마을에 두루 다니며 “가르치시고 천국 복음을 전파하시며 모든 병과 모든 약한 것을 고치시는” 모습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예수님은 한 자리에 머무르거나 사람들을‘스스로 오게만’ 기다리지 않으셨습니다. 당신이 직접 사람들의 삶의 터전으로 들어가셨고, 영혼을 돌보고 육체의 질병을 치유해 주셨습니다. 이는 우리도 사람들의 현실 한복판으로 뛰어들어가, 여러 가지 고통과 문제, 상처를 안고 있는 사람들을 직접 만나야 함을 보여줍니다. 목자 없는 양처럼 방황하는 이들에게 다가가 마음을 열고, 예수님의 사랑과 복음을 전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장재형목사는 이 대목을 강조하며, 교회가 더 이상 ‘건물 중심’ 혹은 ‘프로그램 중심’의 사고에 갇혀 있어서는 안 된다고 주장합니다. 물론 예배당은 필요하고, 다양한 프로그램도 한 영혼을 돌보고 양육하는 데 유익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추수’의 비유가 보여주듯, 추수는 들판에서 일어나는 일입니다. 들판에 이삭이 익어 가듯, 세상 곳곳에서 사람들이 ‘복음’을 기다리며, 목자 없는 양처럼 여기저기 흩어져 있습니다. 교회가 정말 이 사람들을 돌보고 그들의 영혼을 살려 내려면, 교회가 있는 그 지역사회와 도시, 더 나아가 다른 나라와 문화권으로 기꺼이 나가야 합니다. 그곳에서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는 주님의 말씀을 다시 기억하며, 복음의 씨앗을 뿌리고 수확해야 하는 것입니다.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라는 지적은, 결국 우리 각자에게 “그러니 네가 가라”라는 호소로 다가옵니다. 언제까지 남이 해 주기를 바라고, ‘누가 대신 가겠지’라고만 생각할 것인가? 각 사람은 자신이 처해 있는 상황 속에서, 일꾼으로 부름받았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 부르심은 목회자나 선교사에게만 주어진 것이 아니라, 교회 공동체 안의 모든 성도들이 함께 감당해야 할 대사명입니다. 어떤 이들은 직장에서, 또 어떤 이들은 예술의 현장에서, 또 다른 이들은 교육의 장에서, 자신이 가진 재능과 기회를 통해 ‘사람을 낚는 어부’ 역할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다양한 분야로 확장된 선교 패러다임’이라고 부릅니다. 과거에는 선교사라 하면 해외로 나가 복음을 전하는 이들만을 떠올렸지만, 이제는 사회 모든 영역이 선교의 장이 될 수 있습니다. 미디어, 문화, 예술, 교육, IT, 비즈니스 등 어디든 복음이 필요한 곳이면 그곳이 바로 추수의 들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친히 “추수의 주인에게 일꾼들을 보내 주소서 하라”고 가르치셨으므로, 교회는 그 일꾼들이 성장할 수 있도록 돕고, 파송하는 역할을 맡아야 합니다.
마태복음 9장의 ‘추수 비유’는 누가복음 5장에 나타난 ‘사람 낚는 어부’ 비유와 똑같은 주제를 담고 있습니다. 첫 번째는 하나님의 마음, 곧 영혼을 불쌍히 여기시는 마음을 지니라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다는 것은, 그들이 단순히 육체적으로 고생하고 있음을 넘어, 영혼이 방황하며 지치고 기진한 상태임을 보신 것이었습니다. 목자가 없는 양은 적의 공격에 무방비하며, 길을 잃으면 찾아갈 길도 모릅니다. 오늘날 수많은 사람들이 인생에서 길을 잃고 허무와 방황 속에 있습니다. 교회가 이 현실을 외면한다면, 이미 복음의 핵심을 놓치고 있는 셈입니다.
두 번째는, 실제로 그 영혼들을 거두어들일 추수 일꾼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교회는 사랑과 긍휼의 마음으로만 끝나서는 안 되고, 구체적인 실행력을 갖춰야 합니다. 말씀이 선포되고, 전도의 현장이 열려야 하며, 영혼들이 교회 안에서 양육과 제자훈련을 받아 또 다른 추수 일꾼으로 세워지는 선순환 구조가 마련되어야 합니다. 이런 선순환이야말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라”는 명령에 순종하는 공동체의 모습입니다. 그물이 찢어지도록 풍성한 고기를 잡는 은혜를 교회가 함께 나누고, 더 많은 이들을 구원하기 위해 기도와 헌신을 계속 이어가는 것입니다.
