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러시아의 대문호 레프 톨스토이의 고전 명작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에는 가난하지만 따뜻한 마음을 가진 구두장이 시몬이 등장합니다. 그에게는 매서운 겨울을 날 아내와 나눌 단 한 벌의 낡은 양가죽 외투뿐이었고, 그마저도 털을 덧대려다 돈이 부족해 빈손으로 발길을 돌리던 어느 추운 밤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눈보라 치는 길가에 벌거벗은 채 얼어붙어 가는 낯선 청년을 결코 외면하지 못합니다. 잠시 망설이던 그는 결국 자신의 낡은 외투를 벗어 낯선 이의 굽은 어깨를 덮어주며 집으로 데려와 마지막 남은 따뜻한 빵과 차를 기꺼이 나눕니다. 훗날 그 청년이 벌을 받아 지상으로 쫓겨난 천사 미카엘이었음이 밝혀지고, 천사는 “사람은 자신을 살피는 이기적인 마음이 아니라, 타인의 결핍을 채우려는 사랑으로 살아간다”는 위대한 진리를 남기고 승천합니다. 이 숭고한 문학적 증언은, 철저한 이기적 본성을 거슬러 기꺼이 자신의 삶을 나누는 이타성이 얼마나 세상을 따뜻하게 지탱하는지 보여줍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러한 나눔이 단지 인간의 일시적인 선의나 착한 심성만으로는 결코 완성될 수 없다고 선언하며, 영원히 마르지 않는 은혜의 근원으로 우리를 초대합니다.
움켜쥔 손을 펴게 하는 십자가의 역설과 넉넉함
고린도후서 9장에서 사도 바울이 궁핍한 예루살렘 교회를 위해 이방 교회들에게 요청한 ‘연보(헌금)’는 단순한 자선 냄비나 일회성 구호 활동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복음이 한 사람의 굳어진 영혼과 이기적인 지갑을 어떻게 완전히 재구성하는가를 보여주는 거룩하고도 혁명적인 영적 사건입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 본문에 대한 깊은 신학적 통찰을 통해, 연보가 누군가의 물질적 결핍을 메우는 경제적 행위인 동시에, 보이지 않는 하늘의 은혜가 눈에 보이는 물리적 형태로 굳어지는 통로임을 명확히 강조합니다. 우리가 흔히 오해하듯 진정한 넉넉함은 통장 잔고의 숫자나 창고에 쌓인 곡식의 양에서 나오지 않습니다. 십자가에서 이미 다함없는 은혜를 경험한 성도는, 더 이상 인색한 계산의 잣대가 아닌 벅찬 감사의 눈으로 자신의 소유를 재평가하기 시작합니다. 억지로 쥐어짜는 윤리적 의무나 동정이 아니라, 내 영혼 안에 폭포수처럼 흘러넘치는 생명이 굳게 움켜쥐었던 손을 자연스럽게 펴게 만드는 기적, 이것이 바로 참된 복음의 능력이자 사도 바울이 말한 은혜의 실체입니다.
각자도생의 시대를 거스르는 거룩한 영적 생태계
바울은 헌금을 ‘씨를 뿌리는 농부의 일’에 비유합니다. 씨앗은 안전한 창고 안에 고이 쌓아둘 때가 아니라, 기꺼이 썩어질 어두운 땅속으로 던져질 때 비로소 서른 배, 육십 배의 생명력 넘치는 열매를 맺습니다. 깊은 성경 묵상의 자리에 조용히 나아가면, 우리는 바울이 요청한 이 나눔이 결코 ‘많이 바치면 더 많이 돌려받는다’는 세속적이고 기복적인 투자 논리가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장재형 목사의 설교는 이 헌신의 파동을 ‘하나님 나라의 영적 생태계 원리’로 깊이 있게 풀어냅니다. 초대 교회의 구제는 힘의 논리가 지배하던 제국의 각자도생적 질서를 정면으로 거스르는, 매우 급진적인 ‘균등’의 실천이었습니다. 한 지체가 굶주리면 다른 지체도 그 고통을 기꺼이 자신의 것으로 여기고, 한 지체가 풍성하면 그 풍성함을 혈관처럼 자연스럽게 흘려보내는 유기적인 그리스도의 몸 된 호흡이었습니다. 빈곤을 어쩔 수 없는 개인의 숙명으로 방치하지 않고, 가난한 자를 동정의 대상이 아니라 신앙 공동체의 중심에 두어 그 무게를 함께 짊어지는 것, 이것이 세상의 어떤 집단과도 철저히 구별되는 교회의 진짜 얼굴입니다.
헌금함을 넘어 타인의 상처 속으로 스며드는 구체적 사랑
성경이 말하는 나눔과 연보는 결코 차가운 경제적 수치나 회계 장부의 기록으로 환원되지 않습니다. 그것은 결국 인간의 잃어버린 존엄을 따뜻하게 회복시키고, 단절되었던 관계의 틈을 다시 잇는 사랑의 다리입니다. 바울은 연보를 통해 물질적 도움을 받은 이들의 입술에서 폭발하는 진실한 ‘감사’가 다시 간절한 기도가 되어, 수혜자와 후원자를 가르지 않고 공동체 전체를 영적으로 묶어낸다고 말합니다. 장재형 목사는 이러한 감사와 사랑, 기도의 유기적인 순환 구조가 곧 교회를 끝없이 성숙하게 만드는 영적 심장 박동이라고 짚어냅니다. 만약 현대 교회가 미래를 대비한다는 세속적인 명목으로 재정을 거대하게 축적하기만 하고 당장 피 흘리며 신음하는 이웃을 외면한다면, 그것은 생명력을 잃은 종교 집단에 불과할 것입니다. 오늘날 교회가 회복해야 할 것은 화려한 건축물이나 정교한 프로그램이 아닙니다. 강도 만난 자의 고통을 기꺼이 나의 바쁜 일정 속으로 편입시키는 선한 사마리아인의 거룩한 용기입니다.
결국 장재형 목사가 전하는 고린도후서 9장의 장엄한 메시지는 오늘날의 성도들을 ‘더 많이 축적하는 삶’이 아닌 ‘더 깊고 넓게 흘려보내는 삶’으로 간절히 초대합니다. 성도의 참된 섬김은 주일 예배당의 화려한 조명 아래 놓인 헌금함에서 결코 끝나지 않습니다. 그것은 시몬이 나의 낡은 외투를 벗어 얼어붙은 이웃의 어깨를 덮어주었던 그 투박한 손길처럼, 가장 일상적이고 구체적인 삶의 한복판에서 이루어지는 위대한 신앙 고백이어야 합니다. 오늘 당신의 넉넉함은 어느 웅덩이를 향해 고여 있습니까? 아니면, 메말라가는 어느 이웃의 영혼을 향해 생수처럼 흐르고 있습니까? 장재형 목사의 이 묵직하고도 뼈아픈 질문 앞에서, 우리는 값싼 은혜를 핑계로 이기심을 정당화하던 부끄러운 모습을 철저히 회개하게 됩니다. 부디 이 생명력 넘치는 설교의 울림이 우리 각자의 굳게 닫힌 지갑과 마음을 활짝 열어젖혀, 얼어붙은 세상 한가운데로 따뜻한 그리스도의 사랑을 막힘없이 흘려보내는 거룩한 마중물이 되기를 간절히 기도합니다.