장재형목사는 이러한 추수 사역을 위해, 교회가 단지 설교와 예배로만 구성되지 않고, 교육·훈련·사회봉사·전문사역 등을 통해 세상과 적극적으로 소통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예수님께서 당시에 회당을 중심으로 가르치시는 동시에 도시와 마을을 직접 방문해 병자들을 고치셨던 사역 방식은, 오늘날 교회가 세상 안에서 어떻게 복음을 전해야 하는가에 대한 좋은 본보기입니다. 사람들의 필요에 귀 기울이고, 그들이 겪는 현실적인 고통에 대해 연대하며 사랑으로 섬기는 것이 첫 단계가 됩니다. 그리고 그들이 궁극적으로 영적인 목마름을 해결할 수 있도록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을 전하는 단계로 나아가야 합니다.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함”이라는 표현은, 단지 옛날 사람들에게만 해당되는 것이 아닙니다. 현대사회에서도 정신적·영적 공허와 우울, 중독 문제, 인간관계의 갈등, 물질만능주의 속의 방황 등이 심각합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교회가 진정한 목자이신 예수님을 증거할 때, 수많은 이들이 자유와 평안을 찾게 될 것입니다. 그것이 곧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다’는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가장 정확한 해석이자 적용입니다. 일꾼이 되어 달라는 부르심 앞에서, 우리 각자는 어떤 태도를 보이고 있을까요? ‘주님, 저는 자격이 없습니다. 다른 사람이 가야 합니다’라고 변명하고 있지는 않은지, 혹은 ‘예, 주님, 제가 그 일꾼이 되겠습니다’라고 결단하고 있는지 돌아봐야 합니다.
이처럼 오늘날 교회 안에 필요한 것은 ‘사람 낚는 어부’의 열정과 ‘추수 일꾼’의 지혜입니다. 한 영혼이 하나님께 돌아오는 일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안다면, 우리는 결코 이 사명을 가볍게 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사실 우리의 지상명령(The Great Commission)은 바로 여기서 비롯됩니다. 장재형목사는 이를 가리켜, “복음 전파의 궁극적 목적은 하늘에서 이루어진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서도 이루어지도록 하는 데 있다”고 말합니다. 그 나라가 임하기 위해, 우리는 예수님의 분부에 따라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야 하며, 세례와 말씀으로 양육해야 하고, 그 과정 속에서 성령의 권능이 나타나도록 기도해야 합니다.
최종적으로 누가복음 5장과 마태복음 9장은 하나의 공통된 결론을 제시합니다. “사람을 취하라, 추수하라.” 이 두 비유는 서로 다른 이미지로 사람들을 구원하는 사명을 묘사하면서, 예수님의 마음과 교회 공동체의 사명을 함께 보여 줍니다. 바울 사도가“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고전 1:26)”라고 한 것처럼, 우리도 주님의 부르심을 바라볼 때, 결국 그 부르심이 ‘영혼 구원’에 맞춰져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그리고 그 부름에 “아멘”으로 답할 때, 교회는 소금이 짠맛을 잃지 않고, 등불이 어두운 세상을 밝히는 참된 공동체가 될 수 있습니다.
깊은 바다에서 빈 그물이 풍성한 그물로 바뀌고, 목자 잃은 양들이 하나님의 우리 안으로 돌아오는 장면은 우리 모두에게 여전히 살아 있는 부르심입니다. 우리 삶의 한복판에서, 말씀에 의지하여 다시금 그물을 내릴 용기와, 목자 없는 양들을 추수할 결단이 요구되는 시점입니다. 장재형목사는 이 장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두려움을 넘어서는 순종’이라고 말합니다. 아무리 상황이 어렵고 우리의 능력이 부족해 보여도, 주님의 명령이 임하면 그 순종을 통해 역사가 시작됩니다. 그리고 그러한 역사를 맛본 자들이 세상 끝까지 복음을 전할 때, 추수의 현장에는 넘쳐 나는 곡식이 주인을 기다리게 됩니다.
바로 이것이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라”와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으니”라는 말씀을 이어 읽을 때 얻는 통찰입니다. 한쪽은 바다, 한쪽은 들판이지만, 둘 다 주님의 구원 계획 안에 포함된 상징입니다. 사람 낚는 어부와 추수 일꾼의 사명이 오늘 우리 모두에게 주어져 있습니다. 우리가 베드로처럼 “말씀에 의지하여 그물을 내리리이다”라고 고백하는 순간, 빈 그물은 찢어지도록 가득 찰 것이고, 교회가 세상의 피난처와 빛이 되어야 한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될 것입니다. 또한 목자 없는 양들 앞에서, 우리가 그들에게 다가가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할 때, 무리를 불쌍히 여기신 주님의 마음이 우리의 마음으로 전달되어, 진정한 추수가 시작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모든 과정을 통해, 주님은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는 약속을 신실하게 지켜 주십니다.
눅 5장의 물고기 잡는 사건과 마 9장의 추수 비유는, 교회와 성도의 사명이 결코 부분적이거나 소극적일 수 없음을 환기시킵니다. 우리는 모든 민족, 모든 영역, 모든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해야 하고, 그 복음을 통해 사람을 낚고, 영혼을 추수하며, 하나님 나라의 확장을 도모해야 합니다. 장재형목사를 비롯해 수많은 목회자와 신학자, 그리고 헌신된 성도들은 이 말씀을 단지 ‘좋은 비유’나 ‘교훈’으로 소비하는 데 그치지 않고, 실제 삶에서 구현하려고 노력해 왔습니다. 우리 또한 이제는 그 부름을 각자의 자리에서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합니다.
두려움은 있을 수 있습니다. 밤이 새도록 애썼지만 얻은 것이 없는 경험이 우리의 어깨를 짓누를 수도 있습니다. 주변 상황이“지금은 때가 아니다”라고 말할 수도 있고, ‘교회가 힘을 잃었다’거나 ‘세상은 복음을 원치 않는다’는 식의 회의론이 지배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예수님은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라”고 하십니다. 추수할 곡식이 많다며, 우리가 그 일꾼이 되라고 하십니다. 이 부르심 앞에서, 우리는 베드로처럼 “죄인임”을 고백하되 동시에 그 은혜에 기대어 일어나야 합니다.
장재형목사는 교회가 단순히 과거의 붕(Revival) 경험이나 숫자적 성장에만 매몰되지 말고, 새로운 세대를 향해 여전히 유효한 복음의 능력을 전해야 한다고 강조합니다. 새로운 문명과 문화의 파고가 밀려드는 시대일수록, ‘수고했지만 빈 그물’을 경험하는 이들이 더욱 많아질 수 있습니다. 바로 그때 교회가 깊은 곳으로 나아가, 사람들의 영혼 깊숙이 “생수를 주시는 예수님”을 전하고, ‘목자 잃은 양’을 향한 구원의 메시지를 선포해야 합니다. 이는 어렵고 두려운 사역일 수 있으나, 예수님의 권세와 함께하심이 약속되어 있기 때문에 감당해 낼 수 있는 일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말씀을 다시 읽고 묵상함으로써, 영혼 구원의 절박함과 우리에게 이미 부여된 사명을 재확인하게 됩니다. 누가복음 5장이 보여 준 ‘사람 낚는 어부’의 소명, 마태복음 9장이 보여 준 ‘추수의 시급성’, 그리고 마태복음 28장 19-20절의 ‘대사명’은 서로 분리된 이야기가 아니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교회는 이 위대한 부르심을 붙들고, 일꾼을 세우고, 세상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는 말씀을 교회와 성도 개개인에게 적용할 때, 비로소 우리는 빈 그물을 다시 던져 풍성히 거두는 기쁨을 누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추수의 때에, 목자 잃은 양 같은 영혼들이 예수님께 돌아올 때, 우리는 하나님 나라가 실제적으로 확장되는 현장을 목도하게 될 것입니다. 이 모든 과정은 결코 인간의 능력으로 이뤄지는 것이 아니며, “말씀에 의지하여” 거룩한 순종을 결행할 때 비로소 열리는 길입니다.
그러므로 다시 한번 확인해야 할 것은, 교회가 존재하는 목적이 무엇인가 하는 근본 질문입니다. 사람을 낚는 그물질과 곡식을 거두는 추수는 모두 영혼 구원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교회가 이 본질적 목표를 잃어버릴 때, 우리는 쉽게 세속화의 길로 들어섭니다. 예배는 형식적 이벤트가 되고, 봉사는 자기만족이 되고, 교제는 폐쇄적 동아리 활동이 될 위험이 있습니다. 그러나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라”는 말씀과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다”는 외침을 경청한다면, 우리는 멈춰 있지 않고 계속 앞으로 나아갈 수 있습니다. 베드로처럼, 아침 햇살이 비치는 갈릴리 호숫가에서 주님의 명령을 새롭게 듣고, 그날 두 배 가득 잡혀 올려진 물고기를 보고 놀라워하는 기쁨을 맛볼 수 있습니다.
이 모든 여정에서 우리가 명심해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20)”고 약속하셨다는 점입니다. 두려움과 약함 속에서도, 추수의 주인 되시는 예수님이 함께하신다면 우리는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될 수 있고, 목자 없는 양들에게 목자 되신 주님의 음성을 전할 수 있으며, 땅끝까지 복음을 전파하는 그레잇 커미션을 감당할 수 있습니다. 장재형목사를 비롯해 이 말씀에 사로잡힌 수많은 이들이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리는” 삶을 살고 있습니다. 우리 또한 이 두려움을 이기고, 주님의 명령에 참여하는 이들이 될 수 있기를 소망합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 본문 누가복음 5장 1-11, 그리고 마태복음 9장 35-38 말씀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입니다. 한편으로는 어부의 비유, 또 한편으로는 추수의 비유를 통해, 우리는 교회와 성도가 왜 ‘사람을 구원하는’ 일에 힘써야 하는지를 깨닫습니다. 그 목적을 놓치지 않을 때, 교회는 짠맛을 잃지 않는 소금이 되고, 어두운 세상에서 빛을 발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렇게 충성되고 지혜로운 종들이 “때를 따라 양식을 나눠 줄”(마 24:45) 때, 세상은 “목자 없는 양”이 아니라, 참된 목자이신 예수님께 돌아오는 추수의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려라”는 말씀이 우리의 마음을 두드리고, “추수할 것은 많되 일꾼이 적다”는 주님의 음성이 우리를 깨우치는 이 순간이, 우리 각자와 교회 공동체 모두에게 새로운 시작점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